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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42화 (242/325)

#242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그때 좀 더 장 본부장의 걱정에 귀를 기울였어야 했다.

그때 좀 더 장 본부장이 시달리고 있는 답답함에 함께 울분을 토해냈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결과라 하더라도 장 본부장을 위로하고 그의 옆에 나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줬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장 본부장이 느끼고 있는 상황의 심각성에 대해선 그만큼 깊은 공감을 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난 이직이라는 또 다른 보험을 만들어 놓고 나의 길만 가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으니까.

이직이라는 보험.

의외로 든든한 보험이었다.

물론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할 무기였지만, 그 답답한 상황은 내게 나란 사람이 국내 패션 업계 내에서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어느 정도까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그 몸값을 제대로 평가받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내가 그동안 홍성 안에서 얼마나 저평가된 대우를 받아 오며, 한 번씩 회사가 툭툭 하고 던져주는 싸구려 사탕 하나에 왜 그렇게까지 지나친 만족, 그 만족을 넘어 감사함까지 느껴 왔는지를 의심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의 그런 답답한 행보로 인해 나의 하루하루는 오히려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폴앤크루에 대한 아쉬움?

그걸 말로 해서 뭐 할까.

아쉬웠다.

분명 폴앤크루의 콘셉트가 무너지고 상무님이 앞장서서 스스로 자신의 프로젝트를 망테크 태우고 있는 상황이 너무 아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까지 무너지나 지켜보고 싶은 마음도 컸던 거 같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홍성이라는 나의 젊은 시절에서 마음이 떠나기 시작하니, 폴앤크루는 그저 내게 미련이 남는, 지키지 못한 프로젝트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어 버렸다.

다만 폴앤크루 작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많은 무명 아티스트들에게 지키지 못할 기대를 안겨 줬던 게 아닐까… 하는 죄송스러운 마음만 무거운 돌덩이처럼 가슴 한편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책임과 나의 권한에 선을 그어놓고 출근을 하기 시작하니 조금 덜 집중하며 쳐내기 시작하는 부장 업무가 오히려 이전보다 한결 더 매끄럽게 진행되기 시작했고, 그에 활력이 실리니 영업부 전체의 업무 분위기도 덩달아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샌젤위고 브랜드 위크 플랜입니다.”

“올해는 좀 빨리 하네요?”

“작년 한 해 국내 매출이 워낙 좋았잖아요. 토탈 해외 위크 플랜을 보니까 유럽권 제외하고는 한국을 1순위로 놓고 짰더라고요.”

김 차장이 대형 브랜드 본사에서 주최하는 국내 위크 플랜을 가져왔다.

해당 브랜드의 전속 모델인 유명 할리우드 여배우도 함께 참석을 한다는 플랜이었다.

대형 브랜드 본사에서 전달된 협조 공문이라 홍성 영업부 입장에선 신경 써서 VVIP 고객들을 상대로 인비테이션 레터를 보내줘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국내 셀럽으로 로즈마리를 한번 섭외해 볼까 하는데, 부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로즈마리요?”

그 순간 난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양 차장을 슬쩍 훔쳐본 후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비용이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예전의 로즈마리가 아닙니다. 이젠 대형 매니지 소속이기도 하고…. 샌젤위고 쪽에서 이번 행사에 부담하겠다고 하는 마케팅 비용은 얼마나 됩니까?”

“작년이랑 똑같습니다. 행사 진행비 포함 10만 유로를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럼 어림없어요. 국내 셀럽을 로즈마리 한 명만 섭외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로즈마리를 섭외해 놓고 유튜브 영상을 기대 안 할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지금 로즈마리 영상 하나당 시장 가격이 얼마인 줄이나 아십니까? 6천만 원입니다. 광고 영상이면 6천인데, 10만 유로에서 6천 빼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양심이 있음 해 줘야지.”

양 차장이 혼잣말을 하듯 낮게 중얼거렸다.

