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그로부터 딱 병원에 입원했던 민규가 다시 회사로 복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국내 패션 컨트롤 기업 1위 홍성 인터내셔널.
2위 기업과의 격차는 이미 CGM이라는 공룡 기업을 국내에서 철수시킬 때부터 좁힐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홍성에 전에 없었던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회사는 직원들의 복지에 좀 더 관심을 보였고, 우리가 요청을 한 것도 아닌데 부서별 맨파워 보충에 인사부가 앞장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
헤드 미팅(부서장 회의) 자리에서 인사부장이 각 부서장들에게 직접 자리를 옮겨 가며 인쇄물 한 장씩을 돌렸다.
나를 포함한 모든 부서장들은 인사부장이 전달한 인쇄물을 받아 들고 다들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무님 지시 사항입니다. 오전 중으로 작성해서 인사부로 전달 부탁드리겠습니다.”
<보충 인원 요청서>라는 조금은 생소한 단어의 조합을 타이틀로 달고 있는 인쇄물이었다.
급하게 주요 골자를 확인해 봤다.
하반기 공채와는 별도로 부서별로 필요한 맨파워를 요청해 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 현 부장들 중 부서 파워를 떠나 가장 강한 부장 파워를 가지고 있는 재무부장이 손을 들었다.
재무부장은 박 이사가 이사 승진을 한 이후부터 부장들의 수장 역할을 해왔었고, 헤드 미팅에서도 가장 많은 발언권을 가진 인물이었다.
“전무님 지시 사항이었다고?”
“네, 부장님.”
둘 사이에 뭔가 불편한 기운이 오갈 수밖에 없는 장면.
맨파워 보충이 인사부의 책임이긴 하지만, 그게 인사부의 고유 권한일 수는 없다.
결국 인건비라는 것도 크게 보면 회사의 지출 항목인 것이고, 그걸 재경을 총괄하고 있는 재무부장을 건너뛰고 이뤄진다는 건 누가 봐도 어색한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인사부장의 처세는 나쁘지 않았다.
재무부장의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스미기 시작하는 찰나 재빠르게 오해의 소지를 없애고자 입을 열었다.
“아침에 하반기 공채로 입사한 신입사원들의 오리엔테이션 일정을 컨펌받는 과정에서 급하게 지시가 내려온 내용입니다. 아마 재무부장님께는 따로 호출을 주실 거 같았습니다. 스타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지시만 받은 내용입니다.”
그제야 재무부장이 그렇냐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게 지금… 보충 인원 요청서라는 게 정확하게 뭐야?”
“저도 어떻게 타이틀을 잡아야 할지 몰라서 그냥 전무님께서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 보충 인원이라고 타이틀을 잡은 건데… 간단하게 말해서 경력직 사원 스카우트가 필요한 부서는 체크를 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영업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이란 소리.
하지만 의외이기는 했다.
그동안 홍성은 업계에서 미련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로 타 기업의 맨파워를 빼 오는 일을 하지 않았다.
사실 이 부분은 나 역시도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회사 입장에서야 회사의 경영 철학이라는 게 있으니까 고집을 하고 있는 거겠지만, 월급 받는 샐러리맨들의 입장에선 이직의 기회가 한정되어 있다는 뜻과도 같으니까.
이직이라는 것도 좀 더 나은 회사로 이직을 하는 상향 이직이라는 게 있고, 그 반대로 하향 이직이라는 게 있지 않겠나.
처음부터 홍성에 입사를 하지 않으면 최소한 국내 패션 업계에서만큼은 업계 1위 기업에서 근무를 해 볼 기회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인터넷에 패션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끼리 정보를 주고받는 인터넷 카페가 있다.
주로 그곳에서 우린 익명으로 업계의 한계와 직장 생활의 어려움 등을 공유하고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기업들의 직급에 따른 기본급과 복지, 이직에 관한 정보들을 더 집중적으로 공유하고 그 정보들로 시장 점유율에 따른 업계 순위가 아닌 직원들이 근무하기 좋은 환경의 기업 순위를 다시 매기기도 했다.
물론 그렇게 순위를 다시 매겨도 홍성은 부동의 1위였다.
다만 딱 한 가지.
회사가 너무 직원 채용에 고집스럽다는 부분에는 모두가 아쉬워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홍성맨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신입들만을 뽑아 철저하게 홍성맨으로 키우다 보니 홍성에서 다른 회사로의 이직은 무척 수월하게 하지만, 다른 회사에서 홍성으로 이직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아쉬움의 소리가 많았다.
