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캐릭터 모으냐?
“분명 좀 더 유연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장 본부장이 알렌 강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런 장 본부장을 향해 알렌 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유연한 방법이라면… 어떤 방법을 말씀하시는 건지….”
“이렇게 임원진들 다 모셔놓고 그렇게 공개적으로 하실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제야 알렌 강은 처음 장 본부장이 했던 말의 뜻을 이해했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쓴 미소를 지었다.
“참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알렌 강이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본사 상무의 입장을 생각하는 본부장님이나, 이런 본부장님, 공 부장님의 진심을 이해 못 하는 본사 상무… 고집들인가요?”
“….”
“아니, 그렇잖아요. 제가 못 할 프레젠테이션을 한 것도 아니고, 비록 노골적으로 본사 상무의 미흡한 부분을 지적했지만, 두 분 입장에선 시원할 수 있어서 좋은 거 아닌가? 그리고….”
장 본부장의 미간이 좁아지는 순간 알렌 강은 들고 있던 유에스비를 내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전무님의 요청이었습니다, 방금 전 제가 했던 프레젠테이션은.”
“…!”
나와 장 본부장은 동시에 입을 벌린 채 두 눈만 열심히 감았다 떴다.
“저는 두 분처럼 홍성에 대한 애정으로 회사에 나오는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저 역시 두 분처럼 그런 뜨뜻미지근한 감정에 참 오래 속아 왔고, 그래서 앞으론 그걸 하지 않겠다고 홍성으로 옮겨온 거지만.”
“….”
“공 부장님이 다녀가신 이후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셋업 멤버들을 다 불러놓고 공 부장님이 주시고 간 자료들을 가지고 회의를 했었죠. 누구 하나 제가 본사 상무님과 함께 가겠다고 준비 중이었던 방향이 맞다는 말을 못 하더군요. 공 부장님의 아이디어와 비교를 해서 말이죠.”
알렌 강은 마치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어깨를 살짝 들었다 내리며 쓴웃음을 흘렸다.
“본사 상무님한테 제가 전화를 몇 번이나 했습니다, 공 부장님이 다녀가신 이후에. 이런 이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날 찾아왔더라, 혹시 알고 있는 내용이냐. 난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공 부장님이 주고 가신 내용으로 폴앤크루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을 하냐…”
“그랬더니요?”
“그때부터 이상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더라고요.”
“….”
“딱 보면 알잖아요. 고집이다, 아니다 하는 것쯤은. 분명 제삼자가 봤을 땐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꾸면 전부 다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거 같은데, 그걸 안 하려고 하더군요. 저는 그게 홍성의 입장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틀 전에 본사 전무님으로부터 전화가 오는 겁니다. 그때 확실히 알았죠. 회사의 뜻이 아니라 본사 상무님의 고집이라는 걸.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사 상무가 지금 계속 자기 스스로를 뭔지 모를 틀 속에 옭아매고 있다는 걸.”
“전무님이 전화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내가 물었다.
“폴앤크루…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냐, 혹시 뭐 필요한 건 없느냐… 하는 식으로 안부 전화처럼 전화를 주셨던데, 제가 뭐 바보도 아니고 그 의도를 모르겠습니까? 지금껏 한 번도 직접적인 연락이 없으셨던 분이 딱 두 분이 퇴사를 하겠단 뜻을 밝힌 이후, 그것도 공 부장님이 다녀가신 이후에 연락을 하셨는데. 문제가 있는 거 같다고 말씀을 드렸고, 뭔가 결정을 내리고 방향을 제시해 줘야 할 사람이 갈팡질팡하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하고 있는 중이라고 솔직히 말씀을 드렸죠.”
알렌 강은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다음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살짝 적셔 놓고 말을 이었다.
“그게 전부입니다. 본사 상무님이 어째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거 같냐고 물으시더니 진짜 묻고 싶으셨던 건 그게 아니었던지 곧바로 공 부장님이랑 어떤 이야기를 나눴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
“일적인 이야기를 좀 나눴다, 폴앤크루 관련해서 새로운 방향을 하나 제시해 주고 갔다고 말씀드리면서 그걸 설명해 드리려고 했는데, 제 말을 끊으시더라고요. 그냥 이렇게만 물어보셨습니다. 당신이 보기엔 공 부장의 방향이 맞는 거 같느냐고. 그래서 전 방향뿐만 아니라 명분과 가치, 그리고 수익성 모두가 완벽한 시나리오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랬더니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다면서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이런 자리가 마련된 거고.”
