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전 허언증 환자입니다
난 곧바로 양 차장을 불렀고, 며칠 전 기사를 올렸던 곳을 통해 다시 한번 기사를 띄우라고 지시했다.
“최대한 빨리 올라올 수 있도록 하세요. 모리엘츠를 저격했던 채널들이 다른 영상을 올리기 전에.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용은요?”
“뻔하죠.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로즈마리가 프랑스 파리에서 이런 영상을 만들어 올렸다. 이 영상을 통해 일전에 모리엘츠 리뷰 영상을 저격했던 채널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로즈마리 사진은…”
“당연히 폴앤크루를 입고 있는 사진으로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아까 영상 보니까 시테섬으로 가는 유람선 안에서 폴앤크루가 자세하게 노출되던데, 그걸로 캡처 떠서 사용해 달라고 요청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요.”
“금방 올라올 겁니다.”
“일단 그거부터 처리해놓고, 지난 며칠간 잠실점에서 올라온 폴앤크루 매출 좀 요일별로 끊어서 갖다주세요.”
“네.”
그렇게 난 내가 가진 모든 집중력과 에너지를 폴앤크루에 쏟아붓고 있었다.
더는 볼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스마트폰으로 로즈마리가 올린 이번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해봤다.
-갓즈마리!
-우와… 이렇게 정성 들인 영상이라니. 이런 게 바로 클라스라는 거지. 암…
-유튜브 영상을 이렇게 잘라서 올리는 법이 어딨어요? 얼른 모자이크 벗겨서 누군지 보여달란 말이야!
-이걸 여기서 끊는다고? 아니지? 바로 다음 편 올려줄 거지?
-다행이네요. 지난 며칠 걱정 많이 했습니다.
-유튜브에 댓글 달아보기는 또 처음이네. 항상 조용히 응원하고 있습니다. 좋은 영상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쯤 되면 진짜 팝콘각인가? 우리 갓즈마리 저격한 놈들이 앞으로 어떤 영상 만들어 올릴지 벌써부터 기대되네.
-나도 그럼. 난 갓즈마리 다음 영상들보다 우리 갓즈마리 저격한 채널들의 다음 영상들이 더 기대됨.
그래서 나도 조심히 댓글을 하나 달았다.
-팬입니다. 시테섬으로 가는 유람선 안에서 입고 있던 맨투맨 티가 참 예쁘네여. 무슨 브랜드인지 좀 알 수 있을까요?
바로 그때였다.
“뭐 합니까?”
언제 왔는지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 안 차장이 물었다.
“아, 놀래라!”
“헐… 이거 지금 부장님이 다신 댓글이죠?”
“뭐, 뭐요? 뭐가? 내, 내가 댓글을 달긴 뭔 댓글을 달았다고 그래요?”
“대박….”
그러더니 자기 스마트폰으로 로즈마리 채널을 찾아 들어가는 안 차장이었다.
“팬입니다? 크크크….”
“그만하세요.”
“시테섬으로 가는 유람선 안에서 입고 있던 맨투맨 티가 참 예쁘네여. 여기서 여는 또 뭡니까 냄새나게.”
“무슨 냄새요?”
“아재 인증합니까?”
“크흠… 내가 뭐 아재지 안 그럼 뭡니까?”
“아니 쓸 거면 처음부터 끝까지 여, 요 다 통일을 해서 쓰든지… 쯧쯧쯧…. 잘 보세요, 어떻게 달아야 되는 건지.”
난 안 차장 뒤로 서서 그의 손가락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는 댓글을 넋 놓고 구경했다.
-파리가 날씨가 좋긴 좋은 모양이네. 저렇게 입고 다니면 안 춥나? 근데 그 와중에 맨투맨 티 예쁜 거 좀 보소. 저거 어디 꺼임?
안 차장은 댓글을 달아놓고 마치 자기가 승자인 것처럼 여유 있는 미소를 흘렸다.
