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일합시다, 일
도상훈 작가와의 계약 이후 양 차장은 여섯 명의 무명 아티스트을 추가로 내게 소개했다.
작가 개개인의 프로필에 작품 이미지까지 첨부가 되어 있었다.
“여기 진현명 작가 같은 경우는 도상훈 작가가 직접 추천해 준 작가입니다.”
“아….”
“어렸을 때 같은 선생님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함께하며 그림을 배웠다고 하네요. 도상훈 작가님 말로는 자기 지인이라서 추천을 하는 게 아니라 이런 패턴을 잡는 쪽으로는 탁월한 감각을 가진 작가라서 추천을 하는 거라고 하네요.”
“지인 추천도 나쁘지는 않죠.”
내 말에 양 차장은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작가들 사이에서 폴앤크루에 관한 입소문이 먼저 나 주면 마케팅이 한결 수월해지긴 할 겁니다.”
“그러니까요. 아주 바람직하게 진행되고 있네요.”
그렇게 양 차장이 가져온 작가들의 프로필을 책상 위로 하나하나 넓게 펼쳐놓고 작품보다는 작가들의 스토리에 더 집중을 해 가며 확인을 하고 있을 때였다.
“….”
갑자기 공기가 싸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홍보팀의 지 팀장이 내 자리 파티션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그런 지 팀장을 양 차장이 특유의 까칠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파티션 너머 영업부 직원들 대부분이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내 자리 쪽을 힐긋거리는 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천천히 확인해 보겠습니다.”
난 책상 위로 펼쳐놨던 작가들의 프로필을 모은 뒤 그 끝을 책상에 툭툭 쳐서 가지런하게 만들며 양 차장에게 말했다.
양 차장은 내게 짧게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려 지 팀장을 다시 한번 쏘아보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난 가지런하게 모은 작가 프로필을 책상 한쪽에 올려놓고 지 팀장에게 물었다.
“어쩐 일이세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대답이 늦어지고 있는 거 같았다.
난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봤다.
침묵이 이어졌고, 그 침묵이 길어지는 만큼 나와 지 팀장을 몰래 훔쳐보는 시선들로 인해 공기는 더 딱딱하게 얼어 가고 있었다.
“제이드 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난 그렇냐는 식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볼펜 하나를 꺼내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폴앤크루 모델… 하겠다고 합니다.”
“잘됐네요.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수고했다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지 팀장의 눈썹 끝이 미묘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에게 할 말이 그게 끝이냐는 듯, 지 팀장은 비난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손가락을 꼼지락거렸고, 난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워 그걸 돌려가며 꼼지락거리는 지 팀장의 손가락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지 팀장의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뭐 더 보고하실 내용이라도 있으십니까?”
“….”
“바쁘실 텐데 더 보고할 내용 없으시면 가서 일 보세요.”
“저희가 제시한 금액은 1억 5천이었는데, 1억만 받겠다고 합니다. 나머지 5천만 원으로는 폴앤크루가 지원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의 창작 지원비로 사용해 달라고 하던데….”
“세상에 공짜만큼 비싼 건 없습니다. 하물며 사람 장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그쪽 대표를 직접 만나 봤는데, 사업적 선구안이 무척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취지를 찾아서 거기에 아무런 명분도 없이 기부 같은 걸 할 사람은 아닌 거 같았습니다. 폴앤크루 광고를 통해 제이드의 이미지를 5천만 원어치 더 올려달란 소리 아니겠습니까?”
“…네, 뭐 그런 뜻이겠죠.”
“조심하셔야 됩니다. 폴앤크루는 감각 있는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가치를 찾아주는 콘셉트로 가야지, 브랜드 콘셉트를 기부 쪽으로 돌려선 절대 안 됩니다. 브랜드 이미지에 기부라는 느낌이 섞여 버리면 폴앤크루와 콜라보를 하는 아티스트들이 경제적으로 궁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동정이 필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작품을 세상에 알릴 기회가 필요한 사람들이죠. 맨투맨 한 장에 300달러입니다. 어느 정신 나간 소비자가 궁한 이미지의 브랜드를 300달러나 주고 사 입겠습니까?”
“…네.”
“프로덕션한테 제이드의 이미지를 5천만 원어치 더 올려줄 수 있는 영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세요.”
“알겠습니다.”
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지 팀장은 몸을 돌리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한참 동안 날 쳐다봤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그냥 하세요, 평소처럼.”
“….”
“잘하시잖아요.”
“음….”
“…?”
“제가 경솔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왜… 저한테 사과를 하십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난 손가락 사이에 끼워서 돌리고 있던 볼펜을 책상 위로 올려놓고 다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미간을 좁히며 지 팀장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배꼽 근처로 두 손을 모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생각이 짧아서 경솔하셨던 게 아니라, 전사적 프로젝트를 앞에 놓고 일 외적인 생각만 너무 길게 하셨던 게 아닐까요?”
“….”
“일합시다, 일. 우리 딴것 하느라 아까운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회사에 나왔으면 딱 일만 합시다. 그러기만 해도 지치지 않습니까?”
“….”
“전 그런데.”
“….”
“정 에너지가 넘쳐 나시면 그 외적인 건 홍보팀 안에서 하시고요.”
“…네.”
“계속 거기 그렇게 서 계실 건가요?”
“….”
“저 지금 확인해 줘야 하는 보고서가 좀 많은데….”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뭐가요?”
