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그 인간은 모르죠
목요일 오전 근무 중이었다.
중국 센젠 법인의 손 차장으로부터 폴앤크루 건으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는데, 살짝 의외였다.
내가 아는 손 차장은 김 차장과 사내 정치 맞짱을 뜰 정도로 눈치가 빠르고 또 처세에 능한 사람이다.
홍성 본사 영업부에서 근무를 하는 동안 그가 한 유일한 실수라고는 장 본부장과 척을 지고 박 이사 라인에 몰빵을 했다는 것 정도.
그 역시도 장 본부장과 입사 시기가 비슷했던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와 양 차장은 손 차장이 중국 법인 생활을 끝내고 다시 한국으로 복귀를 했을 때, 폴앤크루 영업부장 자리를 제안하고 그 제안을 미끼로 중국 법인이 폴앤크루 2차 컬렉션을 대량으로 받아달라고 요청을 넣으면 쉽게 먹힐 줄 알았다.
하지만 나와 양 차장의 예상과는 달리 손 차장은 우리 쪽 제안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매너라는 게 있지, 비록 잠시 거쳐 가는 파견 근무 중이라지만 그래도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최소한 똥을 싸놓고 나올 수는 없는 거 아냐. 공 부장 아이디어라며?
“뭐… 가요?”
-뭘 또 모른 척을 하고 그래? 폴앤크루 영업부장 자리 미끼로 만들어서 이사님한테 토스한 거 공 부장 아이디어잖아.
“….”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건 좀 아닌 거 같다. 공 부장.
“네, 차장님.”
-나란 사람의 이미지가 공 부장한테 어떻게 각인이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그렇게 나 혼자 잘되자고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 엿 먹일 정도로 무책임한 결정 내리는 이기적인 사람 아니다.
“…!”
-나 본사 영업부에 있을 때도 그렇게는 일 안 했다. 결국 팀장 1년 차 까마득한 후배한테는 실력으로, 입사 선배한테는 짬으로 차장 승진 밀려서 주재원 근무를 신청했던 거지만, 내가 꼭 차장 승진만 보고 주재원 근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공 부장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나라고 목표가 없고, 애사심이 없겠어? 나 중국 법인 처음 넘어와서 지금까지 공 부장처럼 눈에 띄는 실적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지만, 차장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해.
“…네.”
-중국어 한마디 못 하는 상태로 가족들 다 데리고 넘어와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또 적응시키고… 그게 어디 나 혼자 힘으로 가능했겠어? 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도움받아 가며 자리를 잡은 거지. 그런데 지금 나더러 아직 실물을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한 브랜드를 받아서 깔아 보라고? 그것도 법인 예산으로?
“음….”
-공 부장 열심히 일하는 거 잘 알고, 또 누구보다 능력 좋은 거 잘 알아. 그런데… 이번엔 판단 미스야. 나 그렇게는 못 한다. 박 이사님이 하시는 이야기 들어 보니까 조만간 폴앤크루 2차 컬렉션 나온다며?
“네.”
-지금 나더러 그 컬렉션을 받아 달란 소리잖아.
“네.”
-브랜드 숙지 하나도 못 한 상태에서 그걸 그렇게 대량으로 받아서 뭘 어쩌라고? 브랜드 숙지가 문제가 아니라 중국에선 인지도부터 제로야. 가격이나 좋아? 뭐 그 로즈마린가 뭔가 하는 유튜버 때문에 살짝 탄력을 받았다고는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에서 그런 거고, 여긴 사정이 달라. 그 컬렉션 받는 순간 우리 법인 입장에선 바로 재고가 되는 거라고. 바로 이월 재고가 될 아이템인 게 눈에 빤히 보이는데, 그걸 컨사인먼트도 아니고 법인 예산으로 받아달란 말은 나한테 중국 법인의 해사 행위를 하란 소리로밖에 안 들려.
분명 손 차장이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살짝 감동이었다.
손 차장에게 이런 단호한 면이 있다는 것도 의외였다.