“이 정도는 달아야죠.”
“아무리 봐도 내가 단 댓글이 더 나은 거 같은데요?”
“진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라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겁니다.”
로즈마리는 해당 영상 속에서 말로 그 어떤 해명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영상에 담긴 그녀의 파리 일정이 모든 걸 다 해명해 주고 있었다.
특히 모리엘츠 매장 방문이라는 카드, 그리고 모자이크 속에 숨어 있는 타미 총게라는 존재의 궁금증만으로도 그녀는 허언증 환자가 아니라는 걸 완벽하게 증명해내고 있었다.
아직 스위스 바젤에서 열릴 모리엘츠 전시에는 참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올린 영상으로 미뤄 보건데 타미 총게와 미팅을 가지고 곧바로 바젤로 넘어가 모리엘츠 전시 상황을 영상으로 담아서 함께 붙여 며칠 내로 다음 영상을 올릴 것으로 보였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즈음이었다.
-부장님. 기사 떴습니다. 확인 한번 해보시죠.
양 차장으로부터 사내 메신저로 쪽지가 왔다.
난 양 차장이 걸어준 링크를 클릭해서 기사들을 확인한 뒤 팀장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 글을 하나 올렸다.
-로즈마리 관련 기사가 새롭게 떴습니다. 다들 조금씩만 시간을 할애해서 그때처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퍼뜨려 주시고 퇴근들 합시다. 좋은 저녁들 보내시고요.
로즈마리가 모리엘츠 리뷰 영상을 올린 이후 거의 처음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을 했던 거 같다.
앞으로 전개될 장면들이 벌써부터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정말 오랜만에 뭔가에 과몰입을 하게 됐던 지난 며칠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극성으로 응원해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난 로즈마리를 일을 떠나 개인적으로 응원했던 거 같다.
다음 날 아침이었는데, 로즈마리를 가장 처음 저격했던 유튜버가 <대한민국 기레기들의 특징>이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영상을 하나 올렸다.
마침 난 그 채널을 구독하고 알림 설정까지 해놓은 상태였기에 그 영상이 가장 따뜻할 때 확인할 수 있었다.
“다소 자극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기레기라고 표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니 무슨 로즈마리 님 덕분에 나까지 덩달아 스타가 되게 생겼어? 제가 전에 올렸던 영상. 그 영상으로 지난 며칠간 모리엘츠 4억짜리 컬렉션이 상당히 핫이슈였죠? 어제 추가 기사가 뜬 이후에 로즈마리 님은 검색 엔진에 실검 순위에도 올라갔더만? 이쯤 되면 이거 뭔가가 있다고 의심을 해봐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합당한 의심 아니겠냐고. 아니 어떻게 저랑 로즈마리 님이 직접적인 감정싸움을 한 것도 아니고, 전 분명히 이전 영상에서도 밝혔지만 패션 가이드 로즈마리 채널이 하꼬 유튜브였을 때부터 그 채널의 팬이었어요. 그런데 그 채널에 올라왔던 모리엘츠 리뷰 영상에 많은 사람들 이게 진짜일까 주작일까 하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고, 그 채널의 팬의 입장에서 전 제 개인적인 생각을 밝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뉴스 기사에 저랑 로즈마리 님을 갈등 대립 구도로 잡아놓고기사를 갈겨 쓸 건덕지나 되는 겁니까? 하여간 대한민국 기레기들 대단합니다, 대단해.”
그 영상의 내용을 대충 이랬다.
자기는 로즈마리를 직접적으로 저격하려고 했던 게 결코 아니었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부분을 합당한 의심을 통해 자신의 채널에서 자유롭게 말했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 아니냐.
자유 민주주의가 뭐냐.
