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오죽했음 그랬을까…
“악수… 거칠 것 없이 승승장구만 하고 있던 지금의 홍성이 절대 두지 말았어야 하는 악수를 본사 상무님이 두셨고, 그래서 제가 지금… 그 악수가 되어버린 거네요, 한마디로.”
알렌 강은 혼잣말을 하듯, 내가 아닌 엉뚱한 곳을 주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난 이상하게 그의 말에 막힌 가슴이 뻥 하고 뚫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악수다… 내가 지금 악수라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허, 허허허….”
알렌 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나 역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해외 시장 개척의 히어로를 시켜주겠다고 해서 왔던 건데…. 정작 홍성에서 제 역할은 빌런이었다… 뭐 그런 건가요, 지금?”
“…?”
그것 역시 나에게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분명 자신에게 묻고 또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찾기 위해 생각이 많아지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알렌 강은 날 쳐다보며 물었다.
“처음부터 이런 방향으로 폴앤크루를 끌고 갈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저는 필요가 없는 존재 아니었습니까? 해외 시장 공략 플랜까지 이미 다 짜져 있는 상태였단 말인 거잖아요, 결론적으로.”
“그걸 저한테 물어보시면 안 되죠. 전 그냥 아이디어만 만들어 놨을 뿐입니다. 그걸 채택하고 안 하고는 회사의 재량인 거지, 저의 재량은 아니었습니다.”
“하긴… 그걸 퇴사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신 공 부장님께 물어볼 말은 아니네요. 그런데… 그런데 전 갑자기 왜 이렇게 기분이 싸… 할까요?”
“싸하다니요?”
“본사 상무님이 저한테 전화를 하셔 가지고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공 부장님이랑 운영본부장님이 퇴사를 하겠다는 뜻을 밝히셨다길래 사실 전 속으로 두 분이 너무 강성이네… 하고 오해를 했습니다. 두 분 모두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분들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입장에선.”
“누구요? 저랑 장 본부장님이요?”
“네. 더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두 분의 행동이 너무 유치하다, 뭐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되어서 퇴사라는 카드로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다는 오해를 했습니다.”
웃음이 나왔다.
나와 장 본부장의 결심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고, 그걸 또 알렌 강의 입을 통해 직접 들으니 아무리 단 사탕을 입에 넣어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입맛이 써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가 본사 상무님께 그랬습니다. 너 참 바보다… 그걸 왜 고민하냐, 고민거리나 되느냐, 그게? 그냥 그러라고 해라… 웃기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끌려다닐 걸 끌려다니라고….”
“…!”
“뭐 얼마나 대단한 능력들을 가졌길래, 그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회사를 나갈 수도 있다는 거로 회사를 상대로 협박을 하느냐고.”
웃음이 나왔다.
분명 처음에 내게도 대안이라는 게 있다며, 계속 이런 식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면 언제든 홍성을 나갈 수도 있다고 말했던 건 협박이 맞다.
맞는데… 그걸 알렌 강의 입을 통해 들으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공 부장님이나 운영본부장님이 그동안 홍성에서 어떤 업적들을 만들어 내셨는지 정도는 이미 본사 상무님을 통해 충분히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본사 상무님을 통해 들었을 땐 두 분의 능력이 특별하다 정도였지, 대체 불가능하다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이래서 한쪽 말만 들으면 안 되는 거네요.”
“….”
“제가 본사 상무님한테 그랬죠, 한 번 받아 주고 두 번 받아 주면 끝이 없다. 능력 좋은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넘쳐난다고… 그래서 나가겠다고 하면 잡지 말고 그냥 보내라고 했는데… 결국 저는 자세한 내막도 모르면서 빌런이 빌런 짓을 한 꼴이 되어 버렸고… 어이없네요, 정말. 아… 씨… 이래서 아는 사람이랑은 같이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계약 관계만 아니고 원래 형 동생 하던 사이였음 당장에라도 한 소리 하고 싶을 정도로 사람을… 바보로 만드네요, 본사 상무가.”
“그렇게 심각하실 이유 없습니다. 심플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미 저나 본부장님은 마음의 정리가 다 끝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나가기 전에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 정도 책임은 있다고 생각해서 폴앤크루의 진짜 가능성을 강 대표님이 알아줬음 하는 마음에 이렇게 찾아온 거지, 그걸 가지고 상무님과 강 대표님 사이를 이간질하겠다? 뭐 그런 의도는 절대 없었습니다.”
알렌 강은 두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 누른 뒤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 관자놀이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결과적으로 제가 본사 상무라는 매개를 통해서 운영본부장님, 공 부장님과 회사 사이를 이간질시킨 거 같아서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겁니다, 제 말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 부분은. 우린 그냥… 우리가 할 일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얼마만큼 믿음을 더 줬냐, 덜 줬냐… 그 차이뿐이지, 이제 와서 왜 이렇게 됐냐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에너지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되네요.”
“갑자기 회사가 작다고 느껴지셨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냥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공 부장님이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건 아닐까… 하는. 제가 그랬거든요, 이전 회사에서. 밖에서는 대형 브랜드 소리를 듣지만 정작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 입장에선 내부 시스템이나 제가 끌고 가야 하는 맨파워들의 상태가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는 생각을 줄곧 해 왔습니다. 그러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전 회사에 대한 염증이 생겨 버렸고 본사 상무의 제안에 흔들리기 시작했던 거죠. 그런데… 막상 이렇게 홍성으로 옮겨 보니까… 여긴 더하네요. 근데 이게 진짜 홍성은 아니겠죠?”
“…?”