그 순간 난 다른 내용은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고, 이상하게도 고집이라는 단어만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고집….
“그리고 또….”
알렌 강은 입맛을 다시며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저도 그림을 했던 사람이고요.”
“….”
“본사 상무님이랑 형, 동생 하며 매일같이 어울려 다니던 시절엔… 저도 미술을 했던 사람이고, 비록 재능이 부족해서 접어야 했지만, 보는 눈은 있거든요. 아예 없는 길이라면 모르지만, 이렇게 무명 아티스트들을 발굴할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려 있는데, 그걸 직접 지원하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그걸 막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뜬금없이 나와 장 본부장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알렌 강이었다.
“두 분이 만들고 싶어 하신 폴앤크루의 가치를… 제가 제대로 못 알아봤습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저는 저 스스로 대표 자격이 없다는 걸 시인한 꼴입니다. 면목 없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닫힌 줄 알았던 회의실 문 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난 고개를 돌렸고, 내 시선이 멈춘 곳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무님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우리 셋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렌 강.
정말 모를 사람이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얼굴이었다.
네가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 거냐는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발표 자리로 돌아가서 자신의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왜 그랬어요?”
상무님이 물었다.
“뭐가?”
“뭐… 가? 여기 회삽니다.”
“그렇지. 분명 다른 사람들한테는 회산데, 이상하게 너한테만은 놀이터지. 그리고 난 지금 네 놀이터에 올인해 주고 계신 분들 상대로 네가 하는 파워 게임이나 돕자고 파리 생활 다 정리하고 온 미친놈이고 말이야. 내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길 기대해?”
알렌 강의 날 선 대응에 상무님은 주춤했다.
“내가 너라면 절대 너처럼 못 한다.”
“형!”
“귀 안 먹었어. 살살 말해. 그리고 네가 뭔데 나한테 소릴 질러?”
“…!”
“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한테 와서 제갈공명이 되어 달라고? 관우랑 장비는 이미 있는데, 제갈공명이 없다고? 웃기고 있네. 캐릭터 모으냐? 네가 유비가 아닌데, 관우가 어딨고, 장비가 어딨어? 유비… 아무리 무능하다 해도 너만큼 할까. 유비 모욕하지 마. 넌 날 제갈공명이 아니라 그냥 바보로 만들었어. 그것도 네 자존심, 고집 때문에.”
“…!”
“그래도 친구니까. 내가 아끼는 동생이니까 해주는 말이야. 잘 들어. 전문 경영인? 홍성은 필요 없어, 그런 거. 이런 회산 줄 알았음 안 왔어, 나. 여기서 내가 뭘 해? 너나 회사는 저런 분들한테 그냥 무조건 감사해야 돼. 그냥 감사만 해, 능력 안 되면. 괜히 딴 거도 해보겠다고 나대다가 다른 사람들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감사만…. 파리였음 너 진짜… 아휴… 진작에 아웃이야. 그나마 저 두 분이라도 계셨으니 지금까지 왔던 거라고 본다, 난. 근데 저 두 분까지 나가면 넌 진짜… 답 없다. 더 늦기 전에 잡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당히 해요, 적당히. 뭘 안다고….”
“아까 나 프레젠테이션 할 때 여기 모인 사람들 표정 못 봤어? 그게 이 회사가 널 보는 눈이고 답인 거야, 인마. 아마도 지금 내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심정으로 그때 공 부장님이 날 물어뜯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널 물어뜯을 순 없으셨을 테니….”
“…!”
“더 곪기 전에 터뜨려 준 거뿐이야. 이게 내가 사업을 떠나서 너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인 거 같아서… 너랑 나 사이에 그 정도 우정은 있다고 보고 또 난 그거 터뜨려준 것만으로도 이미 너한테 약속받은 몸값은 충분히 했다고 본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한 번의 주말이 찾아왔다가 번개처럼 지나갔고, 많을 것만 같았던 인수인계 내용은 의외로 적어서 업무 시간에 나도 모르게 잡생각만 많아지기 시작하던 즈음 한 통의 호출이 걸려 왔다.
