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공 부장님도 같이 가면 참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상무님과 장 본부장의 차도 보였다.
내가 평소보다 늦게 출근을 한 게 아닌데도 나보다 먼저 출근을 한 상무님과 장 본부장.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침 일찍 형과 함께 회사에 온 상무님의 동생….
“나중에 차 빠지면 바로 연락 줄게요.”
“아니에요,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하룬데 뭐 어떻습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난 다시 차에 올라 임원 주차 공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빈 주차 공간을 찾아 헤맸다.
상무님 동생의 등장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사실은 신경이 쓰였다.
그냥 궁금했던 거 같다.
일전에 상무님이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동생이 현재 외국에서 공부 중인데 조만간 졸업을 하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될 거라고.
졸업 후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도와주고 싶다고 했던 상무님의 말이 떠올랐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가 동생에게 해주고 싶은 이상일 뿐이고, 홍성 정도 되는 회사를 형, 동생이 사이좋게 이끌어가면 그것보다 보기 좋은 그림이 어디에 있을까.
장 본부장 역시 상무님의 동생이 학교 졸업을 하는 대로 아마 회사에 들어와 일을 배우지 않겠냐며 나와 비슷한 예상을 했었다.
“오셨습니까.”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안 차장이 날 따라오며 차장 미팅 준비를 끝내놓았다고 말했다.
양 차장은 아래층 회의실에 먼저 내려가 있다며 김 차장에게만 호출을 해서 바로 회의실로 내려오게끔 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 바로 내려가자며 김 차장에게 호출을 넣으라고 했다.
로즈마리가 홍성 본사를 찾아오기로 한 날이었다.
이미 전날 각 차장들에게 로즈마리의 홍성 방문 일정에 대해 전달을 했었다.
로즈마리와의 약속 시각은 오전 10시.
그때까지 나와 각 차장들은 로즈마리에게 제안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영상 소스들을 추려보기 위한 간단한 미팅을 가졌다.
그렇게 모닝커피와 함께 무겁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아이디어를 주고받는 미팅이 진행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의실 문을 조심히 열며 이지혜가 회의실 안으로 고개를 살짝 집어넣었다.
“오셨어요.”
나와 각 차장들을 하던 회의를 잠시 멈추고 로즈마리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지혜가 로즈마리를 데리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고 난 김 차장부터 차례대로 양 차장, 안 차장을 로즈마리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그럼 전 나가 있겠습니다.”
“지혜 씨도 나중에 점심 같이 가는 걸로 해요.”
“네, 알겠습니다. 이야기 끝나시면 연락 주십시오. 바로 내려오겠습니다.”
그렇게 이지혜가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난 최대한 로즈마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스크린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가장 상석을 그녀에게 양보한 다음 안 차장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안 차장이 나란히 앉고 김 차장과 양 차장이 나란히 앉아서 가장 상석에 앉힌 로즈마리를 바라볼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이지혜 대리가 그러더라고요.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들의 디너 파티에도 관심이 있으시다고.”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로즈마리와 함께 유럽 일정을 끝내고 돌아온 이지혜는 그 일정 동안 로즈마리와 개인적으로 많이 가까워져 있었고, 그녀가 앞으로 만들어보고 싶어 하는 영상들에 대해 양 차장에게 보고를 했었다.
그리고 그 보고를 양 차장을 통해 전달받은 난 홍성이 가진 소스라면 얼마든지 그녀의 채널을 도와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이건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들을 패션 가이드 로즈마리 채널을 이용해 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
로즈마리 채널을 이용한 홍보는 폴앤크루 한 번이면 족하다.
명품은 명품이 어울리는 마케팅을 해야한다.
아직 세상에 노출되지 않은 폴앤크루니까 내가 로즈마리 채널에 집중을 했던 거 뿐이다.
거기다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명품 브랜드들은 별도의 추가 노출이 필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홍성이 추가 마케팅 예산을 사용해가며 띄워줄 이유가 없는 브랜드들이었다.
“기회만 된다면 브랜드별로 행사에 참석해서 그 고유의 파티 느낌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파티마다 느낌이 다 다르겠죠?”
로즈마리의 질문에 김 차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브랜드가 가진 고유의 색깔에 맞춰 셀럽들을 초대하고 행사를 진행하다 보니 행사의 콘셉트나 그 행사에 초대받아서 오는 셀럽들의 연령대도 다 다르죠.”
“그런데 진짜 제가 참석만 하겠다고 하면 초대장을 받을 수 있나요?”
김 차장이 사람 좋은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현재 영업 마케팅부가 컨트롤하고 있는 세계 유명 브랜드들의 브랜드 로고가 정리된 표를 스크린 위로 띄웠다.
“현재 저희가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들 중에 저기 빨간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 브랜드는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브랜드들이고 또 초록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 브랜드는 매 분기 스탭 트레이닝을 실시하는 브랜드들이에요. 그리고 빨간색, 초록색이 동시에 표시되어 있는 브랜드는 둘 다 진행을 하는 브랜드이고.”
“우와… 이 브랜드들을 다 홍성이 컨트롤하고 계시는 거예요?”
로즈마리는 김 차장이 스크린에 띄운 브랜드 리스트를 살펴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단독 라이선스 계약으로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가 이 정도고 그 외 편집샵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브랜드들은 만토바라는 지역과 링겐이라는 지역을 대표하는 1차 벤더를 통해 유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안 차장이 스크린에 만토바를 통해 홍성이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 리스트를 띄웠다.
로즈마리는 한층 더 놀라며 눈을 감았다 떴다.