-나 중국 주재원 근무 오자마자 매달렸던 게 바로 비리로 초토화됐던 조직을 정상화시키는 작업이었어. 영업에 영 자도 모르는 법인장에 본부장까지 모시고 말이야. 솔직히 쉽지 않더라. 명절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 찾아뵈러 갈 엄두가 안 나서 와이프랑 애들만 한국에 보내놓고 야근까지 해 가며 매달렸어. 그렇게 해도 티가 안 나. 티가 안 나니 수고한단 말 한마디 듣질 못해. 그래도 하고 있다. 내 눈에만 보이는 거지만, 그래도 조금씩 개선이 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말이야. 그런 보람으로 하고 있다고. 그런 나한테 이제 와서 그런 딜을 넣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떠보는 거야?
“떠보다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중국 법인으로 물량 센딩하겠다는 계획이 어디까지 진행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무님한테 말씀드려. 내가 보류 요청 넣었다고. 상무님한테 미운털 박혀도 어쩔 수 없어. 아닌 건 아닌 거니까.
“….”
-내 입장에선 그렇게 해도 되는 거 아냐? 어차피 프랑스 법인이랑 여기 중국 법인 운영은 본사와 별개로 분리 경영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으니까.
손 차장과의 통화를 끝내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폴앤크루 2차 컬렉션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막막함?
아니, 막막함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손 차장이 중국 법인에서 자신의 역할에 집중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묘한 설렘 때문이었다.
한 번씩 그런 의심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집단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때.
과연 이런 맨파워로 언제까지 이 집단이 무사히 굴러갈 수 있을까란 의심.
그건 비단 홍성에서만 든 의심이 아니다.
군대에서도 그런 의심을 품었고, 전역 후 복학을 기다리며 짧게 해봤던 아르바이트 업체에서도 이 비슷한 의심을 가져 봤었다.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겠지.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오만 때문일 수도 있을 거고.
그런데 참 재밌게도 내가 전역을 해도 국방부 시계는 잘만 돌아갔고, 아르바이트 직원 하나 빠진다고 해서 무너지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은연중에 내가 손 차장을 너무 무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손 차장을 무시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소속된 집단 전체를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그랬을 거다.
그랬으니 거래 업체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생략하고, 기본적인 절차까지 다 무시한 채 일을 진행하려고 했겠지.
고작 위로부터 인정 조금 받고 있다고 말이다.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양 차장을 찾아갔다.
“저희가 억지로 진행을 하면 중국 법인에서 보류 요청을 넣겠답니다.”
내 말에 양 차장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업무를 보고 있던 기획 1팀 팀원들도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아니… 왜 그렇게까지 한답니까? 우리가 어디 법인 쪽으로 쓰레기 브랜드 짬처리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양 차장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손 차장님 입장에선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웃어야지 뭐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울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신경 쓸 거 태산인데, 이게 이렇게 꼬이네….”
“하나하나씩 풀어가 봅시다. 조금 꼬였다고 엉킨 매듭 잘라 버리지 말고.”
“기껏 하나 해결해 놓으면 생각도 안 했던 엄한 곳에서 또 하나 꼬여버리고…. 진짜 해도 해도 끝이 없네요.”
“처음이니까. 처음이잖아요, 자체 브랜드. 저는 오히려 처음치고는 너무 순탄하게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뭔가가 엉켜 주기도 해야 그걸 침착하게 푸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에게 요령도 생기고 그걸 자기 노하우로 삼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근데 이렇게 되면 공장 쪽에 넣을 생각이었던 마진 재조정은 힘들어지는 거 아닙니까?”
“마진 재조정은 무조건 해야죠. 상무님 작품으로 만드는 컬렉션들이야 일반 컬렉션이니 마진 낮춰가며 물량을 조절할 수 있지만, 작가들 컬렉션은 이미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가기로 확정이 난 상태라 그게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공장 쪽에서 뽑아 준 견적대로 그걸 그 돈 다 주고 뽑을 수도 없는 거고.”
