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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241화 (241/325)

#241

속이 탄다, 속이 타

그 일이 있고 난 이후로 더 이상 상무님으로부터는 호출이 걸려 오지 않았다.

한 번씩 박 이사에게 보고할 일이 있어 임원 층을 찾을 때마다 상무님 방에서 상무님, 장 본부장, 그리고 강 대표 이렇게 셋이서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을 통유리 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폴앤크루만 생각을 하면 내가 저 자리에 끼어 있지 못한 게 참 아쉬웠다.

하지만 저 방 안의 공기만 생각하면 그 정도 아쉬움쯤은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었고.

그렇게 시간은 내가 언제 이직을 고민했었나 싶을 정도로 다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꾸준히 흘러가 주고 있었다.

가끔씩 재수가 없어 엘리베이터 안이나 본사 로비에서 상무님과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 마주침이 더 이상 불편하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더 정확하게는 아예 불편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며 지나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상무님의 껌딱지처럼 상무님의 옆에 딱 달라붙어 다니던 강 대표가 조금씩 혼자서 움직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폴앤크루 분리경영의 셋업 멤버가 갖춰졌고, 분리경영 이후의 디테일을 잡기 위해 그들과 움직이는 시간이 많아졌던 거 같다.

강 대표는 날 피해 다녔다.

가끔씩 멀리서 날 보기라도 하면 오던 길을 돌아갔고, 한 번은 내가 자기를 못 본 줄 알고 슬쩍 몸을 숨기는 것도 봤다.

분명 저 정도 수준의 사람은 아닐 건데….

그래도 명색이 파리 현지에서 대형 브랜드 본사 오퍼레이션 디렉터까지 지냈던 사람이다.

홍성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상무님께 어떤 오더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안타깝단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을 저렇게밖에 못 쓰는 걸까?

강 대표는 분명 날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가 내게 느끼는 두려움의 성질이 어떤 것인지 대충은 알 거 같았다.

사람의 실력, 능력, 포지션… 이런 거 다 떠나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대놓고 지랄을 하는 사람을 불편해하고 또 그럼에도 맞설 명분이 마땅히 없는 상태라면 두려워할 수밖에.

하물며 강 대표 같은 경우는 자신이 생각을 해도 치졸한 방법으로 날 궁지로 몰아넣다가 나에게 털렸으니 얼마나 나란 존재가 불편할까.

나 역시 강 대표 같은 입장이었을 때가 분명 있었다.

강 대표처럼 이유 없이 누군가를 궁지로 몰아넣으려다 역관광을 당했던 적은 없었지만, 홍성 입사 초기, 이유 없이 날 미워하는 대리 한 명이 있었는데, 난 그 대리 앞에선 언제나 고양이 앞의 쥐처럼 눈치를 보고 또 그 인간의 기분을 살펴야 했었다.

그 대리는 나보다 한 살 어린 여자였다.

체구도 작았고, 또 업무 능력도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위로부터 인정을 받는 대리도 아니었던 거로 기억하고.

그럼에도 난 그 당시 그 대리가 부장, 차장, 팀장보다 더 무서웠다.

그와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지금 강 대표가 날 상대로 느끼는 두려움의 성질이.

대놓고 지랄을 하니까.

그 지랄이 이젠 각인이 되어 마주치면 내가 트집을 잡고 또 물어뜯을 거라는 트라우마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는 어쩌면 최소한 이 홍성 안에서만큼은 날 실력으로 누를 자신이 없다는 인정 때문에 더 떨쳐내기 힘든 것일지도….

그냥 내 생각이 그렇다는 거다.

그렇게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루는 회사 사내 식당에서 웃픈 해프닝이 한 번 벌어졌다.

봄 시즌은 어쩔 수 없이 패션 업계 입장에선 잠시 쉬어가야 하는 시즌이다.

시즌 상품들만 매장에 깔아 놓으면 다음 시즌 신상이 나올 때까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데, 특히 여름 시즌 상품 같은 경우는 원래 턴 오버가 크게 안 일어나는 종목이기 때문에 꾸준히 나가는 가죽 제품들만 제대로 컨트롤을 해주면 크게 할 일이 없다.