난 그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무슨 양심이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

“아니, 그렇잖아요, 인간적으로… 현재 우리한테 협찬받아 가는 아이템이 얼마나 됩니까? 얼마나 되냐고 따지는 게 우스울 정도로 거의 매 영상마다 리뷰하는 아이템들은 거의 우리가 다 협찬해 주는 거 아닙니까? 그럼 도의적으로라도 이런 행사엔 가격 좀 낮춰서 참석해 줘야죠. 따지고 보면 자기들 입장에선 고퀄 영상 촬영 건수 아닌가? 돈이 안 맞아도 의리로라도 참석을 해줘야 맞는 거죠.”

안 차장이 미소를 흘렸고, 난 그 미소를 양 차장에게 들키지 말란 뜻을 담아 안 차장을 강하게 쳐다봤다.

양 차장 본인 빼고는 다 안다.

정작 당사자인 본인만 모르고 있는 거다.

그리고 나와 안 차장은 김 차장이 샌젤위고 국내 셀럽으로 로즈마리를 거론한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럼 뭐… 양 차장이 좀 도와주면 되겠네.”

김 차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양 차장에게 말했다.

“뭘요?”

“우리가 직접 컨택하는 거보다는 양 차장이 직접 좀… 말을 해주면 안 되나?”

“에이, 차장님도… 그건 어디까지나….”

“크게 바쁜 일 없음 그렇게 좀 해주세요.”

내가 쐐기를 박았다.

“부장님.”

“전 분명 ‘크게 바쁜 일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뭐 요즘 영업 기획부 널널하잖아요. 마케팅 브랜드들 시즌이지, 폴앤크루까지 분리돼서 나간 마당에 딱히 신경 쓸 프로젝트는 없지 않나? 나 같으면 좀 도와주겠다.”

참 내 입장에선 너무나 난감한 상황이었는데,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하면 할수록 영업부의 결속력은 더욱더 단단해져 가고 있었다.

그때 느꼈다.

이렇게 성장을 하는 건가….

이렇게 성장이라는 걸 배우는 건가….

내가 모든 걸 다 움켜쥐고 가려고 했을 때보다 책임과 권한을 알맞게 분배시켜 놓고 업무를 해 보니까 오히려 이게 더 경제적이고 생산성이 높다는 걸 알게 됐다.

김 차장은 더 이상 영업부 안에서만큼은 그 특유의 정치를 펼치지 않았고, 양 차장의 싸움닭 기질 역시 우리 안에서는 유하게 갈리기 시작했으며, 어떻게든 민규를 어느 수준 이상까지 끌어올려 놓겠다는 안 차장의 각오는 꽤나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그런 영업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날 다시 한번 갈대로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이런 업무 환경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 않나.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속으로 갈팡질팡했던 거 같다.

혼자서 차분하게 나의 이력과 나의 가치,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 보면 이직이 답인 거 같으면서도 매일같이 지지고 볶는 삼차장과 함께 영업부의 건설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엔 내가 어딜 가서 이런 맨파워를 다시 뽑아 내 사람으로 만들까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다시금 일 자체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퇴근 후 집에서 강혜선과 함께 저녁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또 전날 장모님께서 LA갈비를 재어 주셔서 그걸 꺼내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그 전화의 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았다.

카타르시스.

분명 카타르시스였다.

통쾌했으니까.

어쩌면 그동안 난 상무님이 먼저 이렇게 날 찾아주길 기다려 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 액정에 ‘상무님’이라는 그의 존재가 뜨는 순간 난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마치 십수 년 전 대학생 시절 때 먼저 내게 이별을 고했던 친구가 다시 잘해 보자며 연락을 해오는 것만 같았다.

상무님에 대한 마음은 이미 한참 전에 떠났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연락에 설레는 마음도 분명 있었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울산 식육… 오늘 거길 한번 가 볼까 하는데 정확한 위치가 어떻게 됩니까?

장 본부장한테 물어보면 되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그 위치를 알아보겠다고 연락을 해왔을까….

“어디십니까?”

-회사 앞입니다.

“이제 퇴근하시는 길입니까?”

-아뇨, 그냥 공 부장이랑 한잔 더 하고 싶어서….

“혼자 계십니까?”

-그러니까요. 어쩌다 보니 혼자네요. 지금 나오라고 하면 실례가 되는 건가?

“흐음….”

-한잔 안 할래요, 나랑?

