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고맙습니다
난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분명 전무님은 내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셨을 거다.
그럼에도 한참 동안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계셨고, 잠시 뒤 몸을 돌리셨을 땐 예상외로 편안한 표정으로 날 마주해 주셨다.
“일찍 왔네? 난 좀 걸릴 줄 알았는데….”
“네?”
“폴앤크루 강 대표 만나러 갔었다면서?”
“…네.”
“그래서 난 당연히 같이 점심이라도 하고 올 줄 알았지.”
회사가 발칵 뒤집어졌다던 박 이사의 말이 그냥 한 소린 아니었던 모양이다.
전무님이 나의 외근 목적지까지 알고 계실 정도라면 회사 차원에서 이번 사안을 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단 뜻이었다.
이상하게 주눅이 드는 상대.
비록 편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계셨지만, 난 이상하게 전무님 앞에서 주눅이 들어가고 있었다.
“앉지.”
“…네.”
전무님은 한참 동안 웃는 얼굴로 날 빤히 쳐다보셨다.
손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르겠고, 시선 처리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날 바라보는 전무님의 시선은 부담스러웠다.
“오늘은 하루가 참 길겠다. 시작부터 진을 뺐더니 벌써 지치는 기분이네.”
“….”
“이런 날이 있지. 이런 날도 있고 또 언제 하루가 다 갔나 싶을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시간이 가 주는 날도 있고… 뭐 다 그런 거지.”
“….”
“그….”
전무님은 뭔가 말을 하시려다 말고 입술을 오물거리셨다.
전무님 역시도 지금 이 자리가 썩 그리 편한 자리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말머리를 계속 빙빙 돌리기만 할 뿐이었다.
“민규는 잘하나?”
“아직은 뭐라 평가를 내리기가 힘듭니다.”
“하긴 뭐, 일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
“민규한테 그랬다면서? 주위에 실력 있는 사람들을 붙여 주기보단 그냥 민규 자체로 뛰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네,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참, 그게 말처럼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 그지?”
“…그렇죠.”
“그게 참 힘든 거야. 말처럼 쉽지가 않아. 근데… 쉽지 않더라도 그렇게 만드는 게 맞는 거고.”
“….”
“오늘 참 생각이 많아지네, 공 부장 때문에. 내가 전 상무를 그렇게 가르쳤어야 했는데, 그럴 필요를 못 느꼈었고, 그게 지금 이런 결과를 만들어냈네, 그지?”
“아닙니다.”
난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미 상무님은 상무님만의 생각이 잡히신 분이고 전 다만… 그걸 따라갈 자신이 없을 뿐입니다.”
“소통이 안 된다는 말을 왜 그렇게 돌려서 하나?”
“…!”
그 순간 전무님 방의 문이 열렸다.
“전무님, 혹시 뭐 차라도 준비를 해드릴까요?”
“차? 음… 일단 공 부장 왔으니까 운영본부장 올라오라고 해. 운영본부장 올라오면 그때 같이 넣어줘.”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간 뒤 다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고, 그 침묵을 깨뜨리며 전무님이 입을 여셨다.
“그게 전부 아냐, 결국은. 소통. 그게 안 됐단 말이잖아.”
“…그랬던 거 같습니다.”
“근데 그게 공 부장 자네하고만 안 됐던 거라면 내가 공 부장을 이렇게 부를 이유가 없지. 전 상무 말을 믿어야 하니까. 그런데 운영본부장도 못 하겠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어 버렸고…. 그럼 문제가 있단 말인 거지. 거기다 이 사달이 나기 전까지 내가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어볼 때마다 다 잘되어 가고 있다는 보고만 받았는데, 결국은 아닌 거잖아. 그럼 전 상무는 나랑도 제대로 된 소통을 못 하고 있었단 소리 아니겠냐고.”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난 그저 합죽이처럼 입술을 숨겨놓고 전무님의 시선을 피해 눈을 테이블 위로 떨어뜨렸다.