그래서 폴앤크루의 본사 분리를 이때쯤으로 맞춰 놓고 진행을 했던 거고.

어차피 맨투맨, 후드 티가 주 종목인 폴앤크루였기에 본사로부터 완벽한 독립을 진행하기엔 지금이 적기였다.

간만에 삼차장들과 저녁 술자리 약속을 잡아놓고 점심은 간단하게 사내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날씨가 그래서 그런지 노곤한 게 딱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고, 마침 또 사내식당 점심 메뉴가 갈비찜 특식이라길래 고민 없이 삼차장들과 사내 식당으로 향했다.

메뉴가 메뉴인지라 간만에 사내 식당이 북적거렸다.

“강 대표네….”

밥을 잘 먹고 있는데, 갑자기 김 차장이 강 대표가 식당에 왔다고 말했다.

난 고개만 살짝 돌려 식당 출입문 쪽을 쳐다봤고, 김 차장의 말처럼 강 대표가 폴앤크루 셋업 멤버들과 다 같이 식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공교롭게도 빈자리가 없었고, 마침 바로 그때 우리 옆에서 식사 중이던 지원과 직원들 대여섯 명이 식사를 끝내고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서로가 난처한 상황이었다.

서로가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강 대표 입장에선 혼자 온 것도 아니고 자기 식구들 다 데리고 온 상황에서 내 눈치 본다고 우리 옆으로 안 앉을 수도 없는 거고, 나 역시 앉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난 내 옆자리 의자를 뒤로 살짝 빼 주며 강 대표에게 말했다.

“앉으세요. 다른 데 빈자리도 없는 거 같구만….”

“….”

문 팀장도 함께 있었다.

강 대표는 우물쭈물한 모습을 보였고, 문 팀장이 내 맞은편, 그러니까 안 차장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부장님.”

“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부장님 덕분에 무척 잘 지냈습니다. 다시 본사에서 뵐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뵙네요.”

문 팀장의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갑자기 싸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까지도 나와 문 팀장의 기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거 같았다.

“다행이네요. 뭐 딱히 제가 해 준 건 없었던 거 같은데 그래도 제 덕에 잘 지냈다니 듣기는 좋네요. 뭐 하세요, 안 앉으시고?”

난 고개를 살짝 들어 내 옆자리에 앉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강 대표에게 내가 빼 준 의자를 눈짓하며 앉으라고 말했다.

“우리 밥은 편하게 먹읍시다, 인간적으로. 현장에선 모르겠지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밥까지 긴장하며 먹을 필요 있겠습니까?”

그제야 강 대표는 자기 식구들 눈치 때문인지 자리에 앉았다.

“어떠세요? 곧 새집으로 이사 간다고 하시던데.”

분위기가 상당히 불편한 상태였다.

그 불편한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려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걸 물어봤다.

솔직히 장 본부장을 통해 대략적인 폴앤크루의 스케줄은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네, 뭐…”

“언제쯤 새 사무실로 옮기십니까?”

“다음 주에 리모델링 들어갑니다. 생각보다 많이 늦어지고 있네요.”

“그렇군요.”

그때 난 강 대표와 대화를 끝냈다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폴앤크루의 다른 셋업 멤버, 그중에서도 내가 폴앤크루를 총괄할 당시 가장 많은 교류가 있었던 홍보팀 소속의 직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많이 먹어요. 이게 있을 땐 모르는데, 다들 파견 근무를 가거나 하면 그리워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본사 밥이 최고라고.”

그런데 내가 한 이 말을 문 팀장이 오해를 해버린 거다.

내가 자신을 상대로 비아냥거렸다는 식으로.

“설마요. 전 그닥 그립지 않던데….”

분위기는 얼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 팀장은 뒤늦게 내가 자신을 비아냥거리기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게 아니라, 자기 옆에 앉아서 식사 중인 다른 셋업 멤버에게 했던 말이란 걸 눈치채고 얼굴을 붉혔다.

“식성은 다 다른 거니까…. 아무래도 먼저 와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뜬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겠네요. 우린 일어납시다. 편하게 식사들 하실 수 있도록….”