된장찌개를 올려놓은 가스레인지에 불을 낮추며 강혜선이 날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셔야 할 거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 집에선 조금 멀거든요.”

-천천히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강혜선을 쳐다봤다.

그녀는 어떤 상황인지 대충 알겠다는 듯 그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빨리 가 봐.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 말고.”

상무님은 이미 어느 정도 취해 있었다.

울산 식육이 1차가 아닌 건 확실했다.

“어, 왔어요? 생각보다 빨리 왔네?”

“지하철 타고 왔습니다. 택시 타면 막힐 거 같아서….”

“앉아요, 앉아.”

상무님은 술기운을 빌어 평소보다 더 밝게 행동하셨고, 그런 그의 행동에 계속 실수가 나오고 있었다.

내게 자리를 권하는 과정에서 가만히 잘 세워져 있던 소주병을 건드려 그걸 쏟는가 하면, 그걸 닦겠다고 물수건을 들다가 젓가락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이모님. 여기 젓가락 한 벌만 새로 갖다주세요.”

난 자리에 앉아 테이블을 대충 정리해 놓고 상무님을 쳐다봤다.

상무님은 자신이 어질러 놓은 테이블을 내가 정리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

“…?”

“내가 주책이네, 그죠?”

“많이 드셨습니까?”

“아뇨. 공 부장 오면 같이 먹으려고 손도 안 대고 있었어요. 이렇게 시키는 거 맞죠? 육회 작은 거 두 접시, 그리고 초리구이 2인분….”

“….”

“장 본부장님이 너무 많이 이야기를 해주셔서 처음 와 봤는데도 어떻게 시켜야 하는지 알겠더라고. 이렇게 시키는 거 맞죠?”

“초리구이는 육회 먼저 다 먹고… 아쉽다 싶을 때 시킵니다.”

“…그렇구나.”

“많이 마시셨습니까?”

“쬐금. 회사 앞에서 그냥 간단하게 목만 축이다 들어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우리 공 부장님 생각이 나서요.”

“흐음….”

“민규한테 폴앤크루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고요?”

“본인이 그건 싫다고 하더라고요.”

“크크큭… 후우….”

그의 얼굴에도 어느덧 나이가 스며 있었다.

자세히 못 본 그사이에 그의 얼굴엔 술살이 올라 있었고, 그래서 퍼석한 감도 있었다.

상무님은 천장을 향해 고개를 젖혀 놓고 한숨을 몰아쉬더니 취한 사람 특유의 모습으로 날 쳐다봤다.

“혹시 장 본부장님한테 따로 들은 이야기 없어요?”

“…뭘 말씀이십니까?”

“아니, 그냥… 뭐 들은 이야기 없나 싶어서요.”

“아뇨, 아무것도….”

사실 상무님을 만나러 오는 길에 장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참았었다.

“공 부장님.”

“네.”

“잘 어울리네.”

“…?”

“사복 입은 모습….”

난 말없이 내 잔에 술을 채워 단번에 비운 후 벌써 녹아 흐물흐물해진 육회 한 점을 집어 먹었다.

그리고 다시 내 잔에만 술을 채웠다.

“정장 입은 모습만 보다가 이렇게 평상복 입은 모습을 보니까 좀 낯설다. 그런데… 참 잘 어울리네, 부럽게.”

“…?”

“꼭 정장이 아니라도… 잘 어울리네.”

“하시고 싶은 말씀이….”

“나는!”

갑자기 꽥! 하고 음성을 높힌 상무님.

그 덕에 옆 테이블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내야만 했다.

“이 불편한 정장만 죽어라 입고 있는데, 공 부장은 편한 평상복도 너무 잘 어울려.”

“많이 취하신 거 같습니다.”

“하아….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요? 왜? 나라서? 내가 왜 이렇게 가고 있는지는 아무도 물어봐 주질 않고, 그냥 무조건 내가 하는 거니까 불안하고, 아닌 거 같고 그래? 공 부장도 그런 거예요?”

“저는 이미 상무님의 프로젝트에서 한참 전에 빠진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런 내게 상무님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 하나를 꺼내 내 앞으로 내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장 본부장님이 더는 못 하겠다고 하시면서 이걸 저한테 주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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