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때를 잘못 만난 친구야
홍성과 같은 컨트롤 기업, 즉 패션 상사 기업에서 절대 해선 안 되는 게 몇 가지 있다.
대외적으로도 금기시되는 사항이 몇 가지 있긴 있지만, 그보다도 팀별 매출 경쟁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내부적으로는 팀별 간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절대적으로 지켜줘야 하는 사항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다른 팀에서 진행하다가 엎어진 프로젝트는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는 거다.
매너에 속한다.
회사가 꼭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회사는 놓치는 브랜드 없이 빡빡 긁어오기를 원한다.
하지만 우리끼리는 그 선을 지켜주는 거지.
프로젝트가 엎어졌다는 건, 마진 조율에 실패를 했다는 뜻이거나 서로의 조건을 서로가 맞춰줄 수 없어서 엎어지는 건데, 그걸 다른 팀에서 날름 주워서 성사를 시켜버리면, 성사를 시키지 못한 팀의 입장이 뭐가 되겠는가.
이건 돈이 되고 또 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도 절대 손을 대선 안 된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금기시되는 부분이 바로 다른 팀의 프로젝트를 부서장을 이용하거나 혹은 짬을 통해 빼앗아 오는 거다.
이건 일반 기업에서 종종 행해진다고 하는 성과 가로채기와 전혀 다를 게 없는 거다.
말 그대로 성과 가로채기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중 그 부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거였다.
우선 영업부 조직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김 차장의 영업 마케팅부가 컨트롤하고 있던 브랜드들의 아웃렛 사업권을 양 차장에게 넘기게 만들었었다.
그게 지금에 와서 내 발목을 이렇게 잡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다.
당시 양 차장은 영업 마케팅부가 컨트롤하고 있던 브랜드들의 아웃렛 사업권과 함께 영업 마케팅부로부터 나 팀장을 넘겨받아 지금의 영업 기획부를 꾸리게 된 거다.
1년도 더 전에 나크리스 단독 매장 프로젝트를 맨파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영업 마케팅부에게 넘긴 걸 지금에 와 들춰내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다.
당시 김 차장은 나크리스를 자기에게 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이끌었던 영업 기획부의 맨파워가 부족해서 내가 먼저 김 차장에게 나크리스 단독 매장을 받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던 거였다.
만약 김 차장이 지금 이런 그림을 미리 다 그려가며 당시 양 차장에게 영업 마케팅부가 컨트롤하고 있던 브랜드들의 아웃렛 사업권을 군말 없이 넘겼던 거라면… 김 차장 진짜 인정.
그리고 여기서 내가 진짜 소름이 확 올라왔던 이유는, 조금 전 김 차장이 본인 입으로 말한 것처럼 CGM이 한국 시장에서 철수를 하고 한성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제법 괜찮은 브랜드들이 제대로 된 컨트롤 기업을 찾지 못하고 시장에 나와 방치된 상태에서도 김 차장은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다는 거다.
순간 생각이 많아지고, 또 김 차장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너구리 같은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처럼 CGM과 한성이 토해낸 쓸만한 브랜드들이 컨트롤 기업을 찾지 못하고 시장에 나와 있으면 보통은 그런 상황을 나와 영업 기획부가 만들어 냈으니까 나에게 먼저 물어보는 게 정상이다.
‘야, 공 차장아 CGM이랑 한성이 토해낸 브랜드들 중 이런 이런 브랜드는 쓸만한 거 같은데, 우리가 한번 주워서 해봐도 돼?’ 하고 말이다.
일종의 양해를 구하는 거다.
어차피 영업 기획부는 단독 브랜드 컨트롤은 하지 않으니까.
그 정도 양해만 구하고 주워 담으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도 당시 김 차장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뒷짐을 지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다.
오죽 내가 답답했으면 직접 김 차장을 찾아가서 다른 기업이 물어가기 전에 얼른 브랜드 본사들과 컨택을 해서 브랜드를 주워 담으라고 재촉을 할 정도였다.
