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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48화 (248/325)

#248

끊지 마, 아무도

스크린 앞으로 알렌 강이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한 상무님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선 상무님은 전무님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고, 한참을 흔들리는 눈으로 알렌 강을 쳐다봤다.

하지만 알렌 강은 그런 상무님과 잠시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도대체 뭘 하겠다고 저러는 걸까.

나와 장 본부장은 임원석 뒤로 마련된 배석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알렌 강의 프레젠테이션을 기다렸다.

“자멜리 존슨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17세 흑인 여자아이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폴앤크루 쪽으로 보낸 사연 속에 몇 번이나 자신이 블랙임을 강조해 놨더라고요.”

나와 장 본부장은 스크린 속으로 자멜리 존슨의 사진이 뜨는 순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저건 내가 장 본부장의 동의를 구해 알렌 강에게 전달했던 PPT였다.

그 어떤 수정도 하지 않고 내가 전달했던 PPT를 가지고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 알렌 강.

난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저거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러게요.”

난 가슴 앞으로 팔짱을 꼈고, 장 본부장은 배석 테이블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려놓고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붙였다.

“마약 판매상이었던 자멜리 존슨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던 해에 총기 사고로 죽었고, 그녀의 어머니는 매춘을 하며 그렇게 미혼모로 혼자 자멜리 존슨을 키웠다고 합니다.”

“아니, 잠깐만요.”

어디선가 알렌 강의 발표를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 대표님. 지금 여기서 왜 뜬금없이 폴앤크루 관련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시는 겁니까? 그런 건 폴앤크루 안에서 자체적으로 하셔야죠.”

“헷갈려서요.”

“헷갈리다니요? 헷갈릴 게 따로 있지….”

“조금만 참고 들어 주십시오. 이 발표를 꼭 해야겠단 결심을 하기 전까지 저도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강 대표는 그냥 계속해요. 그리고 끊지 마, 아무도.”

전무님의 지시가 떨어지는 순간 알렌 강은 전무님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후, 들고 있던 리모트 컨트롤러로 PPT를 한 장 넘겼다.

“자멜리 존슨이 그린 그림입니다. 놀라웠습니다. 만약 그녀가 폴앤크루 홈페이지에 보낸 자신의 사연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감동적인 그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그림을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저 그림과 음악은 그녀가 현재 처한 환경에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펜…. 아…. 이걸 한국말로 뭐라고 하죠? 환풍구? 아무튼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자멜리 존슨의 나이 17세. 미국에선 대학을 준비해야 하는 나이겠죠? 하지만 그녀에겐 대학을 갈 여유가 없습니다. 본인 스스로도 대학에는 큰 뜻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다만… 이제는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보살피고 싶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젠 그림을 놓고 자신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

“그리고 자멜리 존슨 외에도 해외에서 들어온 사연 및 작품 투고는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제이드를 통한 광고 마케팅으로 폴앤크루의 존재를 알게 된 전 세계 무명 아티스트들의 투고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스타벅스를 벤치마킹한 프로젝트 시나리오.

그 프로젝트가 나오는 순간 회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임원진들의 자세가 바로잡히기 시작했다.

“좋은데?”

“좋은 정도가 아니라 기가 막히네….”

“확실히 대형 브랜드 본사에서 온 사람이라 그런지 마케팅력이 다르긴 하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내용은 영업부의 공은태 부장님이 며칠 전 폴앤크루 사무실을 찾아오셔서 이렇게 폴앤크루를 발전시켜 나가면 어떻겠냐고 저에게 제안을 하신 내용입니다.”

알렌 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선은 곧바로 나와 장 본부장이 앉아 있는 배석으로 몰렸고, 그 웅성거림은 한층 더 높아졌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제가 공은태 부장님으로부터 이 제안을 받기 전까지 준비하고 있었던 폴앤크루의 해외 진출 플랜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알렌 강이 낮추겠다고 했던 폴앤크루의 마진, 그리고 작가 컬렉션 생산 물량이 화면에 떴고, 그다음 장으로는 현재 알렌 강이 접촉 중인 해외 컨트롤 기업들의 리스트가 나열되었다.

“여기 지금 빨간색으로 하이라이트를 넣은 부분은 긍정적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업체들이고 파란색으로 하이라이트를 넣은 부분은 조정이 막힌 업체들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 폴앤크루의 가격 포지셔닝으로 들어가서 성공 가능성이 있는 37개 국가에는 다 넣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리모트 컨트롤러로 다음 장으로 넘긴 알렌 강.

스크린에는 빨간색 대형 엑스자가 그어져 있었다.

“앞서 미리 보여드렸던 공은태 부장님의 제안과 현재 제가 추진 중에 있는 해외 컨트롤 기업과의 접촉은 마진상, 그리고 컨셉상 같이 진행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시킬 수야 있겠죠. 하지만 공은태 부장님의 제안대로 진행을 하겠다고 하면 마진 폭을 낮추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 그대로 폴앤크루 입장에선 할 필요가 없는 디스카운트가 되는 거고, 그렇다고 낮춰놓은 마진으로 현재 긍정적으로 접촉 중인 해외 컨트롤 기업들에게 처음 제가 제시한 마진에서 본래 마진으로 상향 조정을 하겠다고 하면 그건 비매너가 되는 거겠죠.”

“….”