“내가 너무 무섭게만 대했던 건가 싶기도 하고… 그러네. 내 머리가 지금 간만에 무척 복잡해졌어.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안 잡힌단 말이야.”
“….”
“언제부턴가 나한테 살살 거짓말을 해, 전 상무 이 친구가 말이지. 상무보 자리 앉힌 이후부터 내가 압박을 많이 했지, 내가 생각을 해 봐도. 그랬더니 안 그러던 친구가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내가 주는 압박이 무서워서였는지 슬슬 안 해도 되는 거짓말이 늘더란 말이야.”
“….”
“혼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잔소리 듣기 싫어서 쉽게 쉽게 넘어가겠다는 것도 있었을 거고. 그러니 제대로 된 보고가 올라올 턱이 있나.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물어보면 다 잘되고 있다는 대답만 들려오고, 또 그동안 폴앤크루 결과물만 놓고 보면 나나 사장님 입장에선 전 상무 말을 믿을 수밖에.”
“…네.”
“근데….”
“….”
“더는 못 믿겠어, 내가.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들 불러놓고 이런 거 물어보는 거 자체가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아는데, 알아도 좀 물어봐야겠어. 일 잘하는 인재 한두 명 놓치는 거로 끝이 아닐 거 같단 생각이 든단 말이지. 이대로 가만히 믿고 놔뒀다간 회사 전체가 흔들리겠어.”
때마침 장 본부장이 방으로 들어왔고, 문 앞에서 허리를 숙이는 장 본부장에게 전무님은 가벼운 손짓으로 자리에 와서 앉으라고 하셨다.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 원 톱, 투 톱 달리는 친구들이 작정이라도 한 듯 동시에 나가겠다고 했을 땐 뭔가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내가 두 사람을 모르는 게 아니잖아. 다른 친구들처럼 몸값 좀 올려 보겠다고 작전을 펼칠 위인들도 아니고, 그렇다고 회사 엿 먹어 보라는 심보로 회사가 가장 두 사람을 필요로 할 때 일부러 이런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거라 믿고 싶어.”
“….”
“업무 인수인계… 그것만 제대로 해주고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기엔 현재 필드에서 뛰고 있는 두 사람의 영향력은 너무 크지? 말 그대로 홍성의 원투 펀치 아닌가. 여기까지 온 마당에 의리 지킬 필요 뭐 있어? 남아서 계속 회사에 나와야 하는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줘. 나도 뭘 알아야 두 사람 나가고 난 뒤 어떻게 필드 재정비를 할지 고민이라는 걸 해볼 수 있을 거 아냐.”
“제가 전사 운영본부장으로서 제 역할을 제대로 못 해낸 거…. 그게 아마 가장 큰 문제였던 거 같습니다.”
강 대표가 영입되는 과정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이 갈등이 번지기까지의 모든 상황을 장 본부장이 설명했다.
전무님은 소파에 적당히 몸을 묻고 말없이 들어만 주셨고, 난 무릎 위로 두 팔꿈치를 올린 채, 깍지를 끼고 바닥만 쳐다봤다.
장 본부장의 말이 끝난 뒤에도 전무님은 침울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전혀 다르네, 그동안 내가 받아왔던 보고랑은.”
“….”
“아예 뭐 시작부터 불통이었단 말이네, 강 대표 영입 건에 한해서는. 두 사람의 동의는 없었다?”
“…네.”
“거기다 폴앤크루 해외 마진에 대해선 장 본부장 자네가 안 된다고 말렸는데도 저렇게 진행을 하고 있는 거고?”
“….”
“눈앞이 노랗다는 게 이런 기분이겠지?”
“….”
“어느 정도여야 그래도 내가 두 사람한테 조금만 더 같이 해보자는 말이라도 해 볼 거 아니냐고. 하아… 참….”
전무님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무님은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입을 여셨다.
“알았어. 일단 알았으니까 나가들 봐.”
그 순간 난 이걸로 정말 홍성과의 연은 완전하게 끊어졌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무님 방을 나가는 순간만큼은 모든 게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장 본부장의 표정 역시 무조건 무겁지만은 않았다.
