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난… 저거 갖고 싶은데….
가게 안으로는 이른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진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알렌 강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상무님 역시 들고 있던 온더록스 잔을 바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무님은 자신의 스툴 의자의 낮은 등받이에 한쪽 손을 올려놓고 나와 장 본부장을 향해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인 뒤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럼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어디 가시려고요?”
재킷과 서류 가방을 챙기는 알렌 강에게 내가 물었다.
“밑에요. 우린 소주 마시기로 했잖습니까.”
“…?”
“상무님이 물어볼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일에 관한 거냐, 아님 두 분에 관한 거냐고 물어봤더니 두 분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시네요. 그래서 그럴 거면 자리는 마련해줄 테니 직접 하라고 했습니다. 직접 물어보라고. 밑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걸으면서 어떤 안주가 괜찮을지 고민도 해 볼 겸. 천천히 이야기 나누세요.”
그렇게 알렌 강이 자리를 비켜줬고, 나와 장 본부장은 각자의 서류 가방을 바 테이블 가장 끝 빈자리에 겹쳐서 올려놓고 상무님 옆으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장 본부장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상무님은 바 안을 지키고 있던 바텐더를 불러 나와 장 본부장의 주문을 받아달라고 부탁했고, 장 본부장은 상무님이 마시고 있는 것과 같은 거로 한 잔, 난 프로모션 중인 라페 한 잔씩을 각각 주문했다.
“그동안 꽤 오래 회사에서 안 보이셨습니다.”
결국 장 본부장이 이 침묵을 깨뜨릴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는 식으로 의미 없는 질문을 날렸고, 그 질문에 상무님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중국 법인으로 가란 지시가 있으셔서… 그거 준비하느라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 군요. 하실 이야기가….”
그때 난 귀만 열어놓고 바 안쪽으로 진열되어 있는 수입 주류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무슨 변명이라도 그냥 듣고 싶었던 거 같다.
그때처럼 나 혼자 따로 불러내서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고 또 말도 안 되는 자기합리화를 시키려고 했다면 무척이나 짜증이 났을 건데, 지금은 나와 상무님 사이에 장 본부장이 앉아 있고, 그래서 내가 굳이 상대를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듣는 거야 뭐가 어려울까.
그저 난 귀만 열어놓고 바 안쪽으로 진열되어 있는 재밌는 색상의 수입 주류들을 구경하며, 또 때론 눈을 돌려 나와 장 본부장이 주문한 것들이 준비되는 모습을 구경했다.
“폴앤크루 지분 분할 계약서입니다. 이건 본부장님 거, 그리고 이건 공 부장님 거.”
“…!”
분명 지분 뭐시기 뭐시기 하는 소릴 듣긴 했는데, 그게 뭔 소린가 싶었다.
난 바 안으로 진열된 주류들로부터 시선을 거둬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상무님의 얼굴은 장 본부장의 뒤통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장 본부장 앞으로 겹쳐 놓여진 흰색 서류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은 그중 위로 올려진 서류 봉투를 다시 내게 직접 전달하며 말했다.
“이게… 뭡니까?”
장 본부장 역시 당황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무님께 물었다.
난 일단 별생각 없이 상무님으로부터 서류 봉투를 건네받았는데, 그때부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또 아이러니하게도 뭔지 대충은 알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간 제가 했던 행동들에 관한 변명, 핑계… 저한테나 중요한 거지, 두 분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도 납득이 안 되는 그런 행동들에 대해 두 분께 이해를 바라선 안 된다는 것도 알겠습니다.”
상무님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주문한 것들이 도착했고, 난 고소한 맥주 한 잔으로 입술만 살짝 적셔놓고 상무님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장 본부장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상무님의 표정을 상상했다.
자세가 그랬다.
상무님의 얼굴을 보기 위해선 자세를 바 쪽으로 당기거나 아님 뒤로 허리를 펴야 했는데, 분위기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대형 브랜드 업체들과의 중요한 마진 협상 미팅만큼이나 자리가 진지했으니까.
