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
기적을 나눠줘 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매번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안 된단 말부터 나올 수가 있는 거예요?”
홍성 인터내셔널 홍보팀.
홍성 본사 건물 6층에서 지원팀, 웹디자인팀, QA팀과 함께 사무실을 나눠 쓰고 있는 부서다.
팀장 포함 총 4명으로 이뤄진 소규모 부서이고, 주로 우리 영업부나 전사 운영본부의 요청으로 브랜드 로컬 모델을 섭외하거나 매거진 업체들과 접촉하는 업무를 본다.
브랜드 로컬 모델 - 일반적인 브랜드의 경우 시즌별 신상 컬렉션이 나오면 브랜드 본사에서 메인 모델을 따로 섭외하거나 혹은 전속 모델을 통해 홍보물을 만들어 보내준다.
그러면 우리 홍성과 같은 컨트롤 기업이나 혹은 브랜드 본사가 직영하는 해외 지사에서는 시즌별 카탈로그와 함께 그 홍보물을 그대로 받아 쓰기만 하면 되는 거다.
컨트롤 계약상 브랜드 본사의 컨펌이 떨어지지 않은 홍보를 단독적으로 해선 절대 안 되고, 또 아무리 오피셜적인 홍보물이라도 본사 측에서 제공하지 않은 홍보물은 사용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대형 브랜드의 경우, 혹은 대형 브랜드는 아니지만 국가별 매출에 따라 컨트롤 기업이나 해외 지사 쪽으로 추가 마케팅 비용이 내려오기도 한다.
한국에서 잘나가는 브랜드라고 해서 그 브랜드가 꼭 일본에서도 잘나가라는 법은 없는 거니까.
한국에서만 잘나가는 브랜드가 있다.
또 유독 한국에서만 안 팔리는 브랜드가 있고.
브랜드 이미지, 콘셉트에 따라 대형 브랜드임에도 국가별로 매출이 상이하게 갈리는 경우가 제법 많다.
주로 그럴 땐 브랜드 본사 측에서 총매출 기여도에 따라 매출이 높은 국가 쪽으로 추가 마케팅 비용을 보내주면서 자체 홍보를 해보라고 제안하기도 하고, 그런 제안이 없더라도 컨트롤 기업이나 해외 지사가 그런 비용을 요청해 볼 수가 있다.
그런 추가 마케팅 비용으로 우리 홍성과 같은 컨트롤 기업들은 해당 브랜드와 이미지가 어울릴 만한 국내 모델 혹은 연예인을 섭외해서 국내 패션 매거진에 싣는다든지, 혹은 PPL 광고를 해볼 수가 있는 거다.
“제가 언제 안 된다고 했습니까, 차장님. 섭외가 힘들 수도 있을 거 같다는 제 생각을 말씀드린 거죠.”
홍보팀장 지수현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특유의 표정으로 양 차장의 공격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헛웃음을 자주 터뜨린다.
마치 상대를 깔보는 듯한 웃음.
자기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하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기본기도 안 되어 있는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고뇌하는 뉘앙스가 짙게 깔린 헛웃음이다.
“아니, 그니까 왜 계속 팀장님 생각이 정답인 것처럼 말씀을 하시는 거냐고요. 안 해 봤잖아요. 해 보고 안 되는 거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하지만, 왜 해 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말을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할 수 있는 겁니까?”
“저희는 뭐 영업부에서 해달라는 건 생각도 해 보지 않고 무조건 받아서 다 쳐내 줘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뭔 소리야, 이제 와서 이건 또…. 처음 폴앤크루 모델 후보군 선정을 같이 해 보자고 요청드렸을 때 팀장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초이스만 해주면 그 초이스대로 섭외를 해주겠다고 안 하셨습니까?”
“그땐 영업부에서 폴앤크루 모델로 제이드급까지 생각하고 계신지 몰랐죠.”
“본인이 생각을 해봐도 지금 하고 계신 말에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단 생각이 드시죠?”
“아니,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부장님. 1억 5천을 주고 제이드를 쓰겠다는 게… 허허….”
지 팀장은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뜨리며 답답해 죽을 것 같다는 표정으로 대화 상대를 양 차장에서 나로 바꿨다.
다른 팀에서 파티션 너머로 양 차장과 지 팀장의 신경전을 힐긋거리고 있었다.
지 팀장이 보내는 기분 나쁜 헛웃음에 양 차장이 뭔가 공격을 시도했고, 난 재빨리 양 차장 앞으로 손을 뻗어 일단 양 차장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는 사이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양 차장의 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양 차장은 어쩔 수 없이 지 팀장을 공격하는 걸 잠시 미루고 전화를 받았다.
