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그럼 하셔야죠
장 본부장이 샘플 몇 벌을 만들어서 영업부를 다시 찾았을 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물론 난 상무가 취미 삼아 그린 그림으로 홍성의 브랜드를 한번 만들어 보자던 장 본부장의 제안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의 추친력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아무리 샘플이라도 제대로 된 샘플을 뽑으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장 본부장의 추진력은 역시나 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고, 그가 뽑아온 샘플의 퀄리티는 나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이건 좀….”
“왜? 별로야?”
그가 쇼핑백에서 샘플 몇 벌을 꺼내는 순간 난 만져보지도 않고 실망부터 했다.
“이거 어디서 뽑으셨습니까?”
아무리 제품 생산 쪽은 처음 해본다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 본부장이 일을 이렇게밖에 못 한다는 게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장 본부장은 여유가 있었다.
아니, 여유가 아니라 자신이 기획한 이번 프로젝트에 확신이 있는 눈치였다.
“그냥 느낌만 봐. 소재, 라인 이런 거 보지 말고 그냥 일반 맨투맨 티에 상무님 작품들이 페인팅되면 어떨지 그 느낌만 보라고.”
“설마 이 퀄리티로 뽑겠다는 건 아니시죠? 이건 아무리 샘플이라도… 보통 샘플이 정제품보다 더 잘빠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난 그가 내 책상 위로 쏟아놓은 샘플을 차례대로 펼쳐놓으며 내키지 않는다는 뜻을 확실하게 전달했다.
“아무리 샘플이라도 하나 뽑는 데 최소 100장씩은 뽑아줘야 한단다. 안 그럼 기계를 돌리는 의미가 없대. 거기다 소량으로 뽑으면 단가가 그냥 소매가야. 미친. 그럴 돈이 어딨어? 이거 다 샘플을 뽑으려면 최소 600벌을 뽑아야 한단 말인데, 말이 안 되잖아.”
“아… 그럼 이건 다 어디서 뽑아오신 겁니까?”
“사진관.”
“네?”
난 두 눈을 크게 뜨며 장 본부장을 쳐다봤다.
“샘플 건으로 공장 몇 군데에 연락해서 견적 뽑아본 다음에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차에 집 앞에 있는 사진관에서 가족사진, 커플 사진을 이렇게 면티, 맨투맨 티에 프린팅을 해주던 게 기억이 나지 뭐야.”
“아….”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소재 퀄리티 같은 거 보지 말고 프린팅됐을 때 느낌만 보라고. 하나에 5만 원짜리 샘플이다. 어쩔 수 없어. 일단은 감으로 가자, 감으로. 퀄리티 높게 뽑아주는 공장이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섭외가 가능해. 일단은 우리한테 디자인팀이 따로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시작을 해보자는 거야.”
“….”
“어때? 내가 어떤 느낌으로 만들어보자는 건지 대충 감이 와?”
난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상무의 작품이 페인팅된 맨투맨 티들을 살펴봤다.
“상무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직 안 보여드렸어. 어떤 거 같아?”
“가격 포지셔닝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세요?”
“어떻게 잡으면 될 거 같아?”
“에이… 그거까지 저한테 물어보시면 그냥 저더러 이 프로젝트를 다 맡으라는 뜻이고요.”
“겐조급으로 포지셔닝시키면 욕 얻어먹겠지?”
“겐조, 겐조라… 이렇게 뽑은 맨투맨 티 한 장을 300유로대에 시장에 내놓자?”
“….”
“할 거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싱긋이 웃으며 말을 흘려놓고 내 사무실 앞을 지나 탕비실로 향하던 이지혜를 급하게 불러세웠다.
“이 대리.”
“네, 부장님.”
“지금 바빠요?”
“아뇨. 커피 한 잔 내리려고요.”
“그럼 잠깐만 이리 와서 이거 좀 봐주세요.”
이지혜에게 샘플 옷에 대한 그 어떤 이야기도 해주지 않고, 그저 제품의 소재 퀄리티, 라인 정도를 명품 라인 선으로 상상하며 프린팅한 그림, 그리고 그 그림으로 만든 패턴에만 집중을 해보라고 말했다.