생각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어떻게 이 나라 대한민국은 개개인이 가진 생각의 자유, 표현이 자유까지 언론이 통제를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자신이 올린 영상으로 인해 로즈마리의 모리엘츠 리뷰 영상이 이슈가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슈가 되면 결과적으로 로즈마리에게 좋은 거 아니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것도 여러 기사에 자신이 노출된 점에 대해서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한다.
고의로 자기와 로즈마리를 갈등 대립 구도로 잡아놓고 몰아가는 식의 기사는 정당하지 않으며, 이 부분에 대해선 반드시 책임을 물을 생각이다.
갑자기 힘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이런 아무런 논리도 근거도 없는 놈이 펼친 선동으로 인해 어느 누군가가 궁지에 몰리고 또 몇 날 며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는 사실이 참 기가 막혔다.
이것만큼 내로남불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기는 자기 영상 만들 때 그 영상의 섬네일에 로즈마리 사진을 포토샵 해서 누가 봐도 로즈마리인 걸 알아보게 사용해 놓고 다른 사람이 하는 건 언론이 가진 힘으로 개인이 가진 생각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수작이 되는 거구나…
말도 안 되는 해명, 그리고 해당 기사를 만들어 올린 기자들을 비난하며 함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그의 모습에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래서 또 그 영상에 댓글을 달았다.
-그동안 팬이었는데, 이번 영상으로 실망이 참 크네여. 구독 취소합니다. 앞으로는 양심적인 영상 활동 해주시길 바랍니다. 물론 전 더 이상 안 볼 거지만.
그로부터 3일 뒤…
이지혜와 로즈마리가 유럽 일정을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날이었다.
로즈마리는 이틀 사이에 영상을 두 개나 연이어 올렸다.
하나는 <명품들의 명품 모리엘츠>라는 제목의 영상이었고, 다른 하나는 <저는 허언증 환자입니다>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첫 영상을 전날 밤늦게 올려서 두 번째 올라온 영상과 함께 연이어 볼 수 있다는 짜릿한 설렘까지 들 정도로 어느새 난 그녀의 새 영상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리는, 말 그대로 덕질을 하고 있는 날 발견하고 사실 속으로 살짝 놀랐다.
예상했던 대로 모리엘츠 관련 영상은 모자이크로 얼굴을 가렸던 타미 총게를 모자이크 없이 보여주며 소개를 하면서 시작된, 모리엘츠를 위한 모리엘츠만의 영상이었다.
모리엘츠 본사에서 타미 총게와 간단하게 인터뷰를 하며 그 인터뷰에서 모리엘츠의 역사, 그리고 현재 집중하고 있는 시장, 주요 타깃층, 상상을 초월하는 높은 가격이 형성되는 이유와 과정 등을 아주 자세하게 다뤘다.
그리고 타미 총게로부터 자신이 리뷰했던 해당 영상을 보여주며 그 옷이 진품이라는 대답까지 자연스럽게 이끌어냈다.
곧바로 열차를 이용해 바젤로 이동을 하면서 열차 밖으로 펼쳐지는 스위스 풍경을 영상에 담기도 했고, 유로화와는 다른 스위스 프랑을 짧게 소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젤로 넘어가서 모리엘츠 전시 행사에 VIP로 초대받았다며, 로즈마리라는 영문이 고급스럽게 새겨진 초대장도 보여주었다.
그뿐 아니라 준비되어 있는 디너 테이블을 카메라에 담으며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 올려진 테이블 냅킨을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했다.
“정말 디테일이 장난이 아니죠? VIP로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따로 디너가 마련되는데, 저한테 배정된 자리로 와 보니까 이렇게 로즈마리라고 제 이름을 수놓아놓은 테이블 냅킨이 자리에 올려져 있네요. 이거 나중에 식사 끝내고 기념으로 가져가도 되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그런 거 물어보면 촌스럽다고 속으로 욕할까요? 하하하….”
화려함의 끝을 보여주는 행사였다.
나도 내년쯤 시간이 나면 한번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화려하게 준비되어 있는 행사였다.