“어, 그래. 지금 도착하셨대? 아, 지하 주차장? 일찍 오셨네. 그래, 알았어. 지금 바로 내려갈게. 근데 가져오신 거 그거 다 혼자서는 못 옮기실 거 아냐. 남자 직원들 몇 명 추려서 차 팀장이 직접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 그래, 알았어. 나도 지금 바로 내려갈게.”
양 차장은 통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다시 매서운 눈으로 지 팀장을 쏘아봤다.
그런 양 차장의 눈빛을 응수하는 지 팀장의 눈빛 역시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도 작가님 도착하셨단 연락인가요?”
“네.”
“지 팀장님이랑은 제가 마저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양 차장님은 내려가셔서 도 작가님 맞이할 준비 해주세요. 저도 곧 뒤따라 내려가겠습니다.”
난 회의 테이블 위로 깍지 낀 두 손을 올려놓으며 양 차장을 바라봤다.
양 차장은 콧김을 내뿜으며 지 팀장에겐 인사도 건네지 않고 자리를 떴다.
“진짜 양 차장님 요즘 너무 예민하신 거 아닌가요? 제가 무턱대고 안 된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영업부에서 제시할 수 있는 예산으로 제이드급을 섭외하는 건 좀 힘들 수도 있을 거 같단 말을 한 건데, 그게 그렇게까지 흥분할 일이었나요? 양 차장님 히스테리가 늘었다는 이야기는 저도 뭐… 이리저리 전해 듣긴 했지만, 좀 심한 거 같네요. 제가 영업부 사람도 아니고….”
“음… 홍보팀장님.”
난 지 팀장님이란 호칭 대신 홍보팀장님이라는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
“네.”
“제가 봐도 조금 전엔 양 차장님이 조금 과한 반응을 보인 거 같긴 한데… 그… 히스테리가 아니라 그동안 쌓였던 게 오늘 이렇게 터진 거 아닐까요?”
“그동안 쌓였던 거라니요?”
“홍보팀장님이랑 같이 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기껏 올려놓은 텐션이 한순간 떨어지는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지 팀장이 다시 한번 헛웃음을 흘리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정작 폴앤크루 건으로 맨땅에 헤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 영업분데, 어째서 홍보팀이 우리 영업부 때문에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것처럼 입장을 취하시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요?”
“….”
“홍보팀장님이 미팅에 참석하지 않으셔서 그냥 영업부 안에서 제이드를 모델로 세우자는 의견을 냈죠. 예상하고 있는 금액은 1억 5천 정도. 그럼 일단 홍보팀은 그 금액을 들고 제이드 소속사와 접촉을 해 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해 주시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그게 어렵습니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접촉을 해보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그럼 해보세요. 그럼 그쪽에서 무슨 말이라도 대답이 나오겠죠. 장난하냐, 어림없다, 스케줄 빼기가 힘들다… 직접 거절을 하든, 아님 기분 안 상하게끔 돌려서 거절을 하든 뭔가 피드백을 줄 게 아니냐고요. 하다못해 홍보팀장님이 평소 잘하시는 헛웃음을 흘릴 수도 있는 거고.”
지 팀장은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는 표정으로 파티션 너머 자기 팀 팀원과 눈을 마주쳤다.
난 그런 지 팀장의 태도를 애써 무시한 채 할 말만 전달했다.
“그럼 홍보팀은 상대의 대답을 영업부에 전달만 해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부장님. 홍보팀은 영업부 산하 부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장씩이나 되는 제가 직접 여기까지 올라와서 양 차장님의 요청에 힘을 실었던 거란 생각은 안 드세요? 영업부가 홍보팀을 영업부의 산하 부서로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홍보팀이 영업부를 홍보팀 산하 부서쯤으로 생각하고 아이디어 만들어 와, 만들어 온 아이디어 평가 정도는 해줄게… 하는 식으로 대한다는 생각이 드는 건… 저만의 착각인 거겠죠?”
“…!”
“지금 뭔가 폴앤크루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셔서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신 거 같아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폴앤크루는 영업부 단독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전사 운영본부가 기획했고 상무님이 지휘하셨던 홍성의 전사적 프로젝트죠. 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지휘권을 상무님이 저에게 주셨고요.”