특히 영업직 같은 경우는 지금껏 이례가 전혀 없었고, 영업 지원 관련 부서 역시 해당이 안 되는 내용이었다.
그나마 인사나 재무, 시설 관리와 같은 백오피스 쪽에서는 가물에 콩 나듯 다른 회사에서 경력직 사원을 스카우트하기도 했는데, 그 역시도 워낙에 기업 문화가 확고하다 보니 이직한 사람들이 오래 못 버티고 튕겨져 나온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17층.
헤드 미팅이 끝나기가 무섭게 난 담배를 피우는 부장 몇 명과 17층으로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자판기 커피 한 잔과 함께 즐긴 담배 한 개비를 비벼 끄고 사무실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이제 막 17층을 찾은 장 본부장과 마주쳤다.
다른 부장들은 장 본부장과 간단하게 눈인사만 주고받고 엘리베이터에 올랐지만, 난 다시 몸을 돌려 장 본부장과 담배를 피웠다.
“오늘 헤드 미팅 있는 날이었어?”
“네. 근데 혹시 알고 계셨습니까?”
“뭘?”
“이거….”
난 장 본부장 앞으로 인사부장에게 받은 보충 인원 요청서를 보여줬다.
그걸 보면서 장 본부장은 ‘영업부하고는 상관없는 내용이잖아?’라며 그 종이를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자신은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라는 말이었다.
“회사가 커지다 보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 뭐.”
“…네.”
“쁘띠토널도 따지고 보면 억지로 없는 맨파워 쪼개어 보내서 간신히 자리 잡아 놓은 거 아냐.”
“그렇죠.”
“그런데 폴앤크루까지 나누려면 현재 본사 맨파워만 가지고는 답이 안 나오는 거지. 쁘띠토널이야 기존에 있던 조직도에서 홍성 본사 맨파워만 추가로 파견을 보내면 되는 거였지만, 폴앤크루는 아예 기본 세팅을 처음부터 해야 하는 거잖아.”
“뭐 좀 들으신 내용 있으세요?”
그때 난 눈치챘다.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그 상대가 비록 나라 하더라도 장 본부장은 말을 아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래서 더는 묻지 않았다.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알고 싶기는 했고.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폴앤크루 건으로 양 차장과 차 팀장, 그리고 이지혜를 불러놓고 홍보팀 지 팀장이 외주 프로덕션으로부터 받아온 광고 영상을 함께 확인하고 있었다.
그 자리엔 광고 영상으로 이미지 배너를 제작해 줄 웹디자인팀의 성 팀장도 함께 있었다.
영상 재생이 가능한 회의실을 빌려서 폴앤크루 1차 홍보 티저 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
한 남자가 등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스파이더 백팩을 메고 있었고, 그의 앞엔 버스 정류소에서나 볼 법한 대형 광고판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대형 광고판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한 점 들어가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뒤로 메고 있던 스파이더 백팩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그 가방에서 헤드셋을 꺼내 머리 위로 쓰는 순간 빠른 비트의 BGM이 깔렸다.
남자는 연이어 가방에서 다양한 컬러의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정리해 놓았다.
그리고 남자는 자신의 앞에 세워져 있던 대형 광고판에 컬러 스프레이로 거침없이 새로운 뭔가를 표현하기 시작했다.
BGM 비트만큼이나 유명 작가의 작품 위로 자신만의 세상을 컬러 스프레이로 표현하기 시작한 남자의 움직임은 빨랐고, 그런 남자의 몸이 하나에서 둘로 나뉘고, 둘에서 다시 셋, 넷으로 분리가 되는 동안 어느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등을 보이고 움직이는 남자의 작품으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요즘 말로 ‘힙’한 느낌의 폴앤크루 영문을 유명 화가의 그림 위로 새겨 넣은 남자.
그는 자신이 완성해 놓은 그라피티 작품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닥에 내려놓았던 스파이더 백팩 속으로 다양한 컬러의 스프레이를 챙겨 넣고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가 떠난 뒤 그를 설명하는 짤막한 자막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라피티 아티스트 길상현.
세상의 모든 공간이 나의 컨버스다.
카메라는 그가 바꿔 놓은 광고판을 집중해서 잡기 시작했고, 이내 화면 가득 그 작품 속 폴앤크루 영문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 화면이 점점 뒤로 멀어지면서 그 작품은 어느새 폴앤크루 맨투맨의 뒷모습이 되어 있었다.