그 행사장에서 로즈마리는 샴페인 잔을 들며 이곳저곳을 누볐고, 또 당연히 중간에 이지혜의 통역이 있었겠지만, VIP로 행사에 초대받아서 온 유러피안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꽤 자주 잡혔다.
모리엘츠 측으로부터 표창장이라도 하나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촬영부터 편집까지 상당히 많은 신경을 쓴 영상이었다.
그리고 다른 영상 하나.
<저는 허언증 환자입니다>
난 앞선 영상에 댓글을 달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영상을 클릭했다.
그 영상 속 로즈마리는 거의 잠옷에 가까운 편안한 복장으로 자신의 스튜디오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거기다 평소와 다르게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민낯이었다.
리뷰할 제품을 따로 준비한 거 같지도 않았다.
“노 메이크업으로 카메라 앞에 서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네요.”
그 영상에서 발랄한 로즈마리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두 시간 전에 한국에 도착했고, 몸은 상당히 피곤한데 한 며칠 나가 있었더니 시차 적응이 안 돼서 아무래도 쉽게 잠들지 못할 거 같네요. 그냥 그래서요. 이번에 며칠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일로 제가 한국에서 크게 이슈가 됐었잖아요. 마음이 많이 안 좋더라고요.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하고 있는 패션 가이드 로즈마리 채널 콘셉트가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절 허언증 환자로 만들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자리를 빌어서라도 저의 모습을 한 번쯤은 있는 그대로 보여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비록 화장은 하지 않았지만, 조명이 좋아서 그런지 노 메이크업이더라도 그 나름의 매력이 돋보였다.
청순한 느낌도 살짝 들었고, 오히려 화장을 했을 때보다 더 어려 보이기까지 했다.
“제가 유튜브 활동을 시작한 지 이제 꼬박 7개월 정도 되는데, 그동안 많은 분들이 제가 고가의 명품들을 리뷰하다 보니까 금수저일 거다… 부터 시작해서 텐프로 출신일 거다, 스폰이 있을 거다 등등…. 저란 사람에 대해 다양한 추측들을 하고 계시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저에 대해 있는 그대로 다 보여드리고 앞으로는 좀 더 솔직한 영상을 만들어나가겠다고 약속을 드리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렇게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다른 영상들과는 달리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영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지루하거나 무겁지 않고 그 나름의 흥미가 생기는 영상이었다.
자기 말로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카메라 앞에 앉았다고 하지만, 내 눈엔 완벽한 준비를 하고 카메라 앞에 앉은 거 같았다.
확실히 콘셉트를 잡는 센스가 대단하단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저는 평범한 집에서 태어난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입니다. 학교에 가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건 좋아했지만, 공부하는 건 죽도록 싫어했고, 그래서 가까스로 대학은 졸업했지만 전공을 살려볼 생각도 해보지 않고 그냥 학교 다니면서 만들어 놓은 스펙 같지도 않은 스펙으로 마음 편하게 들어갈 수 있는 회사를 선택해서 취직을 했어요. 그런데 첫 직장에서 바로 위 상사와의 불화로 1년도 못 채우고 회사를 그만뒀었죠. 그때 제가 다녔던 회사가 바이럴 광고와 관련된 작은 외주 회사였어요. 사무직이 저한테는 적성에 잘 안 맞는 거 같더라고요. 어쩌면 회사라는 집단에 흡수되는 거 자체를 제가 잘 못 했던 걸 수도 있고요. 