“처음 저는 홍성 측으로부터 폴앤크루의 대표이사직을 제안받았을 때 해외 채널만 효과적으로 뚫어 달란 미션을 받았습니다. 그것만 해주면 된다… 라고 했습니다. 브랜드의 콘셉트를 정립하고 발전시켜 달란 미션이 아니라 그동안 제가 가지고 있던 채널을 통해 폴앤크루의 해외 시장 판로를 뚫어 달란 미션이었습니다. 만약 브랜드 콘셉트를 정립하고 발전시켜 달란 미션이 있었다면 거절을 했을 겁니다. 제 전공 분야가 아니니까요. 하지만 처음 홍성의 프러포즈를 받았을 땐 해외 채널 뚫어 놓는 거 정도야 충분히 힘들이지 않고 제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겠단 확신이 있었고 그랬기에 흔쾌히 그 프러포즈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공은태 부장님의 제안을 받는 순간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

“아니, 이미 완벽한 플랜이 다 짜져 있는데, 왜 나란 사람을 영입했을까? 그래서 아직도 전 헷갈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냥 받은 미션대로만 하자니, 공은태 부장님으로부터 받은 저 플랜은 이미 충분히 완벽하고 또 제가 진행 중인 해외 컨트롤 기업과의 접촉보다 훨씬 더 폴앤크루라는 브랜드 콘셉트에 부합하는 거 같아서요.”

“그럼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질문을 받은 알렌 강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저는 못 하죠.”

“…!”

웅성거림이 극에 달했다.

여기저기에선 ‘저거 미친놈 아냐?’ ‘제정신이 아니네.’ ‘저걸 지금 말이라고 해?’ 하는 등의 격한 반응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마케팅은 제 전공이 아니니까. 그리고 계약 당시 오고 갔던 내용 중에는 없던 내용이니까. 저는 분명 폴앤크루 대표이사 자리를 제안받을 당시 상무님께 정확히 말씀드렸습니다. 1년이라는 계약 기간. 그 기간 안에 제가 폴앤크루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소름이 돋았다.

어떻게 저런 말을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할 수 있는 걸까?

대표라고 하면 그 모든 걸 다 총괄하고 책임을 지는 자리 아닌가?

애초 대표라는 타이틀엔 그 모든 내용들이 다 포함이 되었을 텐데, 그걸 저렇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자기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니까 저렇게 당당한 게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저렇게 당당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할 정도로 헷갈렸다.

과연 유럽 마인드다웠다.

그 헷갈림은 나만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모두가 알렌 강의 입장에 입만 반쯤 벌린 채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니,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뭡니까?”

“제가 처음 받은 미션대로만 진행을 하면 되는 건지 그걸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걸 알아야 두려움 없이 제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아서요.”

“….”

“폴앤크루로의 이직. 제 이력에선 아주 중요한 터닝 포인트입니다. 저로 인해 브랜드가 망가졌다는 평가가 나오게 만들 수가 없습니다.”

“…!”

“그리고 지금 저는 처음 홍성이 제게 제안했던 미션보다는 공은태 부장님이 제게 제안하신 이 프로젝트가 훨씬 더 폴앤크루의 가치를 올려줄 거란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설마 이 발표를 보시고도 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

“….”

“고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쯤 되면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제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양심입니다. 해외 채널만 뚫어 주면 된다. 그것만 해 주면 나머지 필요한 부분은 요청만 하면 홍성 본사가 다 해주겠다…. 분명 그렇게 절 설득하셨죠, 상무님.”

모두가 경악을 하며 상무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합의했던 내용대로 해외 채널은 제가 책임지고 뚫겠습니다. 대신… 상무님도 처음 약속하셨던 대로 제 이력에 흠이 날 상황은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게 걱정이 되는 거고, 그 걱정이 현실이 되기 전에 제 입장을 꼭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아서 이런 자리를 부탁드렸던 겁니다. 이상입니다.”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감히 어느 누구도 전무님이 계신 자리에서 저렇게 일방적인 발표를 할 수 있을 거란 상상을 못 했으니까.

분명 알렌 강이 마지막에 상무님을 저격하며 날린 말은 홍성을 상대로 던진 경고였다.

모두가 얼어 있는 가운데 알렌 강은 너무나 태연하게 자신이 사용했던 발표 도구들을 정리했고, 손수 벽에 달린 버튼으로 회의실의 조명을 밝혔다.

전무님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상무님은 한참 동안 알렌 강을 노려보다가 전무님을 뒤따랐다.

그리고 웅성거림은 본격적으로 높아졌다.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가며 탄식 아닌 탄식을 흘렸고, 또 어느 누군가는 알렌 강의 되바라진 발표에 혀를 차기도 했다.

난 장 본부장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알렌 강을 쳐다봤다.

그리고 알렌 강은 본체에서 유에스비를 뽑아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폴앤크루에서 제 역할은 없는 거 같습니다.”

“돌아가겠단 뜻입니까?”

“돌아갈 곳이 없죠, 지금 당장은.”

“…?”

“디테일은 본사 상무님이랑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거 같습니다. 계속 처음처럼 진행을 하라고 하시면 그냥 하면 되는 거고, 방향을 공 부장님 제안대로 틀어 달라고 하시면 전 클레임을 걸 수밖에요.”

“…!”

“근데 아마 전무님 표정이나 다른 임원분들 분위기를 보아하니 제 방향이 아닌 공 부장님 제안을 선택하실 거 같네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요.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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