브랜드 본사들의 입장에서도 한성이 시장 가격을 무너뜨린 후였기에 가급적이면 그 문제를 수면 위로 띄워 올린 홍성의 손을 잡고 싶지, 다시 또 비슷한 불안을 안고 다른 기업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매사 회사 일에 수동적인 척 뒷짐만 지고 있어서 몰랐다.
김 차장이 이 정도로 매섭게 파고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여기서 나와 양 차장은 김 차장의 요구? 혹은 부탁을 거절한 명분이 없었다.
한 방을 제대로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할까?
“무리한 요구라는 건 아는데…”
김 차장은 갑자기 하던 말을 뚝 하고 끊어버리고는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맥락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상태라면 앞으로 길면 2년 본다. 내가 홍성에서 버틸 수 있는 기간.”
“….”
“지금도 치고 올라오는 양 차장, 안 차장에게 바로 밀리기 시작하는데, 중국 법인에 가 있는 손 차장까지 주재원 근무 끝내고 돌아오면 내가 설 자리가 과연 있을까 싶어. 제대로 붙어도 될까 말까 하는데, 주재원까지 하고 돌아오는 손 차장을 내가 무슨 수로 막겠어?”
나는 그 순간 영업 짬밥은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버티는 것도 실력이고 능력이다.
이 치열한 곳에서 비록 부장 승진은 까마득한 후배에게 양보를 해야 했지만, 어쨌든 김 차장은 버티고 버텨서 차장을 유지하며 회사를 나오고 있다.
“저 지금 방심하고 있다가 상대편 장기판 쫄로 제 차를 잡아먹힌 기분입니다.”
양 차장이 어이가 없다는 투로 툴툴거리며 말을 했고, 그런 양 차장을 향해 김 차장이 특유의 간사한 미소로 이해 좀 해달라는 표정을 만들어 냈다.
“아니, 그럼 혹시 부장님한테 말해서 나 팀장을 저한테 보내신 것도 지금 이걸 노리고 미리 선수 쳐서 맨파워를 줄이셨던 겁니까?”
“아니야, 그런 거.”
말은 아니라고 하는데 모든 정황상 양 차장의 의심이 맞는 거 같았다.
“어디 그 이야기를 내가 먼저 꺼냈나? 공 부장이 나 찾아와서 영업 마케팅부가 컨트롤 중인 브랜드들 아웃렛 사업권을 양 차장한테 넘기라고 하니까 어떻게 하겠어? 맨파워 승진은 못 시키고 있는데 프로젝트를 넘겨줘야 하니 그나마 쓸만한 나 팀장이라도 데리고 가서 팀장 승진 시켜주라고 하는 수밖에.”
“헐….”
“좀 도와줘. 내가 언제 이렇게 노골적으로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있다.
아니, 많다.
양 차장이 대리였을 시절, 나와의 불화로 퇴사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날 찾아와 술을 사주며 양 차장을 잡으라고 설득했었다.
물론 그때도 지금처럼 인간적인 면을 앞세웠지만, 진짜 목적은 자신의 차장 승진이었다.
이런 게 정치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드리기는 곤란할 거 같습니다. 우선 저도 팀장들 의견은 들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양 차장이 끝까지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 차장이 데리고 있는 팀장이라고 해봤자 김 차장이 오랫동안 데리고 있었던 나 팀장과 지원부에서 트랜스퍼된 차 팀장뿐인데, 분명 나 팀장은 김 차장의 의견을 지지할 게 너무나 뻔했다.
그리고 차 팀장은 성과보다는 안전을 더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공황장애가 있는 차 팀장에게 욕심을 내라고 강요를 할 수도 없는 게 바로 양 차장의 입장이었다.
김 차장의 기가 막힌 계산 앞에 난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양 차장이 날 찾아와서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이 당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냥 그렇게 하시죠. 방금 나 팀장하고 차 팀장 불러놓고 의견을 물어봤는데… 나 팀장은 제 눈치 보느라 입만 다물고 있고, 차 팀장은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있어요.”
“크크큭….”
“웃음이 나옵니까, 지금?”
“아, 뭐 어쩌겠습니까. 누가 봐도 우리가 당한 건데….”
