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우리가 못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꿀맛만 같았던 캄보디아에서의 휴가가 끝이 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박 이사한테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나의 확인을 기다리고 있던 보고서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출근과 동시에 쌓여 있는 보고서 더미를 확인하고 잠시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최 팀장.”
“네, 부장님.”
“미안한데 이거 좀 영업 마케팅부 탕비실에 올려줄래요?”
월요일 아침 출근 첫날부터 영업 마케팅부를 방문해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관계.
누가 잘못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누가 손해 볼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영업 마케팅부 쪽에서 난 불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나란 사람 자체가 아니라 내가 부장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거겠지.
그냥 한번 지켜보기로 했다.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이 관계 회복이 꼭 필요한 것일까란 의문도 함께 들고 있었다.
그리고 과연 세 차장이 영업 마케팅부와 영업 기획부, 해외 영업부 사이에 생겨버린 골을 얼마나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지, 그걸 좁히려고 애를 쓰는지도 내겐 중요한 체크 포인트였으니까.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 이런 말로 설명하기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내가 이걸 해결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몇몇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 때문에 영업부 전체 회식을 가져서 회식을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해결이 될 거면 해결이 되는 거고, 해결이 안 되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놈이 알아서 나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난 최 팀장에게 캄보디아 여행 중에 사 온 쿠키와 젤리를 영업 마케팅부 탕비실에 올려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곧바로 커피 한 잔을 내려 밀린 업무를 쳐내기 시작했다.
모리엘츠 건으로 중국 출장을 다녀온 안 차장에게 보고받을 내용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안 차장 역시 빠듯한 일정으로 출장을 다녀온 탓에 아직 보고서가 완성이 안 된 상태였다.
그렇게 우린 숨도 쉬지 않고 오전 근무를 쳐냈다.
난 안 차장을 불러 함께 사내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며 몇 가지 급한 보고를 들었고, 점심을 해결하고 쉬는 시간도 무시한 채 곧바로 다시 업무에 들어갔다.
그렇게 오후 3시가 가까워 오자, 언제 다 끝낼까 했던 보고서 확인이 모두 끝이 났고, 그때부턴 다시 안 차장이 새로 올린 모리엘츠 중국 판매 건을 보고받기 시작했다.
“크흐…. 토탈 열네 벌. 기가 막히네.”
“이번에 직접 해보면서 느낀 건데, 전시 기간이 너무 아쉬웠어요. 그리고 홍보도 나름 한다고 했는데, 많이 부족했던 거 같고. 일반 고객에 의한 판매는 고작 여섯 건이 전부였습니다.”
“여섯 건이 어디예요? 한국에선 빵 건이었어요. 이 정도면 됐지, 뭐. 여기서 더 욕심낼 필요 없잖아요. 목숨 걸고 팔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모리엘츠 측에서도 이 정도로 판매가 이뤄질지 몰랐다며 무척 만족하는 중이라면서요?”
“그런 것과는 별개로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스무 벌도 쉽게 넘길 수 있겠더라고요.”
“천천히 합시다. 올해만 사는 거 아니잖아요. 첫해부터 너무 빵하고 띄워 버리면 모리엘츠가 너무 기대를 해. 천천히, 천천히 완만하게 그래프를 올려줘야 그쪽에서도 고맙단 생각을 하지, 확 치고 올라갔다가 그 후로 계속 하향곡선을 그리면 아무리 모리엘츠라도 실망을 할 수밖에 없어요. 이 정도 집중력을 보여줬음 충분해요.”
“네, 모리엘츠도 올해는 중국 시장 진출이 가장 큰 목표였는데 그걸 이룬 상태에서 또 큰 문제 없이 이 정도 판매를 이끌어 낸 데에 의의를 두고 있는 거 같았어요.”
그렇게 안 차장과 미팅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였다.
“차장님.”
안 차장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고개를 돌렸고, 서류 파일 하나를 들고 다가오는 김 차장과 눈이 마주쳤다.
“휴가는 잘 다녀왔어?”
“네, 차장님. 덕분에 잘 쉬고 왔습니다. 앉으세요, 이쪽으로.”
안 차장이 빼 온 의자에 앉으며 김 차장이 말했다.
“마침 잘됐네, 안 차장도 같이 있고.”
하지만 김 차장은 안 차장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는 투로 양 차장이 있는 곳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근데 어쩐 일이십니까?”
“오전에 몇 번이나 내려왔었어.”
“아, 그래요?”
“근데 딱 멀리서만 봐도 너무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길래 그냥 올라갔어.”
“에이, 부르시죠.”
“그렇게 급한 건 아니라서.”
“그럼 전….”
뭔가 낌새를 눈치챈 안 차장이 자신의 다이어리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괜찮으면 차장 미팅 한번 할 수 있을까?”
편안한 얼굴.
하지만 먼저 차장 미팅을 제안하는 김 차장의 모습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원래부터 수동적인 스타일은 아니었던 걸로 안다.