전무님의 호출이었다.
전무님 방엔 이미 박 이사와 장 본부장이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지금까지 홍성 역사를 통틀어서 이번처럼 뼈아픈 손실도 없고, 또 경영진의 무능력이 제대로 입증된 적도 없다.”
전무님이 말씀하셨다.
“위기? 그건 항상 있어 왔어. 위기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그런데 지금 이 손실은 고작 위기라는 단어만 가지고 해석을 하기엔 부족한 감이 많네. 이렇게 어이없는 실수가 날 거라고는 정말 예상을 못 했다. 내 실수지, 그지?”
전무님의 말에 모두는 고개만 숙인 채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하아… 참… 쩝, 장 본.”
“네, 전무님.”
“진짜 안 되겠냐? 그냥 조금만 더 같이하자.”
“….”
장 본부장의 침묵에 전무님은 두 눈을 감고 목이 뻐근했던지 이리저리 목을 돌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장 본을 상무 옆에 붙이라는 사장님 지시 자체가 잘못이었어. 욕심이셨지. 골잡이 스트라이커를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애 옆에 붙여서 그 걸음마를 가르치라고 했으니 이게 얼마나 미련하고 상식 밖의 지시였느냔 말이야. 공 부장 성장세만 보고 그걸 못 막았던 내 잘못이 제일 크다, 따지고 보면. 그냥 그때 영업부 두 개로 쪼개서 큰 틀은 장 본이 끌고 가게 만들고 공 부장을 해외 쪽으로 집중시키자고 좀 더 강하게 설득을 했어야 했는데… 야 공 부장.”
“네, 전무님.”
“그러게 좀 살살 하지, 이 친구야.”
“…?”
“왜 그렇게 잘해서… 날 기대하게 만들었어, 어?”
놀랍게도 그 순간 전무님은 농담을 하셨다.
그게 농담인지 헷갈렸던 난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라 박 이사와 장 본부장의 표정을 살폈다.
두 사람은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애써 힘든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할 정도로 사안이 심각하다. 마음 같아서는 똥 싼 놈보고 치우라고 하고 싶은데, 지가 싼 똥조차 제대로 닦을 줄 모르는 놈한테 그걸 시킨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렇다고 내가 안고 자숙을 하자니 어질러진 걸 대신 치워줄 사람도 없고. 그래서 전 상무는 중국 법인으로 보내기로 했다.”
“…!”
“정말 마음 같아서는 두 사람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하지만 나로 인해 맘이 상한 게 아닌데, 그걸 내가 무슨 수로 풀어주겠나. 그렇게 풀어본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거지. 그저 나는… 사장님 동의하에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라는 걸 보여주고 싶을 뿐이고… 그래서 내 진심이 조금이라도 자네들한테 닿기를 바랄 뿐이야. 그리고… 이 정도로도 마음이 안 풀린다면… 그냥 뭐 응원하는 수밖에.”
그날 퇴근 무렵이었다.
알렌 강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서로 나갈 때 나가더라도 그동안 쌓인 미운 정 정도는 털어내야 하지 않겠냐며 시간이 괜찮으면 같이 소주나 한잔하자는 연락이 왔다.
장 본부장에겐 아직 연락을 못 했다며, 괜찮으면 장 본부장에겐 대신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겠냐고 부탁을 했다.
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저 알렌 강이 말한 미운 정이라는 표현이 나와 장 본부장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 같다.
퇴근 후 회사 앞.
소주나 한잔하자더니 그사이 종목이 바뀌어 있었다.
카오스라는 바로 약속 장소가 변경되었다.
아무렴 어떨까 싶었다.
소주보다는 위스키가 질질 안 끌어도 되고, 서로 할 말만 하고 깔끔하게 술자리를 끝낼 수 있을 거 같았으니까.
“여깁니다.”
지난 며칠간 회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상무님이 알렌 강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상무님은 그저 바 테이블 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온더록스 잔을 휘휘 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