“어째서 우립니까? 부장님 때문에 제가 대신 피를 보는 거지.”
“또 뭐가요?”
“누가 영업 마케팅부 쪽 브랜드 아웃렛 사업권 받아다 달라고 했습니까? 맨파워 좀 채워달라고 했지 누가 나 팀장을 달라고 했냐고요.”
“우와… 대신 받아다 줄 땐 고맙다고, 고맙다고 그렇게 인사를 하더니 이제 와서 이러는 거 좀 봐.”
“아, 모르겠고. Kidshub랑 절대 안 됩니다. 편집샵은 계속 저희가 가지고 가고 쁘띠토널부터 시작해서 단독 브랜드들만 영업 마케팅부가 컨트롤할 수 있게끔 양보하겠습니다.”
“당연하죠. 영업 마케팅부가 편집샵을 컨트롤하면 영업 마케팅부, 기획부로 구분을 지을 이유가 없어지는 건데.”
김 차장과 안 차장을 불러 차장 미팅을 진행하기 전에 박 이사를 먼저 찾아갔다.
그리고 어제 김 차장이 이런 요구를 해왔고, 그 부분에 있어서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할 명분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박 이사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 김 차장이 공 부장한테 멋진 거 하나 보여줬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동안 영업 마케팅부 전반에 흐르던 분위기를 분명 적당히 잘 단속할 수 있었을 텐데도 일부러 가만히 방치해 뒀던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도 능력이다. 필요하면 울어야지. 누구 하나 불만이 있다고 직접적으로 공 부장 찾아와서 말한 사람도 없고, 또 그래서 퇴사를 한 사람도 없잖아.”
“그러니까요. 아마 맞을 겁니다. 분명 팀장들 분위기를 제대로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이거 한 방을 터뜨리려고 일부러 방치, 아니 적당한 선에서 부추기고 있었던 거 같아요.”
“…?”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거든요.”
“바른 리더십이란 말은 못 해도 필요에 따라서 리더는 그 정도 액션은 깔 줄 알아야지. 너무 안 좋게만 받아들이지 마. 김 차장 입장에선 그렇게라도 우는 액션을 취해서 영업 마케팅부에 필요한 걸 얻어내려고 한 거였을 테니까 말이야.”
“속으로 그저 감탄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영업 짬밥 15년 넘게 먹은 친구야. 홍성에서 영업 쪽으론 나 다음으로 길게 한 친구고. 호락호락할 순 없지. 당시 공 부장이 팀장이었을 시절에 말이야.”
“네.”
“내가 그렇게 손 차장을 영업부 차장으로 밀었는데도 봐. 결국 장 본부장 잡고 늘어져서는 손 차장 중국 법인으로 밀어내고 자기가 차장 잡았잖아. 비록 단독 차장이 아니라 공 부장이랑 2차장 체제로 단 거라도 그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승진을 시킬 명분도 마땅히 없었지만, 누락을 시킬 명분은 더더욱 없었다고.”
“….”
“진짜 때를 잘못 만난 친구야. 장 본부장만 없었음 당연히 먼저 차장 달고 지금쯤 부장을 달고 있어야 정상인 친구야. 양 차장, 안 차장처럼 쉽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래도 한때는 동기들 중에 가장 먼저 처음 팀장 달고 또 장 본부장보다 먼저 홍성의 에이스였다.”
“네, 그 부분은 이미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김 차장이 다시 각성만 하면… 공 부장한테는 참 도움이 되어줄 맨파워야. 절대 마이너스 끼칠 맨파워는 아니야. 물론 까마득한 선배를 데리고 간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럴 때마다 상무님 떠올려 봐. 회사는… 계급이 깡패야.”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김 차장이 중국에 있는 손 차장 이야기를 꺼내더란 말이지?”
“…?”
“하긴, 다른 데로 옮길 거 아님 미리미리 준비를 하긴 해야 할 거야. 이거 하나는 내가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다. 정치는 장 본부장보다 김 차장이 한 수 위야. 다만 장 본부장 실력이 김 차장이 가진 정치력보다 월등히 뛰어나서 먼저 차장을 달았던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