헉, 헉, 헉….
거친 숨소리.
카메라 화면은 계속해서 뒤로 멀어지고 있었고 곧 그 맨투맨을 입고 있는 사람 한 명이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 홀로 서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헉, 헉, 헉….
폴앤크루 맨투맨을 입고 있는 사람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대 위로는 화려한 조명이 쏟아져 내렸고, 관객석에선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제이드의 리더 환성이 그 맨투맨을 입고 관객석을 등지고 있었던 장본인이었다.
“우와… 지난주 콘티 미팅했을 때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딱 10배 더 좋네요.”
난 나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박수를 쳤다.
양 차장 역시 짧은 영상 속에 우리가 담고 싶었던 폴앤크루의 콘셉트를 아주 깔끔하게 담아낸 걸 혀를 내두르며 인정했다.
지 팀장은 우쭐하며 말했다.
“다른 아티스트들의 작품들도 폴앤크루 컬렉션으로 바뀌는 과정을 남은 제이드 멤버의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해서 콘티 제작 중에 있습니다.”
“이게 시리즈라는 걸 사람들이 알 수 있어야 할 텐데….”
“도상훈 작가의 작품으로 기획되고 있는 광고 영상 편집까지 끝나면 그때 함께 편성을 해서 진행을 할 예정입니다. 제이드 멤버 다섯 중 둘을 모델로 썼는데, 다른 세 명의 추가 영상도 남아 있을 거란 추측을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걸 테니까요.”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댔던 양 차장과 지 팀장도 어느새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 팀장님. 그리고 성 팀장님.”
“네.”
“우리… 회식 한번 합시다. 그동안 바빠서 미루고만 있었는데, 이렇게 계속 어영부영하다 보면 영영 못 할 거 같아요. 영업부에선 이번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는 기획 1팀만 참석하는 거로 해서.”
내가 한 제안에 지 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죠. 메뉴는요?”
“홍보팀이랑 웹디자인팀이 말 맞춰서 날짜, 메뉴 다 알아서 정하세요. 아직 갈 길이 멀긴 했지만, 다시 출발하기 전에 우리끼리 회식이라도 한번 합시다.”
“비싼 거 먹어도 됩니까?”
“당연하죠. 이 정도 영상을 만들어놨는데, 싼 거로 회식을 한다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제가 이 영상 상무님께 보여드린 뒤에 책임지고 상무님 카드 받아오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수가 터져 나왔고, 난 그들이 보내는 박수보다 더 크게, 수준 있는 광고 영상을 뽑아낸 지 팀장에게 박수를 보냈다.
해당 광고 영상을 상무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아이패드에 담아 달라고 부탁을 한 뒤 장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영상 나왔습니다. 방금 확인을 했고, 보고를 드려야 할 거 같은데, 혹시 상무님과 같이 계십니까?”
-응, 근데 지금… 잠깐만 있어 봐.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데요?
-공 부장입니다. 첫 번째 영상 이제 막 나왔다고 합니다.
-아… 그건 잠깐 뒤로하고 일단 올라와 보라고 하세요.
그건 잠깐 뒤로하고….
최소한 광고 영상 건보다는 더 중요한 일이라는 소리였다.
-상무님이 그건 나중에 확인하자고 하시네. 그건 잠깐 스탠바이시키고 일단 상무님 방으로 잠시 올라와 봐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난 그래도 혹시 몰라서 영상을 담은 아이패드를 챙겨서 상무님 방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거긴 상무님과 장 본부장 외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 한 명 더 있었다.
다리를 꼬아놓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는 상대의 자세만 보면 절대 일적인 상대는 아닌 거 같은데, 그 자리에 장 본부장이 함께 있는 걸 보면 또 일적인 상대가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아주 이상한 자리였다.
상대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함인지, 자세를 살짝 바로잡고 앉았다.
그리고 내가 상무님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상무님과 눈빛을 교환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말했던 우리 본사 영업부 공은태 부장님.”
상무님이 상대에게 날 소개했다.
둘의 관계가 그리 딱딱한 관계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경준이라고 합니다.”
그는 내게 다짜고짜 손을 내밀었고, 난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다른 손으로 옮겨 든 뒤 그의 손을 잡았다.
제법 힘 있는 악수를 할 줄 아는 상대였다.
상대가 누군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손에 실린 힘의 성의를 느낀 난 함께 힘 있는 악수를 하며 말했다.
“공은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