#251
지금부터는 봐주는 거 없습니다
각자의 폴앤크루 지분 분할 계약서가 든 서류 가방을 들고 나와 장 본부장이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알렌 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십니까?”
-이야기 다 끝나셨습니까?
“네, 다 끝났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근처 커피숍입니다. 혹시라도 이야기가 길어질까 해서….
잠시 뒤 알렌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알렌 강에게 장 본부장이 말했다.
“소주는 다음에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알렌 강은 나와 장 본부장의 표정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상무님, 위에 혼자 계십니다. 저희 나올 때 한 잔을 더 시키셨습니다. 누군가는 옆에 있어 드려야 할 거 같습니다.”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경은요, 무슨. 제가 이런 인사를 받을 자격이나 되는 사람입니까.”
“조금만 더 늦게, 그리고 뭔가가 제대로 갖춰진 상태에서 첫 만남을 했더라면 분명 지금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바닥을 보이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장 본부장이 한 말에 나와 알렌 강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정확한 이해, 분석이 없는 상태에서 어느 누군가의 독단적인 질주로, 그 질주에 속도르 맞추려다 보니 서로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장 본부장의 말처럼 아쉬움이 참 많이 남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서로에게 젠틀하지 못했고, 또 서로를 물어뜯기 위해 이빨을 가는 모습까지 숨기지 않고 모두 다 보여줬으니.
“진짜 바닥을 보여드렸던 건 저죠. 부끄럽습니다.”
“얼른 올라가 보시죠. 제 기분상 오늘은 좀 많이 드실 거 같습니다. 평소 드실 때보다 속도를 내시네요.”
“네,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소주는 다음에 하는 걸로… 분명 기회가 있겠죠?”
“한국에 계시는 동안은 간간이 있을 거 같습니다.”
장 본부장의 대답에 알렌 강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다.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알렌 강이 몸을 돌려 상무님이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곳으로 올라갔고, 그 입구에서 나와 장 본부장은 마땅히 담배를 피울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찾았다.
“저쪽으로 가시죠. 주차장 옆에… 애들 담배 피우고 있네요.”
마침 근처에 식당 몇 군데가 공동으로 대여해서 주차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곳이 보였다.
그곳에서 나와 장 본부장은 말없이 서로의 담배를 태워 나갔고, 장 본부장이 시간도 어중간한데 저녁이나 같이 먹고 헤어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솔직한 내 심정은 지금 당장이라도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달려가서 지분 분할 계약서를 강혜선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그게 되나, 어디….
자랑하고 싶은 마음 못지않게 장 본부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컸다.
속마음을 억지로 숨기며 당연한 거 아니냐며 난 마땅한 식당을 눈으로 찾기 시작했다.
“모르는 데 가지 말고 저기 뒤쪽에 곱창집 가자.”
“곱창 드시고 싶습니까?”
“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혹시 나중에 상무님 다시 만나면 괜히 또 어색해지잖아.”
“하긴….”
“괜찮지?”
“뭐가요?”
“한잔해도.”
“아, 그럼요. 당연하죠. 지금 기분에 한잔 안 하고 바로 들어가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종업원들이 직접 구워 주는 곱창집이 있다.
약간 부산의 연산 로터리나 수영 쪽 곱창 골목에 있는 곱창집 느낌인데, 그곳들보다는 깔끔하고 또 한 공간 안에 여러 가게가 따닥따닥 붙어 있는 재래식 느낌이 아니라 그 느낌만 잘 벤치마킹해서 프랜차이즈를 시킨 곱창집이다.
그곳에서 곱창 3인분과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분명 배가 많이 고파야 하는 시간인데, 이상하게 식욕이 사라진 기분이랄까.
계속 머릿속으로 지분 분할 계약서가 떠올랐다.
장 본부장만 앞에 없으면 당장이라도 꺼내서 보고 싶었다.
“공 부장 너 진짜 괜찮겠어?”
“뭐가요?”
“나야 폴앤크루로 튀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공 부장 넌 앞으로 계속 본사에 남아서 마주쳐야 할 거 아냐. 안 불편하겠어?”
“불편하겠죠.”
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곱창 한 점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소주 반 잔으로 입속을 대충 가글해 놓고 쌈무 한 장 속에 풋고추를 싸서 입속으로 넣었다.
“근데 본부장님이 폴앤크루로 가시지 않습니까.”
“…?”
“그리고 전 지분을 받았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본부장님이 폴앤크루로 가시는데, 무조건 가치가 오를 수밖에 없는 이 지분을 포기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돈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까?”
“너라면 있을 줄 알았는데…”
“있다고 합리화를 시켰던 거죠. 그전까지는 제 가치만큼의 대우를 못 받고 있다고 느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제 가치만큼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하니, 3년을 버텨야 하는 이유를 찾아서 합리화를 시키면 그만입니다.”
