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
변명으로밖에 안 들립니다
“그럼 제가 그걸 본부장님한테 드리지 누구한테 주겠습니까? 상무님한테 주라고요? 허… 싫습니다. 죽 쒀서 개 주는 거? 그냥 버리면 버렸지 그런 짓은 못 하겠습니다.”
-….
“폴앤크루… 누가 뭐래도 본부장님이 시작한 프로젝트입니다. 아무리 상무님 이름으로 진행됐고, 또 중간에 제가 프로젝트 총괄을 받아 지금까지 이끌어 왔지만… 폴앤크루는 누가 뭐래도 본부장님의 프로젝트고 또 본부장님의 브랜드입니다.”
-공 부장….
“처음 저한테 일 가르치실 때 그러셨죠. 아무리 해도 답이 안 나와서 어쩔 수 없이 회사 차원에서 버리라는 지시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프로젝트 처음 시작한 사람이 끝을 내야 하는 거라고.”
-….
“본부장님이 끝을 내십시오. 본부장님 손으로 폴앤크루 운명을 결정지어 놓고… 그러고 나서 마이웨이를 하든 뭘 하든 하십시오.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저거 저대로 가만히 놔두면 폴앤크루… 미래 없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어떻게 합니까? 진행합니까, 아님 접습니까?”
-그냥… 상무님한테 드려.
“싫다니까요.”
-공 부장.
“제 입장도 생각해 주세요. 어차피 상무님한테 드리면 그걸 또 강 대표한테 전달하란 소리가 나올 건데, 귀찮게 왜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일을 두 번씩 해야 합니까? 그리고 이건 상무님을 설득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강 대표 말에 이리저리 계속 끌려만 가고 있는 상무님을 상대로 설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어차피 한다고 해도 강 대표가 맡아서 할 일 아냐.
“다르죠. 본부장님이 이거 한번 진행해 보자고 오케이 사인을 안 주시면 저 이거 버립니다.”
-…!
“말씀드렸잖아요. 미련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죽 쒀서 개 주는 일 같은 건 앞으로 두 번 다시 안 합니다. 저… 남 좋은 일이나 하자고 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죽기 살기로 올라온 거 아닙니다. 홍성이라는 판 전체를 내 맘대로 뒤흔들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그 판 속에서 최소한 내 소신만큼은 내 목소리로 확실하게 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지금까지 그렇게 직장 생활 하겠다고 반칙 안 하고 버텨 왔던 거 아닙니까?”
-….
“본부장님도 지금… 그게 안 되니까, 아무리 해도 지금 이 구조 속에선 그걸 못 하니까… 그래서 나가겠다고 하시는 거 아니냐고요.”
* * *
전날 울산 식육점.
장 본부장의 사직서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은 상무님은 내게 장 본부장을 잡을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런 상무님께 내가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까지 폴앤크루 건으로 상무님이 저나 저희 영업부, 그리고 본부장님한테 보여주신 행보들은 그냥… 이해가 안 된다? 혹은 너무 성급하고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하고 있다… 정도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정도는 저희 같은 월급쟁이들 입장에선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는 겁니다.”
“….”
“너무 흔한 직장 생활의 일부분이니까요. 회사의 불합리, 비효율… 그런 내용들은 이미 익숙합니다. 우린 업무와 싸우는 게 아니라 그런 회사의 불합리, 비효율과 싸우며… 아니 견디며 그걸 견딘 대가로 월급을 받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회사는 얼마나 그런 불합리, 비효율을 회사의 입장에 서서 잡음 없이 합리화를 잘 시켜줄 수 있느냐로 승진 여부를 판가름하죠.”
두려울 게 없었다.
장 본부장의 사직서를 보는 순간 나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직장 생활을 하며 받은 한계, 그리고 절대 고쳐질 수 없는 조직의 생리에 대해 그게 의미가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상무님께 모두 쏟아냈다.
“물론 조금은 다를 줄 알았던 상무님이 그런 행보를 걷기 시작해서 우리 모두가 당황을 했고, 또 실망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강 대표를 영입해서 상무님이 보이고 계시는 모습은 어쩌면 다른 회사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그래서 폴앤크루 건에 관한 내용은 그냥 그럴 수도 있다… 정도로 우리 모두가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상무님이 저한테 장 본부장님을 좀 잡아 달라고 말씀을 하시는 건 잔인한 겁니다.”