이 그림이 상무가 그린 그림이라는 건 일절 말하지 않았다.
“어떨 거 같아요?”
“어머, 패턴이 상당히 예쁘네요?”
이지혜의 반응 앞에 장 본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네, 진짜 예뻐요. 뭐라고 해야 되지? 마치 물감을 주욱 짜놓은 느낌이에요. 그 물감을 붓에 찍어 그린 게 아니라, 물감을 짜가며 그림을 그린 느낌이랄까? 꼭 손으로 한번 만져 보고 싶은 기분이 들어요. 디자인 자체에 볼륨감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장 본부장에게 말했다.
“저도 처음 이 그림을 사진으로 봤을 때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냥 일반 페인팅이 아니라 이 그림 라인에 따라서 엠보싱 처리가 들어가면 무척 괜찮을 거 같습니다. 오돌토돌… 페인팅되는 다자인에 볼륨감을 넣어주면 그만큼의 재미도 생길 거 같고….”
“엠보싱 처리라… 그런 디테일은 구체화시킨 다음에 다시 정리해 볼게. 그래서 이 대리 생각은 어때? 괜찮은 거 같아?”
“진짜 예뻐요, 완전 특이하고. 근데 이거 뭐예요?”
“퀄리티 제대로 뽑아서 시장에 깔면 팔릴 거 같아?”
“가격이 중요하죠.”
“필리플레인이나 겐조 정도면 어떨까?”
“음… 일단 저는 저한테 그 정도 라인을 별 고민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고 봤을 때, 저라면 이걸 선택할 거 같아요. 브랜드 안 보고 패턴 디자인만 놓고 봤을 때 말이죠.”
“패턴 디자인만 놓고 봤을 땐 경쟁력이 있단 말이지?”
“느낌 자체가 필리플레인이나 겐조하고는 아예 다르잖아요. 전 이런 따뜻한 느낌의 팝아트 취향이라서….”
나와 장 본부장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샘플을 챙겨서 돌아간 장 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상무님이랑 지금 같이 있다면서 상무님 사무실로 올라와 줄 수 있겠느냐는 전화였다.
이미 테이블 위로는 장 본부장이 사진관에서 뽑아온 말도 안 되는 샘플 몇 벌이 펼쳐져 있었고, 그런 샘플을 쳐다보는 상무님의 얼굴엔 민망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아우, 난 이거 내가 그린 그림이라서 그런지 부끄럽네. 이런 걸 과연 사람들이 돈 주고 살까요? 나라면 절대 안 살 거 같아요.”
나라도 안 사지.
이건 상무님의 그림으로 만든 디자인, 패턴의 문제가 아니라 샘플 자체의 퀄리티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걸 다 배제하고 제대로 된 제품으로 탄생시켰을 때를 상상하면… 마케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유통을 통해 재고를 어떻게 빼느냐에 따라 충분히 경쟁력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난 입을 다물었다.
자칫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여서 좋지 못한 결과에 상무님이 실망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사업에 그 어떤 개인적인 감정도 싣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공 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우선은 제대로 된 샘플이 필요합니다.”
장 본부장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걸 체질적으로 딱 싫어하는 장 본부장.
어떻게든 샘플을 뽑아서 실물을 앞에 놓고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샘플을 뽑았던 거지, 이게 절대 장 본부장의 수준은 아니다.
우린 그가 뽑아온 수준 이하의 샘플을 앞에 놓고 최대한 이게 고급스러운 상품화가 됐다는 전제하에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대로 된 샘플이 나왔다 치고… 아니, 제대로 된 상품이 나왔다 치고, 공 부장님이 봤을 땐 상품성이 있을 거 같아요?”
“결국 시장에서의 상품 경쟁력은 유통이니까요. 그걸 잡고 있기 때문에 본부장님 말씀처럼 투자 대비 큰 리스크가 없을 것 같긴 합니다. 다만….”
“….”
“이걸 꼭 해야 하는 명분이 약합니다.”