이젠 모두가 다 퇴사를 하고 김 차장 혼자 남아 있지만, 그의 입사 동기들 사이에선 가장 공격적이고 또 효율적인 업무 처리 능력으로 선임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첫째가 생긴 뒤부터 회사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만 했고, 그러는 사이 회사가 급격하게 성장해 버린, 그런데 또 거기서 줄줄이 둘째까지 생기면서 말 그대로 타이밍이 꼬인 인물이 바로 김 차장이다.
안 차장은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고, 난 손목에 채워진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서 해도 되는 미팅입니까?”
“조용한 곳이 좋을 거 같은데….”
그래서 자리를 옮겼다.
월요일이라 대부분의 회의실은 비어 있었다.
양 차장과 안 차장, 그리고 내가 먼저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고, 차장 미팅을 제안했던 김 차장은 어쩐 일로 자기 돈을 써가면서까지 자판기에서 캔 음료를 뽑아 회의실로 들어왔다.
회의가 조금 길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일종의 양해 같았다.
우리 모두는 김 차장이 뽑아온 캔 음료를 받으며 살짝 긴장했다.
평소 돈을 잘 안 쓰는 사람이다.
짠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뻔한 월급에 애 셋을 키우다 보니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다들 바쁜데 시간 뺏어서 미안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양 차장이 슬쩍 김 차장이 앉을 의자를 뒤로 빼주며 미소를 지었다.
양 차장에게 있어 김 차장은 나에게 장 본부장과 같은 존재일 거다.
같은 팀에서 몇 년을 같이 뒹굴었나.
미운 정 고운 정, 정이라는 정은 징그럽게 들었을 거다.
“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김 차장의 시선은 나와 안 차장 사이 공간을 향해 있었다.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김 차장이 말했다.
“나 좀 도와줘.”
“…!”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불편한 침묵은 김 차장이 아니면 깨뜨리지 못하는 침묵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도와달라고 말하는 김 차장.
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나와 양 차장, 그리고 안 차장은 그 밑도 끝도 없는 소리의 핵심을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
“나 지금 많이 힘들다.”
애써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그 미소는 그의 말처럼 너무나 힘들어 보였다.
“이거 진짜 해선 안 될 짓이라는 거 아는데, 매일매일 출근하는 게 숨이 막힌다.”
옆에서 양 차장이 자신의 음료 캔 뚜껑을 뜯어서 김 차장의 음료와 슬쩍 바꿔 놓았다.
그걸 눈치챈 김 차장은 음료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셔놓고 다시 나와 안 차장 사이의 공간으로 시선을 던졌다.
“뛰어난 후배들이랑 같이 경쟁하게 된 거. 괜찮아. 처음이 힘들어서 그렇지, 장 본부장 때부터 시작해서 차례차례 밟혀가는 데는 이제 면역이 되어서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없고. 오히려 그래도 꼬박꼬박 선배 대접 해줘서 고맙게 생각해.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공 부장까지는 홍성에 만토바를 끌고 온 공이 워낙에 크다 보니 어떻게든 위안이 됐는데, 양 차장, 안 차장까지 날 앞지르기 시작하니까 두 사람이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그러면서도 그걸 야속하게 생각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
“…”
“그런데 이런 거 저런 거 다 떠나서… 현재 영업 마케팅부… 너무 힘들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힘드시단 말씀이세요?”
내가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지금 우리 영업 마케팅부가 결코 못하고 있는 거 아니잖아?”
김 차장이 토해낸 절규에 가까운 불만에 우리 모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매출이 계속 떨어지고 있긴 한데, 작년이랑 비교해 보면 떨어진 것도 아니야. 오히려 한성에서 넘어온 브랜드들 때문에 전체 매출은 더 올랐어.”
여기서 포인트는 CGM과 한성이 놓친 브랜드들을 다 영업 마케팅부가 주워 담을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를 해줬음에도 김 차장이 말한 전체 매출이라는 게 크게 오르지 않았다는 거다.
하지만 난 이 부분에 대해 그 어떤 태클도 걸 마음이 없었다.
브랜드가 늘어났다고 해서 늘어난 브랜드 수에 비례해 전체 매출이 올라가는 건 절대 아니니까.
늘어난 브랜드 수에 비례하게 전체 매출을 올리려면 그만큼의 맨파워 보충이 이뤄져야 하고 또 최소 반년 정도는 그 추이를 지켜봐 줘야 한다.
지금 당장 매출이 올랐다, 안 올랐다를 판단하는 건 사실상 말도 안 되고, 그건 너무 폭력적이란 걸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영업 마케팅부는 한계가 있다는 거야.”
“한계라면…”
“국내 시장이 전부잖아. 이 한정된 시장 안에서 맥스 매출은 이미 진작에 찍었는데, 거기서 어떻게 더 눈에 띄게 매출을 올릴 수 있겠어. 이미 어지간한 브랜드는 다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상태에서 없는 브랜드를 만들어 띄울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반면에 영업 기획부는 어때? 해외 영업부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우리 영업 마케팅부가 가질 수 없는 중국 시장을 가지고 있잖아. 애초에 경쟁이 안 되지, 이건.”