난 상무님의 흔들리는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 평상복을 입고 나온 게 부럽다고 말씀하셨습니까? 퇴근 후에 저희 같은 월급쟁이들은 무거운 회사 업무 다 벗어던지고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지만, 상무님은 퇴근 후에도 그 전 내 나는 정장을 계속 입고 있으면서 회사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는 뜻을 그렇게 돌려 말씀하신 거라고 받아드려도 되겠습니까?”
상무님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분명 다릅니다. 제가 출근할 때 입는 정장과 상무님이 지금 입고 계신 정장은. 저 같은 월급쟁이들의 정장 안주머니 속엔… 상무님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무게가 실려 있는 사직서 한 장씩이 다들 저마다 다른 형태로 들어가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무거운 사직서 한 장씩은 다 각자의 마음속에 품고 출근을 하는 겁니다. 마음은 간절하죠. 하지만 그걸 진짜로 꺼내기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많은 고민과 계산, 그리고 용기가 필요합니다.”
“….”
“하물며 본부장님처럼 십수 년을 홍성이라는 한 회사에만 충성을 다해 온 사람이라면 그 고민과 계산, 그리고 용기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렇게 본부장님이 용기를 낼 수밖에 없도록 사람을 궁지로 몰아놓고 지금 저한테 그런 장 본부장님의 용기를 덮을 수 있는 방법을 물어보시는 겁니까? 그건 정말… 저한테는 잔인하신 거고, 본부장님에겐 폭력적인 겁니다.”
“나는 사실….”
상무님은 자신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최소한 두 사람은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 역시 상무님이 자신의 잔만 채우고 내려놓은 술병을 들어 나의 잔을 채웠다.
“최소한 본부장님이랑 공 부장은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 방향이 나와 같을 거라 생각했어요.”
“보통….”
상무님의 자기 합리화가 시작되려고 할 때였다.
난 그의 말을 자르며 좀 더 솔직해지자고 말했다.
“말 앞에 사실, 솔직히, 톡 까놓고… 이런 말들이 먼저 붙으면 사실, 솔직히, 톡 까놓고… 가 아닌 경우가 많더라고요. 저나 본부장님이 상무님의 사람이고 그래서 회사를 생각하는 마음, 방향이 상무님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게 아니죠. 당연히 저나 본부장님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게 더 정확한 표현 아닙니까?”
“잘났다, 진짜.”
날 싸늘하게 노려보는 상무님.
하지만 난 오히려 그런 상무님의 솔직한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이렇게 잘난 사람이 어떻게 나 같은 놈 밑에 있었데?”
“그래서 조금 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나 장 본부장님은 그걸 버텨야 하는 각자의 사정들이 담긴 정장을 입고 매일같이 출근을 한다고. 회사가 주는 압박감… 상무님이 저희보다 더 무겁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신입 사원, 아니 인턴사원을 불러놓고 물어보세요. 그 무게가 가벼운지. 다 무겁습니다. 안 무거운 사람 없습니다.”
“회사가 먼저 커야 할 거 아니냐고오오오오….”
상무님은 답답해 죽을 거 같다는 듯 온몸을 흔들며 내게 짜증을 부렸다.
“회사가 커야 지금 공 부장이 말한 그런 불합리, 비효율… 이런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 아니냐고.”
“흐음….”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아니,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린 상대.
난 그저 술잔을 비우며 듣기만 했다.
“폴앤크루만 붙잡고 있을 순 없는 거잖아요. 강 대표? 다들 못마땅하게 생각하겠지만 난 기회라고 생각했어. 연봉 2억 2천이 많다고? 강 대표한테 연봉 2억 2천이 많다고 말한 사람들 내 앞에 데리고 와 봐요. 내가 똑같이 그 돈 줄 테니까 강 대표가 할 수 있는 해외 유통 채널을 강 대표만큼 쉽고 효과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만큼 뚫어낼 수 있을지 내 눈으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으니까.”
버너에 불을 켜 불판을 달구며 난 상무님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줬다.