“정말 대단하군요. 최소한 유럽 명품 시장에 한해서만큼은 절대적이네요.”
그래서 내가 말했다.
“뉴욕 쪽 명품 브랜드들을 제외하고는 현재 국내에선 홍성이 대다수의 브랜드들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만약에 아이템 섭외가 잘 안 되시거나 혹은 신상 리뷰를 하고 싶은데 리뷰할 때마다 아이템 섭외하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이지혜 대리 통해서 편하게 협찬받으세요.”
“정말요? 정말 그렇게 해도 되나요?”
“판매를 해야 하는 매장 제품들은 안 되고, 만토바 제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창고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디피 제품들은 얼마든지 영상 촬영하는 데 가져다 사용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가 제안드린 내용들은 그냥 편하게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보시다시피 현재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브랜드들은 굳이 별도의 홍보가 필요 없는 브랜드들입니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그럼에도 로즈마리 채널이 관심만 있다고 하시면 저희 쪽에서 이 브랜드들이 여는 각종 파티에 로즈마리 채널을 VIP로 초대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 어떤 영상을 만드시더라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를 하지 않겠습니다.”
“저한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시는 이유가…”
“없습니다.”
“…?”
“이유 같은 거 없습니다. 그 이유를 꼭 만들어낸다면… 너무 감사하고 또 죄송해서요.”
“…뭐가요?”
“이번에 폴앤크루 건으로.”
“에이, 제가 어디 공짜로 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한순간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고 또 한순간 그 상황이 역전이 되고… 글쎄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상황을 아주 세련되게 극복하시는 모습을 보고 저희 모두 로즈마리 채널의 팬이 되었습니다. 하하하… 앞으로 좀 더 좋은 영상, 유익한 영상을 많이 만들어주세요.”
“…네.”
로즈마리는 홍성이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들로 앞으로 좀 더 자신의 채널을 알차게 만들 수 있을 거란 기대에 들떠 있었고, 나를 비롯해 자리에 모인 차장들은 그런 로즈마리의 솔직한 반응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미팅이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장 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죄송합니다. 이야기들 나누고 계세요. 나가서 전화 좀 받고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난 회의실을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네, 본부장님.”
-상무님께서 오늘 점심이나 같이하자고 하시는데?”
“점심이요? 아이고… 어떻게 합니까? 지금 로즈마리가 회사에 와 있습니다.”
-아, 그래?
“네, 안 그래도 지금 미팅 중이었습니다. 점심이라도 제대로 대접 한번 해야 할 거 같아서요.
아마도 상무님과 같이 있는 모양이었다.
상무님에게 현재 로즈마리가 홍성 본사에 와 있다는 걸 전달하는 장 본부장의 목소리가 그대로 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 수 없죠.
순간 난 상무님이 자신의 동생을 나에게 소개시켜 주려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봤다.
그래서 조금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로즈마리와의 약속이 먼저였는데.
장 본부장과 통화를 끝내고 다시 회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양 차장이 폴앤크루 리뷰 영상을 어떤 식으로 촬영할 것인지에 대해 로즈마리에게 묻고 있었다.
그에 대해 로즈마리는 솔직하게 리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패션 가이드 로즈마리 채널의 유일한 무기라면서 말이다.
“브랜드 역사가 없다는 부분을 생략하고 싶지는 않아요. 보통 협찬 리뷰 영상을 찍을 땐 단점은 최대한 숨기고 장점만 부각을 시키는 게 맞는 거긴 한데… 사실 제가 폴앤크루 리뷰 영상을 그렇게 찍어버리면 오히려 더 어색하지 않을까요?”
“편하신 대로 하세요.”
내가 말했다.
“저희는 로즈마리 님의 센스를 믿습니다.”
로즈마리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이지혜를 불러서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회사 근처 잘하는 한식당이 한 군데 있다.
가격대가 제법 높아서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고, 회사에 손님들이 찾아오거나 혹은 접대할 일이 있을 때 주로 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로즈마리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며 회의실에서 미처 나누지 못했던 사업에 관련된 이야기를 이어서 했다.
한식당 앞에서 로즈마리와 헤어진 뒤 회사로 복귀를 했을 때였다.
회사 로비였다.
“상무님 나오시네요.”
김 차장이 귓속말로 내게 말했다.
저 멀리 엘리베이터 쪽에서 상무님과 장 본부장이 함께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상무님의 동생으로 짐작되는 젊은 친구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참 공교롭게도 점심시간대라 본사 로비는 한산했고, 그런 한산한 로비 중간에서 상무님 일행과 마주쳤다.
우리 일행은 일제히 상무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지금 점심 먹고 들어오시는 길이세요?”
상무님이 물었고, 난 그의 동생을 살짝 훔쳐보며 대답했다.
“네, 이제 식사하러 가는 길이십니까?”
“아쉽게 됐네. 공 부장님도 같이 가면 참 좋을 건데…”
상무님의 입에서 공 부장이라는 소리가 나오는 순간 상무님의 동생이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로즈마리랑 회사에서 미팅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난 그런 것도 몰랐네. 그런 것도 모르고 날을 오늘로 잡아버렸어.”
“…”
“뭐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그렇게 상무님의 자기 동생의 어깨에 두어 차례 툭툭 두드리고는 날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뒤 걸음을 옮겼다.
그런 상무님과 장 본부장을 향해 우리 일행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깊게 숙였다.
“…?”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상무님과 장 본부장보다 두어 걸음 뒤처져서 걷고 있던 상무님의 동생.
그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춰 세우더니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