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제가 직접 합니다
홍보팀 지 팀장이 영업부 사무실을 찾은 건 오후 3시경이었다.
정식 패드도 아니고 그저 플라스틱 파일철에 보고서 한 장을 끼워서 내 자리를 찾은 지 팀장.
안 차장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민규의 복귀 건으로 내게 짤막한 보고를 하다가 지 팀장의 방문에 잠시 자신의 순서를 양보했다.
“먼저 하세요. 전 급한 게 아니라….”
“감사합니다. 여기, 아까 지시하신 보고서입니다.”
그녀의 얼굴엔 그 어떤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마치 시위를 하는 사람 같았다고 할까.
난 그녀와 잠시 눈을 마주치며 앉은 상태에서 보고서를 건네받았고, 테이블에 그 파일철을 내려놓고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접촉을 해보셨네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난 그녀의 대답을 알 수 있었다.
형식은 갖췄지만 내용에 성의가 빠진 보고서가 그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으니까.
“….”
난 몇 줄 되지 않는 보고서를 훑어본 뒤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혹시 뭐 또 지시하실 내용 있으십니까?”
머릿속으로 재빨리 생각을 정리해 봤다.
이걸 지 팀장의 시비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님 시위로 받아들일 것인가….
난 파일철을 다시 덮어놓고 의자 등받이 깊숙하게 등을 기댔다.
그리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녀 역시 나의 이런 반응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사무적이기만 한 표정으로 나의 눈빛을 받아냈다.
“홍보팀장님.”
“네.”
“음….”
“….”
“네, 뭐 좋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팀장님.”
“네.”
“그러고 보니까 제가 지금까지 팀장님 명함 한 장 받아서 챙겨 놓지 못했던 거 같은데, 지금 명함 있으시면 한 장 얻을 수 있겠습니까?”
지 팀장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꺼낸 명함 케이스에서 명함 한 장을 뽑아, 내가 덮어놓은 파일철 위로 올려놓았다.
“그럼….”
지 팀장은 까딱하고 고개를 숙인 뒤 몸을 돌렸고, 난 그녀의 명함을 들어 한참 동안 쳐다봤다.
그러는 사이 안 차장이 슬쩍 파일철을 열어 지 팀장이 올린 보고서 내용을 확인했다.
“이야… 멋진데? 이건 뭐 그냥 대놓고 안 하겠다는 뜻이잖아? 싸우자는 거 같은데요?”
“뭔데?”
이번엔 양 차장이 내 자리로 찾아왔다.
그는 안 차장이 보고 있던 보고서를 빼앗듯 가로챘다.
“이것들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뭐 이런 싸가지 없는 것들이 다 있어?”
“양 차장님!”
양 차장은 보고서를 들고 지금 당장이라도 6층으로 쳐들어갈 기세로 몸을 돌렸다.
난 급하게 양 차장을 잡아 세웠다.
“됐어요. 그냥 가만히 있으세요. 제 역할입니다. 여기서 더 나가시면 제 입장이 뭐가 됩니까?”
“일을 이딴 식으로 하는데, 이걸 가만히 놔두실 겁니까? 이게 무슨 보고섭니까? 우리가 지금 우리 개인 사업 하는 데 홍보팀 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거냐고요. 이건 지금 대놓고 우리 영업부랑 한번 해보자는 거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영업부랑 한번 해보자는 겁니까. 절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지.”
“어이없네, 진짜….”
“타 부서 입장에선 얼마나 기회가 좋겠습니까? 짬밥 만빵이었던 박 이사님, 장 본부장님이 계셨던 시절의 영업부에게 항상 억눌려 있었다고 느끼는 모양입니다. 이참에 그동안 영업부와의 관계를 자기들 유리한 쪽으로 개선해 볼 수 있다고 기대들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부첩니까? 뭐가 즐거워서 아까부터 계속 그렇게 웃으십니까?”
양 차장은 화를 삭이기 위해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몇 년 전에 우리 영업부에 양 대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네?”
“제 입사 선배였는데, 제가 그 사람보다 팀장 승진을 조금 빨리 해버렸습니다. 근데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저랑 그 선배가 같은 팀이 되어 버렸다는 거죠.”
“그 이야기를 왜 또 꺼내십니까?”
“제가 그 선배의 팀장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그 선배 입장에선 화가 많이 났었을 겁니다. 자존심도 상했을 거고. 근데 생각을 해 보면… 그 정도 오기, 자존심도 없는 사람이랑 무슨 일을 같이 하겠습니까?”
“부장님….”