상무님은 고개를 끄덕였고, 장 본부장님은 그런 상무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만약 상무님이 수익에 상관없이 꼭 한번 해보고 싶은 거라고 하시면 저희야 얼마든지 따라갑니다. 다른 프로젝트 올 스톱하고 여기에만 매달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합니다. 왜? 상무님이 하시고 싶은 사업이니까요.”
“…!”
장 본부장의 얼굴에 미소가 스몄다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상무님께서 긴가민가한 상황에서 이렇게 상무님 작품으로 브랜드를 제작하는 걸 민망해하시면 결국엔 이걸 먼저 제안한 장 본부장님이 안고 가야 할 부담감만 커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희 영업부 역시 목표 없이 달리기만 해야 하는데, 그럼 금방 힘이 빠지거든요.”
“해보고 싶습니다.”
테이블 위로 펼쳐놓은 샘플을 회수하며 상무가 말했다.
“저도 인정이라는 걸 한 번 정도는 받아 보고 싶습니다. 특히 사장님께.”
“…!”
“그리고 그 인정을 제가 포기해야만 했던 그림으로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사실 잘 모르겠어요. 제 작품들이 과연 브랜드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시장성이 있을지. 그림을 그릴 때 그런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요.”
“그럼 하셔야죠.”
난 상무가 회수한 샘플들을 넘겨받아 쇼핑백 하나에 모두 챙겨 넣으며 말했다.
“회사 내에 디자인 팀이 없는 관계로 외부 디자인 업체에 외주를 줘서 제대로 된 샘플을 의뢰해 보겠습니다.”
장 본부장이 동의한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상무에게 말했다.
“스위스에 프랭키라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상무는 처음 듣는 브랜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런 상무 앞으로 스마트폰으로 해당 브랜드를 검색한 장 본부장이 그 브랜드의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스위스 안에서만 유통이 되고 있는 독립 브랜드입니다. 그 회사의 오너가 작은 로컬 호텔 상속자입니다. 원래 만화를 그리던 사람이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호텔을 상속받고 그 호텔 1층과 2층에 있는 리셉션, 레스토랑을 다 터버리고 아예 자기 개인 전시실로 만들었죠.”
“….”
“먹고살 만했던 모양입니다. 호텔 사업엔 아무런 관심이 없고, 그저 자기 작품들을 전시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데에만 그 호텔을 사용했다고 할 정도니까요. 호텔 이용객들의 취향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고 자기가 그린 만화를 객실에 걸어놓고 객실 이용객들이 싫어도 볼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거죠. 전 그 사람을 만화가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마케터로서는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아, 이 작가… 저도 어디선가 이 작가의 작품을 봤던 기억이 있네요.”
“그렇게 객실에 걸어놓을 그림을 하나씩 하나씩 그려가다가 결국 그 그림이 지금 장 본부장님이 뽑아온 샘플처럼 옷으로 옮겨집니다. 옷에서 신발로, 신발에서 가방으로… 지금 그 호텔은 프랭키 본사로 사용되고 있고 호텔 객실이었던 공간들은 여러 아티스트들의 작업실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홍성과는 태생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프랭키를 롤 모델로 잡자, 목표로 잡자는 게 아닙니다. 때론 디자인과 마케팅의 힘이 유통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상무님의 작품은… 충분히 프랭키의 디자인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마케팅과 유통은 저와 본부장님이 책임지고 해보겠습니다.”
샘플을 챙겨 내려와서 난 그걸 해외 영업부 최 팀장에게 전달했다.
“현재 중국 법인으로 보내고 있는 국내 브랜드들 중에 자체 디자인팀이 있는 업체 두어 군데만 좀 추려주세요.”
“네.”
“그리고 샘플을 몇 개 뽑아야 할 거 같은데, 개당 제작도 가능한지, 가능하면 그 단가가 얼마나 되는지 최대한 자세하게 알아봐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샘플 나오는 퀄리티 보고 대량 주문을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잘 풀어가 보세요. 아마 샘플 정도는 그냥 뽑아줄 수도 있어.”
“네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