“….”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냥 뭐… 그렇다는 겁니다. 영업부 입장에선 앞으로 이 프로젝트를 치고 나가는 과정에서 싸워야 할 상대가 계속 생겨날 건데, 첫발을 내딛는 시점에서 벌써부터 홍보팀이 이렇게 친절하게 거들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홍보팀의 협조가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 다른 부서라고 친절하게 요청을 할 일은 아닌 거 같고… 제이드 측과 접촉해 주세요. 영업부장으로서 하는 요청이 아니라 폴앤크루 프로젝트 총괄 책임자로서 내리는 지시입니다. 영업부에서 제시하는 금액으로 접촉을 해보시고 상대가 어떤 피드백을 주는지 보고서 만들어 올리세요. 언제까지 가능하겠습니까?”
“….”
“지금 바로 접촉해 보겠단 대답을 기대한 제가 어리석은 거겠죠?”
그리고 난 지 팀장과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타 부서 사람들과 천천히 눈을 맞췄다.
한 명, 한 명….
그들에게 비록 아직 영글지 못했지만, 원래 홍성에서 영업부장이 가지는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금 보여주기 위해.
그런 다음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는 지 팀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전… 그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랬다.
아직 타 부서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엔 인정보다는 불신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고 있다.
그 불신엔 초고속 승진으로 자기들보다 늦게 입사를 했음에도 벌써 부장 타이들을 달고 있는 나에 대한 질투심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걸.
그 불신이 영업부로 옮겨붙는 걸 막아야 했다.
그 불신이 영업부를 만만하게 봐도 되는 계기를 제공해선 안 되는 거니까.
난 홍보팀 사무실을 나와 도 작가를 만나기 위해 미리 예약해 놓은 회의실로 내려갔다.
포니테일 헤어스타일에 고글 같은 굵은 검은 뿔테를 쓴 남자가 회의실에 앉아있었다.
난 통유리벽을 통해 회의실 안의 상황을 대충 확인한 다음 회의실 문을 노크했다.
내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도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양 차장과 차 팀장, 그리고 이지혜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도 작가 역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홍성 인터내셔널 영업부의 공은태 부장입니다.”
준비한 명함을 전달한 뒤 도 작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 작가는 이런 오피셜한 미팅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지, 내가 건넨 명함을 보지도 않고 재빨리 안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내 손을 잡았다.
“도상훈입니다. 이지혜 대리님 통해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부족한 그림인데, 한 점도 아니고 다섯 점이나….”
“감사하단 인사는 저희가 드려야죠. 이렇게 좋은 작품들을 저희가 제시한 금액에 선뜻 주겠다 하셔서 한편으로는 감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더 높게 가격을 측정해 드리지 못해 죄송하고… 그렇습니다.”
“아닙니다. 물론 돈도 중요하죠. 그게 있어야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 같은 무명작가들에게 지금 당장 가장 절실한 건 누군가가 내 작품을 이해해 주고 또 알아봐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어떻게 돈으로 환산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껏 작가님의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던 게 아니라 안타깝게도 작품을 알아봐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노출을 시켜 볼 기회 자체가 없었던 거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저희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작가님뿐만 아니라 작가님처럼 아직 노출의 기회를 잡지 못한 다른 작가님들을 응원하고 또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무명작가들의 수준 있는 작품들과의 콜라보를 통해 폴앤크루를 마케팅해 보겠다는 아이디어는 갑자기 스치고 지나간 나의 지난 세월에서 출발했다.
오래전 난 이미 알을 깨고 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랬던 거 같다.
자만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껏 내가 팀장 시절을 거쳐, 차장, 부장을 달기까지의 지난 몇 년을 되돌아보면 로또 당첨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운이 따랐던 적은 크게 없었던 거 같다.
단순히 회사 일에 한해서만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지나온 지금의 난 알고 있다.
로또라는 운, 기회, 혹은 기적이 없었더라도 분명 언젠가는 스스로 알을 깨고 부화를 했겠지만, 그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무척 길었을 거라는 걸.
로또는 내게 내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알에 금을 만들어준 존재라고 본다.
그래서 무명작가들의 작품들과의 콜라보를 통해 폴앤크루를 띄워 보겠다는 아이디어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홍성의 투자로 무명작가들이 갇혀 있는 알에 약간의 금만 만들어주면 될 거 같았으니까.
물꼬를 틔워 준다는 것.
그걸 한번 해 보고 싶었다.
내게 로또라는 기적이 찾아왔듯, 그 기적이 절실한 사람들을 찾아서 내가 경험해 본 기적을 나눠줘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