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무슨 소원 빌었어?
안 차장의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진짜 나란 놈…
이렇게 좀 쉬어 보겠다고 휴가까지 써놓고, 그새 회사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꼴이라니…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어떻게 모리엘츠가 단 하루 만에 그것도 한 손님에 의해 다섯 벌이나 나가게 됐는지, 그걸 알아내지 못하면 전화를 끊고도 계속 궁금해서 신경이 쓰일 것만 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푹 쉬겠습니다. 그래도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는 좀 해주세요. 말 안 해주면 저 궁금해서 미쳐요. 알면서….”
-파크뷰그린(현재 베이징에서 모리엘츠 전시가 이뤄지고 있는 백화점 이름) 오너가 직접 전시장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분이 다섯 벌을 한 번에 다 사 갔단 말이죠?”
-그때 미스터 총게가 홍성 본사를 방문했을 때 그 양반 있는 데서 사장님이 하이엔드 컬렉션 한 벌을 매너상 구입하셨던 것처럼 최소 일반 컬렉션 한두 벌 정도는 매너상 구입을 해줄 거라 예상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중국에서 모리엘츠 광고를 크게 때리면서 파크뷰그린도 자연스럽게 함께 홍보가 된 격이고 대외적으로도 모리엘츠 첫 전시권을 따냈다는 이유로 백화점 브랜드 이미지가 많이 상승할 거로 봐집니다. 백화점 브랜드 몇 개가 독식하고 있는 한국이랑은 좀 다릅니다. 중국에서 이런 전시 행사는 꽤 의미가 큽니다. 특히 모리엘츠급의 브랜드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체면에 목숨까지 거는 사람들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건 돈을 떠나서 저희가 파크뷰그린의 체면을 지켜준 거죠.
“….”
-근데 확실히 손이 장난 아니게 크더라고요. 자기 와이프랑 딸 두 명을 데리고 와서 그 자리에서 바로 다섯 벌을 초이스하고 완전 쿨하게 떠났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가 이빨도 적당히 털었고요. 제가 누굽니까, 안낙현 아닙니까.
“아무튼 진짜 수고하셨습니다. 첫날 스타트부터 아주 좋았네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오늘 살 만한 사람들이 올 거란 건 또 무슨 말이에요?”
-다른 백화점 몇 군데에 전시 행사 관련 초대장을 메일로 보냈었습니다.
“…?”
-왜 처음 저희가 파크뷰그린으로 모리엘츠 전시 행사장을 최종 선정하기 전에 파크뷰그린과 함께 후보군에 올랐던 백화점들 몇 군데 있었지 않습니까. 상하이, 광저우, 청두 쪽에…
“네.”
-그냥 한번 찔러봤죠. 어차피 중국은 한국과 달리 매년 전시 행사장을 바꿔야 합니다.
“그건 그때 안 차장님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줘서 알고 있습니다.”
-그 핑계로 당시 후보군이었던 백화점 몇 군데에 초대 메일을 보냈습니다. 파크뷰그린에서 열리는 모리엘츠 첫 전시를 보러 와 주십사… 근데 청두 유펀(현재 청두에서 IFS 백화점 다음으로 가장 럭셔리 브랜드를 많이 확보하고 있는 백화점) 쪽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그곳 사장 아들이 직접 참석을 하겠다고 답장이 왔더라고요.
“그 사람도 살 거다.”
-무조건이죠. 이건 무조건입니다.
“그걸 무슨 수로 안 차장님이 그렇게까지 장담을 할 수 있습니까?”
-음… 부장님. 제가 왜 중국 전시권을 중국 법인 쪽으로 양보하지 말고 본사가 직접 다 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을 했겠습니까?
“…?”
-아마 홍성 안에서 저만큼 중국 비즈니스 스타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중국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 밑에서 중국 비즈니스맨들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기업 대 기업은 모르겠지만, 최소한 비즈니스맨 대 비즈니스맨의 토크는 제가 현 중국 법인장님보다 나을 거라 장담합니다. 저는 중국 법인장님의 양해를 구하고 홍성이 유펀 쪽에 꽌시를 만들기를 희망한다는 의미로 초대장을 보낸 거였고, 그 초대에 응하는 상대 역시도 모리엘츠 전시권이 진짜 목적이 아닌 홍성과의 좀 더 깊은 꽌시일 거기 때문에 자신들의 체면을 세워야만 합니다.
“아…”
-거기다 직원이 오는 게 아니라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사장 아들이 직접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백화점 몇 개를 가지고 있는 집안 장남인데 모리엘츠 옷 몇 벌이 대수겠습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중국 쪽은 저만 믿고 맡겨주시면 됩니다.