전무님 방을 나와서 엘리베이터 복도 쪽으로 향할 때였다.
데스크 안에 있던 비서 한 명이 전무님의 호출을 받는 거 같았다.
“네, 전무님. 상무님이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연결해서 호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장 본부장은 비서 데스크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을 끝으로 마치 내부 고발자가 된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의 눈빛을 피한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영업부 사무실로 돌아온 난 자리에 앉아서 곧바로 사직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눈으로 직접 본 건 아니었지만, 내 자리로 오려고 하는 안 차장을 양 차장이 말리는 모습이 마치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영업 기획부 사무실 전체의 무거워진 공기를 모두 다 떠안은 채 난 사직서를 완성했고, 출력 버튼을 눌렀다.
고요한 사무실 안에 복합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복합기 앞으로 갔다.
그 근처에 있던 박기태가 복합기에서 나의 사직서를 꺼내 내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
박기태는 내 시선을 피했다.
난 그저 피식하고 웃는 얼굴로 박기태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인 뒤 미리 준비해 놓은 봉투 속으로 사직서를 접어놓고 박 이사를 만나러 갔다.
양 차장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
하지만 난 양 차장, 안 차장의 한숨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복도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사직서가 든 봉투를 재킷 안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난 문이 열린 뒤에도 잠시 주춤했고, 결국 무거운 발을 떼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였다.
박기태가 갑자기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나 지금 올라가는데….”
“저도 올라갑니다.”
박기태는 내가 누르려고 했던 임원 층을 눌러놓고 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부장님.”
“…네.”
“몇 년 전 만토바에서 제가 드렸던 사직서를 저한테 다시 돌려주시며 그렇게 말씀하셨죠?”
“…!”
“만약 부장님이 회사를 나가겠다고 했을 때 아무도 안 잡아주면 상당히 서운할 거 같다고… 그래서 한 번은 잡아주겠다고….”
“….”
“물론 제가 아니라도 부장님은 대단하신 분이니까… 부장님 나간다고 하시면 따라 나가겠다고 할 사람들도 많을 정도로 우리 영업부에선 절대적인 분이시니까… 그래서 절대 그런 일로 서운하실 일은 없으시겠지만…!”
난 박기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홍성에서 일하는 동안 정말 이건 참 잘했다… 하는 게 몇 가지가 있어요.”
“….”
“물론 그게 가장 잘한 일이었다는 말은 못 해도… 그때 기태 씨를 잡은 건 내가 홍성 생활 하는 동안 참 잘한 일이었다고 꼽는 몇 가지 중에 들어가.”
“….”
“고맙습니다, 나 서운하지 않게 만들어 줘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럼에도 박기태는 내릴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난 그런 박기태를 엘리베이터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나와 장 본부장의 퇴사 신청으로 회사가 술렁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또 회사가 그걸 알아준다는 부분에서는 나름 감사하기까지 했다.
다시 고려를 해 보라는 삼차장의 권유도 물론 있었고, 내가 낸 사직서를 당분간은 킵해 놓겠다는 박 이사의 고집도 있었지만, 난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으로 매너 있는 마무리를 준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이사로부터 뜬금없는 호출이 들어왔다.
-공 부장, 30분 뒤에 대회의실로.
“네?”
-30분 뒤에 대회의실로 오라고.
“대회의실요?”
대회의실.
말 그대로 임원 회의나 최소 상무, 전무님 주최하에 이뤄지는 중요 회의가 열리는 장소.
영업부장 타이틀이 있으니 그곳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을 하는 게 영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퇴사를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회사가 그런 나에게 중요 회의에 참석을 허락한다는 것 자체가 의아했다.
-폴앤크루 건으로 강 대표가 직접 왔어.
“그런데요?”
-공 부장이랑 장 본부장도 함께 참석을 해야 하는 자리라고 하더라고. 아무튼 전무님 호출이니까 시간 맞춰서 올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