“사장님의 동의하에 홍성에 들어간 제 지분에서 폴앤크루 초기 투자 비용만큼의 금액을 뺐습니다. 그리고 그 돈만큼 현 폴앤크루의 지분을 홍성으로부터 매입했습니다.”
“…!”
“홍성 자체 프로젝트로 시작해서 분리가 되기까지, 아직은 대단위 기관 투자 없이 홍성 본사 자체 투자만으로 꾸려지고 있는 상황이라 제법 많은 퍼센티지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6.8퍼센트. 그 퍼센티지를 백 퍼센트로 놓고 사장님께 여쭤봤습니다. 폴앤크루. 홍성 자체 기획 프로젝트 브랜드라 생각하지 말고 저와 장 본부장님, 공 부장님. 이렇게 셋이서 따로 창업을 해서 만든 브랜드라 생각하고 평가해 달라… 그리고 우리 셋을 폴앤크루의 창업 멤버라고 생각하고 객관적인 평가로 과연 폴앤크루가 홍성으로부터 대단위 투자를 이끌어 내 분리 경영을 하기까지 그 기여도가 어떻게 되는지 평가해 달라고 말이죠.”
“….”
“공 부장님의 기여도를 가장 높게 평가해 주셨습니다. 최소 45퍼센트 정도는 인정해 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직접 브랜드를 총괄하셨고, 또 현재 사업의 핵심이 되고 있는 작가 컬렉션을 이끌어 내셨으며 무엇보다 그걸 성공적으로 진행하셨으니 그 정도는 인정해 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사업의 초안을 잡으신 본부장님의 기여도를 35퍼센트로 잡아 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공장을 뛰어다니시며 수십 벌이 넘는 샘플링 작업을 직접 다 하셨고, 그 덕에 초기 큰 투자 자본 없이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게 만든 기여도로 35퍼센트는 잡아 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저의 기여도를 20퍼센트 정도 잡아 주셨습니다. 그 20퍼센트마저도 크게 잡아준 거다 하셨습니다.”
결국 난 스툴 의자를 뒤로 살짝 빼서 장 본부장 뒤통수 옆으로 상무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거기에 제 그림에 대한 라이선스 퍼센티지 가치까지 합쳐서 지분 분할을 했습니다.”
“….”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홍성에… 남아 주십시오.”
고개를 숙이지는 않았다.
그저 상무님은 들고 있던 온더록스 잔을 휘휘 저어가며, 시선을 바 안 진열대로 돌려놓고 그렇게 부탁하듯 말했다.
“앞으로 폴앤크루에 관해선 그 어떤 관여도 하지 않겠습니다. 중국 법인에서 복귀한 이후에도 폴앤크루의 분리 경영을 꾸준히 지지하고 독립성을 지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하겠습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져주세요.”
혼란스러웠다.
과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기도 했고, 과연 나와 장 본부장이 뭐길래 상무님이 이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장 본부장은 침착했다.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모습.
무서우리만치 침착한 모습으로 상무님의 제안을 분석하는 장 본부장.
“누가 이기고 지고의 문제였습니까?”
“….”
“저희는 아니었습니다.”
“후우….”
“이거… 사장님께서 그러라고 하시던가요?”
“제가 부탁을 드렸습니다.”
“부탁을 드리니까 그냥 별말 없이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하시던가요?”
“자숙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한 번으로 앞으로 더 많은 걸 내려놔야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할 수 있겠냐고도 물어보셨습니다.”
“아니요.”
장 본부장은 온더록스 잔을 돌려가며 말했다.
“아니죠, 상무님. 지분 분할… 단어만 놓고 보면 뭔가 대단히 크게 있어 보이고 아주 중요한 걸 창업 공신들과 쉐어한다는 느낌을 들게끔 만들겠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죠. 브랜드 아작 나는 순간 이거, 이거…”
장 본부장은 서류 봉투를 들어 몇 차례 의미 없이 흔든 다음 다시 바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말했다.
“곧바로 종이쪼가리 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아작 나고 있는 중이고.
“…!”