“제가 지금 본사 상무의 갈팡질팡하는 모습만 보고 이게 홍성의 진짜 모습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겠죠? 제발 그랬음 좋겠네요. 그게 아닌 거라면 본사 상무가 던진 제안들만 보고 혹해서 한국으로 넘어온 절… 정말 용서하기 힘들 거 같네요.”
“그건 뭐… 각자의 판단인 거겠죠.”
“혹시… 접촉 중인 회사가 있으십니까?”
“…?”
“뭐 물론 공 부장님이나 운영본부장님 정도 되시면 홍성을 나가시는 순간 FA에 들어가는 거라고 봐도 되는 거겠지만… 그냥 궁금해서요.”
“얼마 전까지 서로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아프게 상대를 물어뜯을까… 그거 고민하던 사이 아니었습니까?”
내가 장난스레 묻자 알렌 강도 함께 피식하며 미소를 흘렸다.
“그런 것까지 서로 오픈할 사이는 아닌 거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거….”
알렌 강은 내가 전달했던 서류를 눈짓하며 말했다.
“저로서는 지금 당장 어떻게 하겠다… 뭐라고 대답을 드리기가 참 힘듭니다. 저는 폴앤크루의 해외 시장 채널 확보가 메인 업무인 사람입니다. 그걸 해달라고 제안을 했었고, 그것만 하면 된다고 해서 폴앤크루 대표이사 자리를 받았던 겁니다. 디자이너 브랜드 본사에서만 이력을 쌓아왔던 제가 이렇게 기획 브랜드의 마케팅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을까가 일차적인 걱정이고, 또 자신 없는 걸 무모하게 강행할 정도의 배짱이 제게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은 해보겠습니다. 제가 덤벼도 될 만한 건지, 아닌지….”
“알겠습니다. 그럼….”
난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무실을 나서기 전 사 들고 온 화분을 눈짓하며 알렌 강에게 말했다.
“이거… 제 사비로 산 겁니다.”
“…?”
“영업부 운영비로 살까 하다가… 그냥 회사 차원이 아닌 제 개인적으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다는 걸 보여드리려고 제 사비로 산 겁니다.”
“감사합니다.”
회사로 복귀를 했을 때였다.
사무실 안의 공기는 무척이나 텁텁했다.
알 수 있었다.
내가 던진 퇴사라는 결정이 사무실 전체 공기를 텁텁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걸.
안 차장이 서둘러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퇴사라니요. 아니죠? 헛소문이죠?”
“….”
“제가 모르는 정보가 어딨습니까, 홍성에. 전 처음 듣는 소린데, 이거 루머죠?”
모두의 침묵 섞인 시선이 나와 안 차장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난 그 침묵에 나의 침묵을 포함시켰다.
“아, 왜 대답을 안 해주십니까!”
“안 차장.”
그리고 어느새 나와 안 차장의 곁으로 다가온 양 차장이 안 차장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한 시간 전쯤에 이사님 다녀가셨습니다.”
“이사님이요?”
“네. 부장님 찾으시길래 폴앤크루 강 대표 만나러 갔다고… 연락을 해 볼까요 했더니 그냥 사무실 복귀하면 바로 이사님 방으로 올려보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네, 알겠습니다.”
양 차장은 할 말이 많은 눈치였다.
안 차장은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많은 섭섭함이 묻어 있는 눈으로,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을 누구보다 바로 옆에서 다 지켜봤기에 섭섭한 만큼 이해도 된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올라간 임원 층.
상무님 방의 통유리 벽 안쪽으로는 이미 블라인드가 다 내려져 있었다.
그 앞을 지나 박 이사의 방을 찾았다.
날 보는 순간 박 이사는 한숨부터 터뜨리셨다.
그리고 내게 자리에 앉으라며 소파 자리를 손짓한 후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무슨 소리야, 이게?”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등짝을 한 대 때려줄까 했다.”
“….”
“괘씸해서 말이야.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이런 사안을 공 부장 너한테 직접 듣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 듣는다는 게 말이 돼?”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생각이 들더라. 오죽했으면.”
“…!”
“오죽했음 그랬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울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직한 거로는 홍성 원투 펀치 날리는 장 본부장이랑 공 부장이 오죽했음 동시에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생각이 드니까 내가 그동안 너무 이 별것도 아닌 이사 자리 지키자고 내 새끼들 못 지킨 건 아니었나… 그래서 미안해지더라.”
“….”
“그 정도로 힘들었냐?”
“….”
“알았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자. 일단 전무님 방에 올라가라. 아까부터 찾으셨다.”
“…전무님이요?”
“지금 회사 발칵 뒤집혔다. 홍성 원투 펀치가 동시에 나가겠다고 하는데 비상 안 걸리면 그게 이상한 거지. 올라가 봐. 기다리고 계신다.”
“…네.”
“저녁에 시간 비워 놔라.”
“….”
“한잔해야지.”
“알겠습니다.”
“우린…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
“…네.”
그렇게 난 다시 박 이사 방을 나서서 엘리베이터 복도로 향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복도로 가는 도중 다시 한번 블라인드가 다 내려가 있는 상무님 방 쪽을 한참 동안 쳐다봤다.
“….”
전무님의 사무실 입구.
그 앞을 지키고 있던 비서진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환한 미소로 날 맞이해 주었다.
“전무님이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유난히 상쾌한 음성이었다.
전무님 방으로 내선 전화를 넣은 비서가 그 문을 눈짓하며 지금 들어가면 된다고 말했다.
똑. 똑….
짧은 노크.
그리고 조심히 문을 열었다.
전무님은 전체 창 쪽으로 몸을 돌리고 서서 그 밖을 쳐다보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