“푸훕…”
“월 4, 5만 원…. 그리고 마지막엔 겨우 7만 원 정도 받으면서 2년이라는 시간을 군대에서 보냈습니다. 그것도 했는데, 이게 뭐라고요. 안 무섭습니다, 하나도. 이제 알겠거든요.”
“뭘?”
“회사로부터 팽을 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최소한 있는 동안엔 절 건드리지 못한다는 걸. 상무님이 내걸었던 5년 계약? 최소한 그 5년 동안엔 저나 본부장님께 빼먹을 게 있다고 판단을 내렸던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3년으로 줄였고, 그 3년 동안에는 어떻게든 지분을 준 만큼은 빼먹으려고 하겠죠. 성질대로 제 스타일 한번 보여줬고, 3년이란 계약 기간 동안엔 잘하나 못하나 어쨌든 절 계속 끌고 가야 할 거 아닙니까. 이제 이렇게 되면 아쉬운 쪽은 회사인데 제가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실은… 제수씨를 한번 만나 볼까 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제수씨? 누구요? 우리 집사람 말입니까?”
“응.”
“집사람은 왜요?”
“상담을 좀 받아 볼까 해서.”
“…?”
“지금 내 나이에 이직은 힘들지.”
“본부장님 나이가 어때서요? 아닌 말로 본부장님 정도 되면 서로 모셔가겠다고 하지.”
“옮기면 끝이냐? 거기서도 살아남아야 할 거 아냐. 어딜 가나 또라이 질량 법칙은 존재하는 법이고, 또 결국은 여기서 했던 거 거기 가서 그대로 해야 할 건데…. 이 나이 먹고 내 홈그라운드도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롭게 시작하는 거? 힘들다고 봐야지.”
“….”
“공 부장이야 아직 나이도 있고, 또 업계에 풀린 평판이 있으니까 원하는 조건 다 맞춰주고도 서로 데려가겠다고 하겠지만, 나 정도 되면 이제 나이가 짐이 되는 거거든.”
“에이….”
“몇 년 전에 CGM 코리아 봐라. 공 부장 너한텐 접촉을 해도 나한텐 안 하잖아.”
“…!”
“그때 이미 난 살짝 늦었다는 기분이 들더라. 물론 크게 이직을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래서… 이참에 잘됐다 싶은 마음에 내 장사 한번 해볼까 했다.”
“나쁘지 않죠. 본부장님이면… 그동안 깔아놓은 인맥이며 소스가 다른데….”
“근데도 막상 하려니까 겁이 나더라. 크흐….”
장 본부장은 소주 한 잔을 깔끔하게 비워 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회삿돈으로 하는 거랑 내 돈 부어서 뭘 해보겠다는 건… 이게 시작할 때 마음가짐부터가 다른 거야. 요 며칠 진지하게 구상이란 걸 해보니까 그래.”
“….”
“설레기도 하더라. 자신감도 아직은 충분하고. 근데… 딱 하나 막히는 게 있더라.”
“어떤…”
“혼자서는 못 하겠어. 자금 끌어오는 거야 뭐 퇴직금도 있고 여기저기 잘 찾아보면 채널이 있기도 한데, 아이템 역시 캐나다 쪽 구스 브랜드 하나 눈여겨보고 있었던 게 있고. 근데 이게 확실히 혼자서는 안 되는 거야.”
“….”
“이제야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너한테 물어볼 수 있겠다. 공 부장아.”
“네.”
“우리 딱 3년만 더 남 밑에서 고생하고 우리 사업 하자.”
“…!”
“지금 내 형편에선 사실 공 부장 조건 못 맞춰 주지. 맞춰 주고 싶어도 그거 맞춰 주고 나면 난 손가락 빨아야 될 텐데,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겠느냔 말이야. 근데 이젠 뭐 플앤크루 지분도 생겼고, 앞으로 한 3년간 죽어라 띄워 놓으면 그 뒤부턴 계약에 관한 구속력도 사라지고 또 그만큼의 준비 기간을 확보할 수 있으니 해볼 만하겠단 생각이 드네.”
“뭐 그래도 3년 뒤 아닙니까.”
“난 지금부터 준비를 하려고.”
내가 장 본부장을 안다.
그냥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해. 오늘 받은 이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 난 홍성에서 3년짜리 시한부 인생을 시작하는 거야. 지금 당장에나 대체 불가지 회사 입장에서 3년은 충분하거든.”
“그렇겠죠. 사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음… 솔직히 말할게. 공 부장은 나랑 입장이 조금 다를 거 같다.”
“어째서요?”
“지분 퍼센티지가 말해 주잖아.”
“…!”
“아무튼 내 입장에선 3년이라는 시간을 벌었네.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과 자본을 준비하는 기간. 그리고 폴앤크루로 사업 경험 미리 한번 쌓아 보는 거로.”