“제이드요. 제이드를 1억 5천에 섭외한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걸 어떻게 자기들 스스로 1억으로 낮추게 만드셨습니까?”
* * *
3일 전 제이드 소속사의 대표실.
“돈이 없어서 1억 5천을 제시하는 건 아닙니다.”
“그걸 아니까 이렇게 같이 앉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지우한테 모리엘츠 드레스 두 시간 입히고 1억 2천을 줬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홍성이 돈이 없다니요. 그건 말이 안 되죠.”
“한지우 건은 모리엘츠였으니까요.”
“…?”
“그땐 브랜드 급에 맞는 마케팅을 해야 했습니다. 사치의 끝이 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했죠.”
황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랜드 컨트롤 기업으로서 모리엘츠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를 지켜줄 책임도 있었고….”
“폴앤크루는 뭐가 좀 다른가요?”
“많이 다르죠. 최소한 사치라는 이미지는 섞이지 말아야 할 브랜드입니다.”
“계속하시죠.”
“폴앤크루에 입히고 싶은 이미지는 사치나 명품과 같은 고급 이미지가 아니라 꿈과 열정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꿈과 열정에 소비자들이 감정 이입을 하고 자신들의 구매가 곧 누군가의 꿈과 열정을 응원하는 데 쓰여진다는 보람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겁니다.”
“꿈과 열정….”
“그 이미지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델을 찾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제이드가 후보군으로 떠오르더군요.”
“어째서죠?”
“다른 아이돌 그룹과 달리 무명 기간이 꽤 길었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
“3집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요즘 같은 시대에 상당히 특이한 케이스라고 하더라고요. 얼마나 많이 불안했겠습니까. 대표님도 불안하셨을 거고….”
“불안보다는… 접을 수가 없었던 거죠, 제 입장에선. 아이돌 하나 데뷔시키는 데, 연습생 시절부터 시작해 멤버 한 명당 1억 정도가 들어갑니다. 제이드는 저희 소속사에서 만든 첫 아이돌 그룹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멤버들 개개인의 인성, 무대 매너, 태도 등이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이 바닥에 들어와서 고생을 안 하는 애들이 어디에 있겠냐만, 마음고생이 특히 더 많았던 애들이니까, 그만큼 겸손하고 또 팬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필요한 건 화려한 지금의 제이드 인지도가 아닙니다. 저희는 그런 제이드가 뜨기 전에 매일같이 느꼈을 불안과 열망, 그리고 절실함이 필요한 겁니다. 제이드의 성공 과정은 유명하죠. 굳이 그 스토리를 따로 제작할 이유도 없고… 폴앤크루와 콜라보를 하는 작가들을 통해 제이드의 무명 시절을 오버랩시키고, 화려하게 성공한 제이드의 지금을 통해 폴앤크루와 콜라보를 하는 작가들의 미래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
“그래서 저희는 모든 광고 예산을 연예인 섭외에 다 쓸 수가 없습니다. 제이드의 과거를 따라 걷고 있는 무명 아티스트들에게도 기회를 나눠줘야 하니까요.”
“미술 작가들도 함께 광고를 찍는단 말씀이신가요?”
“저희가 소비자들에게 팔겠다고 하는 건 평범한 맨투맨이 아니라 아티스트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니까요. 그걸 어떻게 공짜로 찍자고 하겠습니까. 합당한 대가는 지불해 줘야죠.”
그리고 난 황 대표와 이야기를 끝내고 그의 사무실을 나서며 그에게 지 팀장의 명함을 전달했다.
“저희 회사 홍보팀장 명함입니다. 원래라면 홍보팀장이 같이 와서 미팅에 참석을 해야 하는데, 현재 아티스트들 섭외 건으로 정신없이 바빠서 저 혼자 왔던 겁니다.”
“네, 그렇군요.”
“멤버들과 이야기 나눠 보시고, 혹시라도 폴앤크루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으시면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 * *
3일 전 제이드 소속사 대표와 나눴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지 팀장은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제이드 섭외는 사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홍성은 이미 제이드 소속사에게 충분한 신뢰를 제공해 오고 있었고, 이번 폴앤크루 건으로 하게 된 제안은 틀림없이 제이드 이미지에 플러스가 될 거였으니까.
유럽 투어를 다닐 때 전세기를 띄우는 애들이다.
다섯 명의 멤버.
그 멤버들에게 1억 5천이 다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소속사 커미션 떼고 나면 얼마씩 돌아가지도 않을 건데, 1년에 공연 티켓 매출로만 몇백억씩 벌어들이는 애들에게 1억 5천이 돈이겠나.
그들에게 필요한 건 자기들의 이미지를 더 아름답게 포장해줄 수 있는 포장지였고, 폴앤크루는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아름다운 포장지였다.
“혹시 뭐 더 궁금하신 내용 있으세요?”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사무실 돌아가셔서 제이드 계약서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 참 그리고….”
“네, 부장님.”
“웹 디자인 팀한테 폴앤크루 플래시 배너 언제 마무리되는지 좀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
“그것도 제가 직접 물어봐야 할까요?”
“아닙니다. 확인하고 나중에 계약서 들고 올 때 같이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몸을 돌려 파티션을 빠져나가는 지 팀장.
그녀는 저 멀리 양 차장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지 팀장을 향해 양 차장 역시 함께 고개를 숙인 뒤 자기 자리에 앉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