난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판 위로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삼차장도 하던 식사를 중단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문 팀장.”

김 차장이 그냥 가려다 말고 문 팀장을 불렀다.

“차장입니다.”

“그래, 문 차장.”

“말씀하세요.”

“내일 하기로 했던 마진 미팅, 다음 주로 미루지.”

“…!”

“맛있게 먹어.”

“아니, 차장님. 이러는 법이 어딨습니까?”

문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김 차장은 식판을 들지 않은 다른 손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

“쉿! 우리만 있는 거 아니잖아.”

“….”

“여전하군. 문 차장은 그 성급함이 유일한 마이너스야. 그것만 좀 누를 수 있음 참 좋을 건데… 아깝다, 진짜.”

그래서 내가 김 차장을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에이, 뭘 또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문 차장님 그냥 내일 와요.”

젓가락을 쥔 문 차장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내일 마진 협상 자리엔 나도 나가야겠다.”

“…!”

“그럼 우리 내일 봅시다. 영업부 사무실에서.”

그리고 다음 날.

오전 근무 중에 갑자기 목이 너무 뻐근해서 담배라도 한 대 피울 겸 17층으로 올라갔다.

사실상 오전 근무 중에 17층에 올라올 수 있는 건 최소 팀장 이상 짬밥이 되어야 가능한 거다.

그렇게 정해진 건 없지만, 가장 집중도가 높은 오전 근무 중에 17층을 기웃거린다는 건 누가 봐도 보기가 안 좋은 거니까.

보통 이 시간대에 17층에 올라가면 아무도 없는 게 정상인데 최근 이 시간대에 장 본부장을 참 자주 만나고 있다.

먼저 와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장 본부장.

“요즘 뭐 생각이 많으십니까? 왜 이렇게 자주 올라오세요?”

내가 마시려고 뽑아 왔던 자판기 커피를 장 본부장에 건넨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근데 오늘 폴앤크루 마진 미팅 있는 거 아냐?”

“네, 지금쯤 하고 있을 겁니다.”

“아니….”

“…?”

“공 부장도 참석하기로 했던 거 아냐?”

“제가요? 제가 왜요?”

“아까 강 대표가 그러던데? 공 부장도 그 자리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그래서 자기도 나가야 되는 거냐고 묻더라고.”

“헐…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공 부장 스페셜리티가 뭔지 아느냐고, 문 차장만 보내놓으면 마진 쏙 뺏길 거라고 말해줬지. 아마 강 대표도 같이 갔을걸?”

“참 가지가지 한다, 가지가지 해… 애들 앞에선 찬물도 못 마신다고 하더니… 뭘 또 그런 소릴 새겨듣고 난리래?”

“안 가봐도 돼?”

“이제 마케팅 브랜드로 넘어왔고, 브랜드 파워만 놓고 보면 팀장급에서 알아서 해야 할 브랜든데, 제가 거길 왜 낍니까? 그건 그렇고… 요즘 안색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재미가 없네.”

“….”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왜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냥… 그냥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네.”

“…?”

“폴앤크루… 해외 쪽으로 70퍼센트에 풀겠단다.”

“이런 미친….”

“근데 그걸 또 상무님이 오케이를 해주셨어.”

“아니, 니미 씨바 생각들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없는 사람들입니까?”

“한국 브랜드를 그렇게 안 맞춰 주면 누가 받아가겠냐는 거야, 강 대표 말은.”

“받아가기 싫으면 받아가지 말라고 하면 되지, 마진으로 구걸을 하겠다고요?”

“내가 지금 속이 탄다, 속이 타. 강 대표가 말 그대로 대표니 내가 옆에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건 상무님한테 그건 아니라고 코칭을 넣는 거밖에 더 있어? 근데 넣으면 뭐 해, 들어 처먹지를 않는데.”

“강 대표, 이거 진짜 미친 새끼네, 진짜….”

“더 골 때리는 게 뭔지 알아?”

“이거보다 더 골 때리는 게 어디에 있습니까?”

“작가 컬렉션.”

“그게 왜요?”

“다음 시즌부터는 9,999벌씩 찍겠단다. 999벌은 아무리 타산을 따져 봐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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