“양 차장님 말마따나 내 개인 사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사장이 아닌데 어떻게 하나하나 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골라 뽑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럴 거면 월급쟁이 관두고 사장 해야죠. 그냥 필요한 부분만 적당히 타협해 가면서 일합시다. 뭘 그렇게 타 부서 사람 때문에 열을 올립니까? 그리고 저런 사람들이 오히려 더 다루기가 쉽습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 비하면.”
“…!”
“같은 부서도 아니고 찍어 누르려면 실력으로 찍어 눌러야지 이해도 못 하는 걸 계속 주장하고 윽박을 지른다고 되겠습니까? 그럼 오히려 더 역효과만 납니다.”
“그래도 이건 어디까지나 홍보팀에서 해줘야 하는 업무입니다.”
“그렇게 못 느끼는 모양이죠.”
“하아….”
“그리고 우리에겐 그걸 이해시켜 가면서 일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보고 직접 하라는 뜻인지 거기 보고서에 제이드 소속사 대표 연락번호 적혀 있던데, 귀찮더라도 양 차장님이 접촉 한번 해 보세요.”
“우리가 직접 하자고요? 부장님, 이건 진짜 아닙니다. 엄연히 부서별 역할이라는 게 있는데….”
“그래서 싸울까요?”
“….”
“이거 무조건 너네가 해줘야 하는 일이다, 안 해주면 협조 안 해준다고 상무님께 보고 올릴 거다… 그렇게요? 저는 그냥 제가 직접 가서 1억 5천에 제이드를 잡아 올 자신은 있는데, 제 역량이 홍보팀 하나 구슬리지 못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걸 상무님께 고백할 용기는 없네요. 홍보팀 설득시켜 가며, 싸워가며 일하는 거보다 그냥 우리가 직접 컨택해 버리는 게 훨씬 더 빠를 거 같은데….”
양 차장은 체념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모델 섭외까지 직접 챙기기엔 진짜 맨파워가 부족합니다.”
“제가 말했잖아요. 1억 5천에 제이드를 잡아 올 자신은 있다고. 제가 직접 합니다. 컨택해서 그쪽 대표랑 자리만 만들어 주세요.”
다음 날 오전 11시.
난 오전 중에 처리해 줘야 할 업무만 급하게 끝내놓고 제이드가 소속된 기획사로 출발했다.
유럽을 씹어먹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K-POP 아이돌 그룹의 소속사치고는 초라한 사옥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긴 그래도 명색이 강남인데 초라하단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홍성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업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직원들의 움직임이 홍성에 비해 좀 더 자유로웠고, 급했으며, 체계적이지 못한 거 같았다.
내겐 너무나 생소해서 더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사무실 분위기였다.
더군다나 사무실까지 올라가는 동안 아무도 날 저지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혹시라도 운이 좋아 연예인을 실제로 볼 수 있을까 싶어 두리번거리고 있던 내게 많이 봐야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후드티에 무릎이 터진 청바지 차림이었다.
“홍성 인터내셔널에서 왔습니다. 대표님과는 미리 약속을 잡았습니다.”
“잠시만요.”
그는 내게 잠시만 기다려 달란 말을 남겨놓고 어딘가로 사라졌고, 잠시 후 자기 또래의 여자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여자 역시 아무리 많이 봐도 20대 후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데, 자기들끼리 실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자신을 소속사의 홍보실장이라고 소개했고, 이내 대표실로 날 안내했다.
황세일 대표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무실을 찾은 내게 눈인사를 먼저 건네놓고 손짓으로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양해를 구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우리 애들 이미지 소모시키는 일은 절대 용납 못 합니다. 정정 기사 안 올려 주시면 다른 쪽 통해서 제가 먼저 반박 기사 올려놓고 법적 대응 할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뭔가 심각한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쪽 홍보실장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내게 소파 자리를 권했고, 마실 걸 주문해 올 테니까 잠시만 앉아 있으라고 했다.
마실 걸 준비해 준다는 것도 아니고 주문해 온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저는 그냥 커피면… 될 거 같습니다.”
“아메리카노?”
“…네, 뭐. 그것도 괜찮고….”
“네, 편하게 앉아 계세요. 통화 금방 끝나실 거예요.”
“네.”
하지만 난 자리에 앉지 않고 소파 주위를 돌며 벽에 붙은 소속사 소속 연예인들의 사진을 구경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맘대로 해, 이 새끼야! 이게 지금 어디서 딜을 넣어, 딜을 넣긴, 확 그냥 씹어 먹어 버릴라….”
난 화들짝 놀라 황 대표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날 신경도 쓰지 않고 창 쪽으로 몸을 돌린 채 통화를 이어갔다.