“지분 분할을 하겠다… 그 말에 숨은 진짜 뜻은 지분 좀 떼 줄 테니까 딴 데 가지 말고 계속 홍성에 남아서 더 많이 가져가고 싶으면 그만큼 브랜드를 열심히 띄워라, 뭐 그런 거 아닙니까? 한마디로 개같이 일하라고 웃으면서 채워주는 족쇄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닙니다, 본부장님.”
“아니라고 하시는데, 이상하게 강 대표 온 이후로 상무님께서 저나 공 부장한테 보이신 모습만 보면 꼭 그런 거 같습니다.”
아놔… 왜 저러지?
난… 저거 갖고 싶은데….
“하아….”
상무님은 아랫입술을 잘근 씹으며 한참을 부들부들 떨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제가 잘못했고, 그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절대 안 그러겠다는 걸 말로 핑계나 변명이 아닌 눈에 보이는 뭔가로 보여드리는 게… 하아… 그게….”
“그럼 중국 가지 마세요.”
“…!”
“전무님은 그걸 징계라고 말씀하셨지만, 저희 눈엔 도망으로밖에 안 보입니다. 도망가지 말고 본사에 남아서 변하는 모습으로 증명을 해주세요.”
“하지만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어떻게 해보세요. 지지하겠습니다, 언제나처럼.”
바 테이블 위로 올려진 상무님의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장 본부장은 그제야 서류 봉투에서 그 내용물을 꺼냈다.
난 내 몫의 서류 봉투가 있음에도 그걸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살짝 고개를 빼내 장 본부장 몫의 내용물을 훔쳐봤다.
“5년 계약이네요? 홍성과의 5년 계약이라는 조건이 붙네요, 그죠? 하긴 뭐 당연한 거지.”
“….”
“너무 깁니다. 3년으로 줄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상무님 곁에 있지 않겠습니다. 뭐 원래 중국 법인으로 가실 계획에 절 데리고 갈 생각은 아니셨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강 대표가 본부장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조건은요?”
“폴앤크루 공동 대표로….”
“그건 강 대표가 원하는 조건인 거고요.”
“….”
“강 대표가 받는 연봉만큼 맞춰 주실 수 있으십니까?”
“….”
“그런 것도 아닌데, 그게 어떻게 공동 대표입니까? 결국 일은 제가 다 할 건데. 거절합니다. 제가 필요하면 대표 자리 내려놓고 저 모셔가라고 하세요. 그럼 생각해 보겠습니다. 대외적인 대표 타이틀은 유지하라 하겠습니다. 그분의 이력이니까. 하지만 폴앤크루 실질적인 경영에는 제 결정과 방향을 무조건 따라야 할 겁니다.”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그렇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전 여기까집니다. 공 부장.”
“…네.”
“어떻게 할 거야?”
거의 처음으로 상무님과 눈을 마주쳤다.
“본부장님 말씀 듣고 보니 그렇네요.”
내가 말했다.
“이 지분 분할이라는 게…. 결국은 족쇄네요. 그런 당연한 이치도 바로 파악을 못 할 정도로 저는 지금까지 줄곧 홍성에서 브랜드, 프로젝트, 브랜드, 프로젝트… 그런 것들만 생각하며 살았네요. 그런데 상당히 혹합니다. 솔직히 더 이상 홍성이 아니라, 홍성에서 함께 일하는 우리 영업부 팀원들 때문이 아니라, 그동안 홍성에 올인했던 제 지난 시간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냥 단순히 딱 이 지분 때문에 흔들리네요.”
“….”
“그런데 저한테도 5년은 너무 깁니다. 3년. 3년으로 하고 다른 조건도 하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는 기본부 업무에 한해서는 영업 이사님께만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엄연히 영업 이사가 따로 있는데, 그리고 전 영업부장인데 더 이상 영업 이사님을 건너뛰는 일은 안 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그 부분이 무척 불편했습니다.”
“영업부 관련해서 모든 보고는 오로지 영업 이사님을 통해서만 전달받고, 또 지시할 내용이 있으면 그 역시 무조건 영업 이사님을 통해서만 지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