난 그저 싱긋이 웃었다.
“한번 지켜보죠. 지금은 뭐랄까… 그냥 좀… 생각을 잠시 쉬고 싶습니다.”
“그래. 술이나 마시자.”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난 폴앤크루 단순 지분 7.56퍼센트에 상무님 그림에 대한 라이선스 퍼센티지까지 포함된 복합 9.64 퍼센티지의 지분 분할 계약서를 꺼냈다.
10퍼센트…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낙에 변수가 많아서 뜨고 지는 브랜드가 많은 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홍성이다.
그래도 홍성이고 또 3년간은 장 본부장이 대표로 있다.
대형 브랜드도 아니고 이제 막 시작한 신생 브랜드의 지분 10퍼센트를 가지고 내 인생의 연금이라고 표현하긴 불안한 감이 많지만, 아차 싶으면 그냥 3년 뒤에 브랜드 성장세를 봐가며 지분 정리라는 걸 할 수도 있는 거다.
충분하다.
이만하면 됐다.
집으로 돌아온 난 강혜선에게 자랑하듯 지분 분할 계약서를 보여줬다.
그런 내게 강혜선이 물었다.
여러 가지 복잡하게 묻지 않고 그냥 단순하게 물었다.
“만족해?”
난 바로 대답을 못 했다.
그냥 ‘이만하면 됐다고 보는데 당신 생각은 어때?’ 하고 되묻는 게 전부였다.
그러자 강혜선은 ‘나야 모르지.’라는 말로 자신의 생각보단 나의 만족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난 ‘만족해.’라는 대답을 내놓았고, 강혜선은 ‘그럼 된 거지. 씻어.’라고 말하며 싱긋이 웃어주었다.
맥주 한 캔을 냉장고에서 꺼내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소파 테이블 밑에 정리해 놓았던 결혼 앨범을 꺼냈다.
“그건 왜?”
“그냥….”
정말 말 그대로 그냥이었다, 그냥.
난 앨범을 꺼내 친구, 지인, 그리고 직장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쩔 수 없이 상무님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결혼식의 주인공이었던 나와 강혜선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끝 열 중간쯤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상무님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좋았던 문 차장의 환한 미소는 이제 보니 꽤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과 동시에 전날 받은 지분 분할 계약서를 들고 전사 운영본부를 찾았다.
그리고 마치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내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장 본부장에게 사인을 해서 가져온 지분 분할 계약서를 전달했다.
“가자.”
“아뇨.”
“….”
“본부장님이 좀 대신 전해주십시오.”
“왜?”
“그냥… 그래야 될 거 같아서요.”
“뭐야? 나 심부름시키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아직은 전사 운영본부장님 아니십니까. 그리고 저는 어제 상무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더 이상 박 이사님 건너뛰고 상무님 방을 찾아가지 않을 겁니다.”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가 전달할게.”
그렇게 지분 분할 계약서 건을 마무리 짓고 사무실로 내려가려다가 김 차장에게 따로 할 말이 있어서 영업 마케팅 층부터 들렀다.
짝.
짝.짝.
짝.짝짝짝짝…
누가 먼저 시작을 했는지 모르겠다.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박수 소리로 인해 영업 마케팅부 전체가 날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급기야 휘파람까지 등장을 했다.
“…”
“잘 생각하셨습니다, 부장님!”
“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당혹스런 마음에 주위만 두리번거리고 있던 내 앞으로 김 차장이 다가왔다.
“결정 잘하셨습니다.”
“뭘…”
“방금 안 차장 왔다 갔습니다.”
“하여간….”
“잘하신 겁니다. 딴 데 간들 뭐 다를 게 있겠습니까. 다 똑같지.”
“아, 박수 그만들 치세요. 뭡니까, 진짜? 그동안 제가 영업 기획부랑 해외 영업부만 편애한다고 저한테 등 돌렸던 사람들 맞습니까?”
“저희가 언제요?”
“저흰 그런 적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부장님 지금 뭔 소리 하시는 거야?”
“그니까요.”
난 그들의 환영 인사에 피식하고 미소를 흘려놓고 김 차장에게 말했다.
“안 되겠네. 앞으로 진짜 편애가 뭔지 제대로 보여줘야겠네요.”
“우… 우…”
“그래서 오늘은 영업 마케팅부만 따로 회식합니다.”
“와!”
난 영업 마케팅부 전원이 보는 앞에서 김 차장에게 부장 카드를 전달했고, 더 큰 박수가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김 차장을 따로 불렀다.
“네, 부장님.”
“폴앤크루… 마케팅 예산 신청하세요.”
“…!”
“장 본부장님이 거기 대표로 가시게 된 거 알고 계시죠?”
“네, 들었습니다.”
“지금부터는 봐주는 거 없습니다. 다 긁어 오세요. 컨트롤 기업이 받아낼 수 있는 모든 혜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