여러분들도 제가 만든 영상들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전 매사에 업이 되어 있는 사람인데 회사는 저 같은 사람을 눈치 없는 사람,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사람, 개념 없는 사람, 낄 데 안 낄 데 분간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녀의 다른 영상들을 볼 때와는 달리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지는 영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이만큼 흘러 그때의 절 되돌아보면 어쩌면 그 회사가 맞았던 거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후로도 몇 번 더 회사를 옮겼는데, 가는 곳마다 거의 똑같은 이유, 상사와의 갈등, 동료와의 갈등, 급기야 직장 따돌림 등의 이유로 퇴사를 했거든요. 한 곳에서 2년을 넘겨본 적이 없어요. 사무직으로 제일 길게 일했던 곳이 1년 5개월인가? 아마 그럴 거예요. 그래도 용케 취직은 잘했죠. 그런데 나이는 계속 차고 또 다녔던 회사들마다 근속 기간이 짧다 보니까 점점 제가 갈 수 있는 곳이 줄어들더라고요. 그러다 사촌 언니의 소개로 백화점에 있는 한 명품 브랜드 매장에서 처음으로 매장 일이라는 걸 배우기 시작했죠. 그런데 이게 제 적성이었던 거예요. 나이가 차면서 마음이 급해지다 보니 현실에 적성을 맞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별 어려움 없이 그곳에서 4년을 넘게 일했죠. 그러다 저도 모르는 사이 명품 세상에 눈을 뜨게 되고, 월급을 받을 때마다 하나둘씩 사서 모으게 되고… 이게 일하는 게 재미가 있다 보니까 실적도 금방금방 오르고, 그래서 일하는 동안 우수 판매사원상을 두 번이나 받았어요.”
역시였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가 명품을 리뷰하는 영상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그녀의 모습에서 매장 직원들이 명품을 대하는 자세와 또 그 명품을 고객들에게 소개하는 모습이 겹쳐 보였었다.
“저보고 된장이다, 그 나이 먹은 거치고 참 생각이 없다… 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는데, 전 제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명품을 사서 모으는 게 저에게 없는 뭔가를 스스로의 힘으로 채우는 기분이 들었어서 참 좋았어요. 그래서 내 지난 몇 년의 세월 동안 그렇게 명품에 집착해서 살았던 걸 아직 후회를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오히려 채널이 이만큼 커버린 지금은 그때의 저에게 매일매일 고마울 뿐이고요. 매장에서 일하는 동안 인센티브 포함해서 남들보다 많이 벌기도 벌었지만, 애초에 결혼엔 관심이 없었기에 더 여유 있게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잘 다니고 있던 매장에서 이번엔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랑 트러블이 생기네요? 정말 말하기도 유치한 이유였는데, 한마디로 제가 너무 매장을 휘젓고 다닌다는 게 당시 신입들의 불만이었고, 매니저가 그쪽 손을 들어주더라고요. 직접적인 해고는 아니었지만, 분위기상 다들 제가 알아서 그만둬 주길 바라는 거 같았어요.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사람이니까, 저도… 저는 매장에서 고객들을 만나고 또 제가 제안하는 컬렉션을 고객이 선택할 때, 마치 제가 그 아이템을 선택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거든요. 단지 그 이유뿐이었어요. 그런데 아까도 한번 말씀드렸다시피 제 스타일 자체가 매사에 너무 업이 되어 있다 보니까 저 같은 스타일과 맞지 않는 사람들 눈엔 그게 너무 부담스럽고 또 거슬렸던 거 같아요. 자기들끼리 말이 나왔겠죠. 누구누구 너무 오버하는 거 아냐? 이런 식으로… 그렇게 정식으로 4년 넘게 다니던 매장을 그만두고 다른 브랜드 매장으로 옮겼는데… 이젠 그만하고 싶더라고요. 일을 그만하고 싶은 게 아니라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다른 회사를 찾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막연한 일은 이제 나이도 있으니까 그만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혼자 살기로 마음먹었잖아요. 저 스스로 평생 절 책임져야 할 거 아니에요. 처음엔 대출을 좀 내서 커피숍을 하나 차려 볼까? 했는데, 그 역시 제가 낼 수 있는 대출 범위가 아닌 거예요. 하하하. 저 완전 알거지. 세상을 너무 제 수준에서만 보며 살아왔던 거죠.”