“예전의 제이드 아니다. 가지고 놀려고 하지 마라. 애들이 착해서 이런 일 터질 때마다 대표님, 대표님… 하면서 나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고, 또 따라 주는 거지, 별난 다른 애들 같았음 진작에 개인 SNS 같은 데다가 반박글 올리고 난리 쳤어. 애들 팬들이 작정하고 너네 물어뜯기 시작하면 너네 죽어. 문 닫아야 된다고. 그러니까 딱 거기까지. 정정 기사 올리는 거로 끝내. 선 넘지 마라. 협박? 하하하… 이보세요. 대단하신 기자님. 내가 지금 협박하는 거 같냐? 걱정이 돼서 해주는 말이야. 제이드 정도 되는 애들이 소속사 대표가 하는 한마디에 눈 하나 깜빡할 거 같아? 너 이쪽 기자 밥 몇 년째 먹고 있어?”
가만히 서 있기도 민망해서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기 시작했다.
황 대표의 통화 내용을 엿들을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도 황대표는 약 5분 정도 더 흥분한 상태로 상대와 통화를 이어갔고, 그사이 홍보실장이 스타벅스 커피를 갖다주었다.
구비된 커피를 타서 마시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밖에서 사 오는 모양이었다.
이 역시 무척이나 신선했다.
잠시 뒤 통화를 끝낸 황 대표는 혼잣말을 하듯 ‘양아치 새끼들….’ 이라고 상대를 표현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뒤에야 나의 존재를 잠시 깜빡했다는 듯 서둘러 소파로 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게 바로 황 대표와의 첫 만남이었다.
우린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눴고, 소파에 앉았다.
이미 난 그와 말 한마디 섞어 보지 않았지만, 그의 통화 스타일로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날 상대로 조금 전 자신과 통화를 한 상대를 비난했다.
그리고 난 그의 비난에 적당한 추임새를 넣으며 그가 더 많은 그쪽 세계 이야기를 내게 풀어낼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쪽 바닥 일이 깔끔하지는 못합니다. 특히 강남 경찰서에 상주하고 있는 기자들이 붙으면 피곤해져요.”
“아, 거긴 또 기자들이 아예 상주를 하고 있는 모양이네요?”
“상주를 해야죠. 연예인들 사고 치면 뻔하죠, 뭐. 뛰어 봤자 강남 안 아니겠습니까?”
“아….”
“아무튼 뭐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조금 의외였습니다, 어제 연락받고.”
“네.”
“보통 광고 프로덕션을 통해 연락을 받지, 광고주로부터 직접적인 연락을 받지는 않거든요. 아예 이례적인 경우는 아닌데, 저희가 홍성이 광고주였던 일을 전혀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조금 의아했습니다. 제이드를 직접 지목하시면서 제시한 금액치고는… 좀 당혹스럽긴 했는데,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 같아서요. 홍성에도 엄연히 홍보팀이 있을 텐데, 홍보팀이 아닌 영업부 차장님이 연락을 하신 것도 좀 그랬고….”
“네, 어렵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긴 합니다. 광고 프로덕션이라는 제삼자를 통해서 저희가 기획하고 있는 폴앤크루 콘셉트를 제대로 설명드릴 수 있을까 걱정스럽기도 했고….”
“그런데 부장님.”
“네.”
“저희는 지금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거지 않습니까?”
“그렇죠.”
“저희 쪽 입장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네.”
“최근 2년간 제이드는 국내 활동 기간보다 해외 활동 기간이 두 배 정도 더 많았습니다.”
“…네.”
“보통 국내 활동도 방송 출연보다는 단독 콘서트나 광고 촬영이 대부분이고요.”
“네, 그런 거로 알고 있습니다.”
“1억 5천이라는 금액은요… 쉽게 설명해서 콘서트 입장권 수익을 제외하고 콘서트 한 번 할 때마다 판매되는 굿즈 판매 수익금 정도밖에 안 됩니다.”
“…그렇군요.”
“우리 애들 몸값이 그 정도다… 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참 이게… 우리 애들이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얼마나 희박한 확률로 지금 저 자리까지 올라가 있는 거 같습니까? 홍성이니까. 그동안 서로 좋은 관계도 계속 유지해 오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던 거지, 다른 업체였음 통화로 거절을 했을 겁니다.”
충분히 상식적인 입장이었다.
“돈이 없어서 1억 5천을 제시하는 건 아닙니다.”
“그걸 아니까 이렇게 같이 앉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한지우한테 모리엘츠 드레스 두 시간 입히고 1억 2천을 줬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홍성이 돈이 없다니요. 그건 말이 안 되죠.”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난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대충 적셔 놓고 자리를 테이블 쪽으로 좀 더 당겨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