“하아…”
“일단 제가 지금 이 대리랑 같이 공장에 한번 가 볼게요.”
“지금이요?”
“이 대리. 나랑 잠깐 외근 좀 나갑시다.”
“넵!”
이지혜와 함께 공장으로 향하는 차 안이었다.
“그런데 부장님. 지금 공장에 가서 뭘 어쩌시려고… 우선 중국 법인부터 설득을 해놓고 중국 법인이 우리가 계획했던 물량을 받아주겠다고 하면 그 물량으로 마진 재조정을 시도하는 게 순서 아닐까요?”
“순서대로 하기 위해 공장부터 찾아가는 겁니다.”
“…?”
“제가 한 가지 놓치고 지나갔던 게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해서 놓치고 지나간 건 아니고, 이렇게 해도 되겠지… 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던 부분이었는데…. 그걸 오늘 중국에 계신 손 차장님께서 그렇게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따끔하게 일깨워 주셨네요.”
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지혜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고 물량은 엄밀히 말해 브랜드 본사가 떠안아야 할 리스크죠. 우린 그 리스크를 어떻게든 줄이려고 분리 경영을 하고 있는 중국 법인에게 강매하려고 했고.”
“하지만….”
“그 하지만이 우린 본사니까 중국 법인을 상대로 그렇게 해도 된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던 거 같아서요.”
“설마 지금 중국 법인이 보류 요청까지 넣겠다는데, 원래 생산하려고 했던 물량을 오더하러 가시는 건 아니죠?”
“맞는데요?”
“부장님!”
“아따, 놀래라….”
“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지혜 씨 소리 지르는 거 오늘 처음 봤네요.”
“뭔가 계획이 있으신 거죠?”
이지혜가 다급하게 물었다.
“…?”
“그죠? 항상 플랜 B를 가지고 계신 분이니까… 뭔가 계획이 있으신 거죠?”
“아뇨, 딱히….”
“아, 부장님.”
“그 물량을 오더해 주겠다 미끼를 던져야 사이즈별 250개씩 뽑을 작가 컬렉션 단가를 낮출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이건 뭐 고민 많이 해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나는 그것보다….”
“…?”
“로즈마리가 더 궁금하네.”
“로즈마리… 요? 갑자기 로즈마리가 왜요?”
“내가 왜 공장에 마진 재조정하러 가는 길에 지혜 씨를 데리고 갈 거 같아요?”
“….”
“솔직하게 말해 봐요.”
“…뭘요?”
“아니, 지혜 씨 파리 출장 가 있는 동안 협찬 건으로 두 번이나 본사에 찾아왔더라고. 알고 있죠?”
“….”
“근데 그때 협찬받아간 제품들에 대한 영상은 아직까지 안 올라왔고.”
“왜 아직 안 올리는지 제,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물어보긴 뭘 물어봐요. 양 차장 보러 온 거겠지, 뭐.”
“…!”
“설마 지혜 씨 지금 나까지 모지리로 보는 거예요?”
“눈치… 채셨어요?”
“눈치를 못 챘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
“이상하잖아요. 지혜 씨가 일을 미루는 스타일도 아니고, 누구보다 꼼꼼하게 챙기는 사람인데 출장 가기 전에 지혜 씨 담당인 협찬 건 하나 제대로 어레인지를 안 해놓고 갔다는 게 이상하더라고. 뭐 한 번 정도였으면 로즈마리가 급하게 영상을 찍게 된 거라고 그냥 넘어가겠던데, 그 짧은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본사를 찾아왔어요. 그것도 기획 1팀 전원 출장 일정을 미리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차 팀장이 복귀하기 전에.”
“….”
“양 차장이 혼자 기획 1팀을 지키고 있다는 걸 지혜 씨가 로즈마리한테 알려줬던 거죠?”
“혹시 양 차장님도 알고 계세요?”
“그 인간은 모르죠. 모지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