재밌네…
그녀의 지난 세월은 분명 내가 살아왔던 세월과 크게 달랐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녀의 삶이 이해가 됐고, 또 언젠가 한 번쯤 저런 스타일의 사람과 함께 일을 해봤던 기억도 났다.
물론 내 성격상 저런 사람이 직장 동료였다면 틀림없이 컴플레인을 걸었겠지만…
“저 그냥 그런 사람이에요. 스스로는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디 한 군데 불편하게 튀는 구석이 있는… 그런데 친구로 지내면 그렇게 좋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고요. 같이 일만 안 하면 된대요. 하하하. 그건 또 무슨 뜻인지? 어쨌든 그래도 전 끝까지 제가 정상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인정할 건 또 인정을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다른 사람들이랑 섞여서 일하는 회사는 저랑 안 맞다는 걸 인정하니까 모든 게 편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제 인생에 진지한 고민이라는 걸 해봤죠. 남들이랑 소통이란 걸 하면서, 하지만 남들 시선 크게 신경 안 쓰면서 혼자 즐겁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과연 있는 걸까…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제 채널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성장할 거라고는 시작하기 전엔 정말 몰랐고요. 제가 좋아하는 거. 명품. 남들보다 그래도 쬐금은 더 잘 알고 있는 거. 명품. 이건 질리지 않고 그래도 좀 오래 할 수 있겠다 싶은 거. 명품. 거기다 다른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부대끼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정말 큰 고민 없이 단순하게 시작했어요. 첫 직장에서부터 남들이 저 뒤에서 수군거리는 거에 워낙 인이 박혀 있다 보니 악플 같은 것도 사실 크게 신경이 안 쓰이더라요. 그런데…”
그녀는 잠시 말을 끊어놓고 미리 준비해 놓은 텀블러를 입에 댔다.
그렇게 그 내용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목을 살짝 적셔놓고 말을 이었다.
“이거 하나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비록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 남들과 잘 섞이지 못했다는 점은 저도 인정을 하지만, 회사를 몇 번이나 옮겨야 했던 이유에 제 도덕적 결함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누구에게 사기를 쳤다거나, 없는 자리에서 남 욕을 했다거나, 회삿돈을 슬쩍했다거나,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안 했거든요. 전 제가 생각해 봐도 필요 이상으로 당당했어요. 그랬던 제가 허언증 환자라고요? 글쎄요… 전 오히려 그 말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야말로 진짜 허언증 환자 같은데요? 제가 리뷰했던 모리엘츠 컬렉션. 영상에서 이미 사실을 밝혔지만 진품이 맞아요. 사실 난 이런 걸 말해야 한다는 거 자체가 코미디라고 생각해요. 물론 당연히 제가 산 건 아니죠. 어디에서 났느냐고 물어보신다면 출처까지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절대 훔친 건 아니라는 거, 정식으로 협찬을 받았다는 정도로만 말씀드릴게요.”
로즈마리는 다시 한번 텀블러를 입에 갖다 대며 목을 적셨다.
“절 공개적으로 저격하셨던 유튜버님들. 이 영상을 보실지 안 보실지 모르겠지만, 그냥 제가 해드리고 싶은 말은 아이 돈 케어. 뭐라 떠들어도 전 그쪽들한테 아무런 관심이 없고 신경을 쓰고 싶지도 않아요. 누군 벌써 사과 영상을 올렸다고 하고, 또 누군 절 저격했던 영상을 내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나요? 제가 받았던 스트레스가 사라질까요? 그런 거 하지 마세요. 그냥 당당하게 하세요, 그게 뭐가 됐든. 제가 그쪽들을 왜 제 아까운 시간 날려가며 고소를 하겠습니까? 이게 고소 거리나 되는 건가요? 뭘 그렇게 심각하게들 사세요? 각자의 채널에선 세상 쿨한 사람, 세상 대범한 사람처럼 굴면서들. 나는 기껏 조회수 끌어놓고 그 영상 지운 사람이 제일 이해가 안 가. 처음으로 저 저격했던 사람, 당신 말이에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혼자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면서 진짜 박수를 쳤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 영상이 끝나는 순간 내가 느꼈던 감정이 다른 건 못 해줘도 그녀의 지난 세월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다는 거다.