“흐음….”
“나처럼 경쟁하는 걸 포기하란 말을 못 하겠어. 그냥 지금에 만족하란 말을 못 하겠다고. 안 그래도 무능한 차장인데, 그런 말까지 해버리면 치사하단 소리까지 들을 거 같거든. 우리 애들… 진짜 고생 많이 한다. 일이 많아서 하는 고생만 꼭 고생이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고생은 나아. 보상이라도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우리 애들이 하고 있는 마음고생은 끝도 없고, 답도 없어. 양 차장은 나랑 같이 일 오래 해봐서 잘 알 거야. 죽어라 매출 방어해 놓으면 뭐 해? 다른 팀에서 말도 안 되는 브랜드 얻어걸려서 매출 폭발시켜버리면 우린 매출을 지켜낸 것만 해도 충분히 잘한 건데 마치 죄인처럼 눈치 보며 비교를 당해야 되고, 계속 그렇게 비교를 당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주눅이 들고, 그 주눅이 결국은 유치한 시기, 질투로 발전하고…. 나 진짜 이런 비교 그만 당하고 싶고, 또 내 새끼들이 죽어라 일하면서도 결국엔 시기, 질투만 해야 하는 꼴을 도저히 못 보겠다.”
“….”
“공 부장이 만토바 끌고 오고 영업부 사이즈를 이렇게까지 키워놓은 상황에서 내가 할 말이 아니라는 건 잘 아는데, 지금 시스템 전반적으로 문제가 좀 있어.”
할 말은 많았는데, 김 차장의 입장도 이해가 가서 쉽사리 입을 열지를 못했다.
김 차장 밑에서 오래 일을 했던 양 차장은 당연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안 차장 역시 입맛만 다실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조급해하는 팀장들한테 항상 하는 말이 있어. 유지만 하자. 매출 방어만 하자. 그것만 해도 우린 선방하는 거다… 국내 유통이 채널의 전부인 영업 마케팅부 입장에선 사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네.”
“그런데 그 말이 어느 순간부터 무능력한 차장의 자기 위안밖에 안 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와버렸어. 왜? 계속 영업 기획부, 해외 영업부와 비교가 되거든. 승진 문제도 그렇지만, 내가 차장 단 이후로 우리 애들이 언제 금일봉을 받아 봤어? 상무, 전무님 카드로 회식을 한번 해봤어? 팀장들이 가져가는 성과급에서도 차이가 너무 많이 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이대로 가면 우리 애들 지쳐. 한성 무너지고 CGM까지 철수한 마당에 이제 어느 간 큰 컨트롤 기업이 홍성 인력 빼돌리기를 할 거야? 회사 차원에서는 좋은 거지만, 우리 직원들 입장에선 대우받고 몸값 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기회마저 막혀버린 거 아냐?”
“…!”
“근데 내가 지금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애들, 그러니까 영업 마케팅부 대리, 팀장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정말 힘들어. 양 차장, 안 차장이야 만토바, 링겐 쪽 물건 확보되어 있고, 또 중국 시장까지 열려 있으니 계속 프로젝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우린 그런 게 아니잖아. 거기다 조직도 새로 개편하면서 아웃렛도 넘겼고.”
정말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입장 차이, 그리고 김 차장을 제외한 우리 셋 모두가 원래 영업 기획부 출신이라는 출신의 차이가 벽처럼 가로막혀 있었다.
“미안해. 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흥분을 해버렸네.”
“아닙니다. 충분히 차장님 입장이 이해가 되고, 또 말씀하시기 전부터 그런 부분에 대해 저 역시 어느 정도 인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난 잠시 말을 끊어 놓고 김 차장이 했던 것처럼 김 차장과 양 차장 사이의 공간으로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여기 양 차장님과 안 차장님은 김 차장님처럼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뿐이고, 회사는 어디서 얼마가 올라오더라도 결국 최종적으로 확인을 하는 건 영업부 전체 매출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물 들어오고 있는 곳에 배를 띄울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곳으로 사공들을 집중시켜야 하는 거고.”
“알지. 잘 알지. 그래서 내가 그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던 거야. 나도 이끌어주지는 못할망정 잘나가는 후배들 발목 잡는 선배가 되고 싶지는 않아서. 그런데… 팀장 때까지야 그냥 나 혼자 비겁하면 됐거든? 그냥 나 혼자 무능하고 어떻게든 회사에 오래 붙어 있는 걸 목표로 잡으면 됐다고. 공 부장이랑 2차장 체제로 돌릴 때까지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어. 그런데 이젠 그게 안 돼.”
“….”
“나 하나 때문에 팀장들 승진이 줄줄이 막혀버리니까 이건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모르쇠로 일관할 수가 없는 거야.”
“…혹시 뭐 따로 생각해 본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유아 아동복 쪽… 국내 유통만이라도 우리 영업 마케팅부한테 넘겨주면 안 될까?”
김 차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 차장의 눈썹이 격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