“해외 컨트롤 업체들을 상대로 포기하는 폴앤크루 마진 몇 퍼센트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작가 컬렉션 물량 늘려서 그 가치를 조금 떨어뜨리는 걸 큰 문제 삼을 때가 아니라니까? 어떻게든 강 대표 있을 때 해외 쪽으로 많은 유통 채널 확보해 놓고, 우린 그 유통 채널을 가지고 다른 브랜드들 만들어서 사업을 확장해 나가야지. 폴앤크루가 끝이 아니라고요. 폴앤크루는 그냥 시작이야, 시작. 앞으로 다른 브랜드도 계속 만들자며, 폴앤크루는 홍성이 컨트롤 기업에서 패션 종합 기업이 되는 발판이 될 거라고 본부장님이랑 공 부장이 날 설득하지 않았었나?”
“했었죠. 분명 제가 그렇게 처음 폴앤크루 시작할 때 상무님을 설득했었죠.”
“우리가 직접 하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겠어요? 우리가 직접 해외 컨트롤 기업 찾아다니며 채널 뚫으려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고 또 리스크가 생기겠냐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그렇게 뛰어들면 그 순간 모험이 되는 거잖아요. 모험을 할 필요가 있어요? 강 대표만 데리고 오면 되는 건데, 강 대표가 가지고 있는 소스들을 어떻게 단순히 강 대표 연봉 2억 2천으로만 계산할 수 있느냐고. 강 대표 뛰어난 사람이에요.”
“….”
“그동안 강 대표 본사에서 폴앤크루 분리경영 작업 하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같아 보였죠? 시간은 충분한데 자기 손으로 직접 맨파워도 안 꾸리고… 이것저것 다 본사가 대신 챙겨 주는 거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런데 아니야. 그동안 강 대표 쁘띠토널 해외 채널 확보하고 있었어요.”
그건 좀 의외였다.
물론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지만.
“나도 그 사람의 실력을 봐야지. 얼마나 효과적으로 해외 채널을 뚫을 수 있을지 그 실력을 먼저 봐야 할 거 아니냐고. 쁘띠토널… 사실 만토바 없으면 해외 시장 공략 불가능한 거 아닌가? 그걸 하나씩, 하나씩 뚫어주더라니까?”
“상무님.”
“….”
“감히 한 말씀 드리자면… 제 귀엔 변명으로밖에 안 들립니다.”
“…!”
“분명 우리가 직접 했으면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하면 강 대표가 할 때에 비해 할 필요가 없는 실수, 잡음들이 더 많이 생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포인트는 강 대표의 영입 자체가 아니죠. 포인트는 강 대표가 온 이후로 상무님이 변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저나 본부장님이 흔들릴 정도로, 상무님은 그동안 저희에게 여러 가지 방향에서 희망이라는 걸 보여주셨습니다.”
“….”
“뭐든 함께하려고 하는 리더. 조금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부족한 부분은 직원들을 아끼시는 마음으로 충분히 커버해 내시는 모습, 거기다… 부족하시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상무님 뒤에서 부족한 부분을 챙겨 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알아서 우러나오게 만드셨죠. 만약….”
“….”
“처음부터 그런 연기를 저희 앞에서 하지 않으셨다면… 그냥 다른 임원들처럼 일반적인 임원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주셨다면…. 저희는 상무님께 이 정도로까지 큰 실망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연기… 연기라….”
“그 연기가 저희에게 희망을 줬고, 또 지금은 더 큰 실망을 안겨 주고 있는 겁니다.”
“….”
“강 대표.”
난 술잔을 반쯤 비워 놓고 말했다.
“폴앤크루 때문에 온 사람 아닙니까?”
“….”
“그럼 그 실력 좋은 사람 헷갈리게 만들지 말고 폴앤크루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게 만드시는 게 좋을 겁니다. 폴앤크루는 이미 그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파급력이 있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는 브랜드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마 지금 상무님뿐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는 뭐 어떻게 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그냥 말로 전달합니다. 일단 이거 잘 가지고 계시고요, 이 안에 제 이름도 같이 들어 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난 상무님이 테이블 위로 올려놓은 장 본부장의 사직서를 다시 그에게 돌려주었다.
상무님의 두 눈은 초점을 잃었다.
“본부장님을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선 안 될 거 같습니다. 다만… 저희가 출발시킨 폴앤크루는 저희 방향으로 마무리 지어 놓고 나가겠습니다.”
“…!”
“그렇게 하지 말라 하시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요.”
* * *
폴앤크루의 새로운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앞.
알렌 강은 홍성 본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건물 한 층을 통째 임대해서 폴앤크루의 본진을 꾸렸다.
그리고 난 작은 화분 하나를 구입해서 그 건물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