영상을 다 본 다음, 난 로즈마리에게 개인적으로 전화를 걸었다.
회사 일과는 무관하게 그냥 그녀가 정말로 괜찮은지 팬심으로 묻고 싶었다.
홍성의 사업을 위해 그녀의 이미지를 너무 많이 소모했던 건 아니었을까 미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됐으니까.
-네, 부장님.
“올려주신 영상 정말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이런 영상들을 공짜로 본다는 게 너무 죄송스러울 정도로요.”
-광고만 스킵하지 말고 끝까지 다 봐주세요.
“아….”
-스킵해 가면서 보셨구나!
“그게… 차이가 있나요?”
-에휴… 뭔 말을 하겠어요? 푸흡… 농담이에요, 농담.
“저도 농담 한번 해봤습니다. 그 정도는 기본이죠. 중간 광고까지 스킵 없이 꾹 참아가며 다 시청했습니다.”
-오… 멋진데?
“제가 좀 합니다. 하하하….”
-폴앤크루 리뷰 영상 때문에 연락하셨죠?
“아뇨, 그건 천천히 여유 될 때 찍어 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다음 영상 때 올리려고 대본은 다 만들어놨어요.
“그렇군요. 그 건으로 연락을 드린 게 아니라… 그때 통화로 제가 한국에서 식사 한번 대접한다고 했었잖아요. 그 약속 지키고 싶어서요.”
-전 유부남이랑은 같이 밥 안 먹는데?
“저도 퇴근 후엔 회사 일로 따로 시간 내는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와이프 눈치 보이거든요.”
-진짜 멋진데?
“좀 한다니까요?”
-언제가 괜찮으세요?
“언제가 괜찮으시겠어요? 전 평일엔 언제든 괜찮습니다. 그리고 또… 로즈마리 님만 괜찮다고 하시면 다른 걸 좀 더 제안드려 보고 싶기도 하고.”
-어떤…
“통화로는 조금 그렇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게 더 효과적일 거 같은데요. 괜찮으시면 이번엔 저희 본사로 한번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로즈마리 님께 분명 좋은 제안이 될 거 같다는 기분이 드는군요.”
-그럼 날을 한번 잡아볼까요?
분명 유쾌한 여자였다.
코드가 안 맞으면 분명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나랑은 사업적으로 코드가 잘 맞는 거 같았다.
시원시원했고, 또 합리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솔직한 여자였다.
그렇게 모든 게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출근을 했을 때였다.
회사 지하 주차장이었다.
내가 타는 차는 회사로부터 받은 차라 부장임에도 불구하고 내 전용 주차 공간이 따로 있다.
그런데 회사 차를 타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누가 내 전용 주차 공간에 차를 세워놓은 게 아닌가.
아우디 알8이었다.
난 차를 다시 돌려서 임원 주차 공간 한쪽에 설치되어 있는 사무실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차를 잠시 세워놓고 그 사무실 문을 열었다.
“네, 부장님.”
“제 자리에 누가 차를 세워놨네요?”
“아, 그거… 오늘 아침에만 잠깐 딴 데다 대실 수 있겠어요?”
“아니 그야 뭐 그러면 되는 건데… 근데 누구 찹니까?”
“저기 사장님 둘째 아드님 차예요.”
“…네?”
“아침 일찍 상무님이랑 같이, 그런데 다른 차로 회사에 오셨더라고요?”
“사장님… 둘째 아들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