“근데 안 차장님.”
-네.
“괜한 걱정일 수도 있는데… 만약 그렇게 해서 내년에 청두에서 전시를 하게 된다고 하면 모리엘츠 판매가 확 줄어드는 거 아닙니까?”
-어째서요?
“아니, 아무래도 베이징, 상하이가 좀 더 낫지 않나? 계속 그쪽으로 전시장을 확보해나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 같은데…”
-부장님.
“네.”
-모리엘츠는 일반 손님들한테 판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전시권을 명목으로 꾸준히 구매력 있는 꽌시를 넓혀가는 게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처음 우리가 중국 전시권까지 따냈을 때 원래 목표가 뭐였습니까? 열 벌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어제 벌써 다섯 벌 나갔습니다. 오늘도 최소 한두 벌은 나갈 거고요.
“하긴, 처음부터 판매 수익을 보고 잡은 브랜드는 아니었으니까…”
-바로 그거죠. 중국 쪽은 저만 믿으십시오.
“믿어요. 원래 믿었어요. 그리고 안 차장님 믿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드리는 말 아닙니까. 걱정 말고 푹 쉬시다가 돌아오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죄송하지만 저는 안 차장님만 믿고 쉬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부장님이 팀장들 다 모아놓고 하셨던 말씀 아닙니까. 부장님이 쉬어야 저희도 쉴 수 있습니다.
안 차장과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싱긋이 웃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던 강혜선과 눈이 마주쳤다.
“미안해, 이게 갑자기…”
“좋은 일이야?”
“응.”
“그럼 됐어.”
“….”
“안심이 된다.”
“뭐가?”
“이런 얼굴일 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난 그 의미를 모르겠단 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항상 퇴근 후나 쉬는 날 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때 당신을 보면 세상 모든 스트레스를 혼자 다 받고 있는 얼굴이었어. 내 입장에선 그게 당신이 회사에서 하고 있는 얼굴의 전부일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그런데 이렇게 신이 난 얼굴을 하면서 통화하는 거 보니까 괜히 내가 다 기분이 좋다. 일어나자.”
강혜선은 다시 한번 싱긋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난 그녀를 따라 레스토랑을 나왔다.
“시티 투어는 어떠셨어요?”
프런트 데스크 안에서 통이 물었다.
“통이 추천해준 대로 택시 안 타길 정말 잘한 거 같아요.”
“다행이네요.”
“내일 앙코르와트 사원을 한번 가볼 생각인데, 너무 아침부터 서두르고 싶지는 않고, 점심때 즈음에서 출발해도 괜찮겠죠?”
“날씨가 문제죠. 한낮은 피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점심시간 이후에 출발해도 다 볼 수 있을까요?”
“며칠을 머무르면서도 제대로 다 못 봤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죠?”
“그렇게 유적지나 건축물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요. 그냥 여기까지 왔는데, 앙코르와트 사원 정도는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럼 오후 2시쯤 출발하셔도 충분할 겁니다. 그래도 포토 스팟은 놓칠 수 없으니까 현지 가이드 한 명을 섭외하시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두 분이서 지도만 보고 이동을 하시면 그냥 오래된 사원을 보는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안 될 거예요. 두 분 다 영어를 잘하시니까 꼭 현지 가이드 한 명이랑 같이 움직이시면 간략하게 역사도 들으실 수 있고 여러모로 유익한 일정을 보내실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같이 사진도 찍으셔야 할 거 아니에요.”
“가이드….”
“괜찮으시면… 저희 호텔에서 개런티하는 가이드가 몇 명 있는데 제가 섭외해드리겠습니다.”
나와 강혜선은 짧게 합의를 하고 통에게 내일 오후 1시 반까지 호텔로 현지 가이드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안 차장으로부터 전날 모리엘츠 일반 컬렉션 두 벌과 하이엔드 컬렉션 한 벌이 추가로 나갔다는 보고 메일을 받았다.
안 차장이 자신만만하게 확신했던 대로 유펀 백화점의 사장 아들이 자신의 와이프를 데리고 와서 일반 컬렉션, 그 안에서도 조금 가격이 나가는 여성 이브닝드레스 두 벌을 구입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이엔드 컬렉션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평소 패션에 관심이 많고, 특히 중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특별한 컬렉션들을 쇼핑하기 위해 매년 수차례 유럽을 방문한다는 한 돈 많은 부호에게 판매가 됐다고 했다.
한국 돈 2억 4천만 원짜리 하이엔드 컬렉션이 판매가 된 거였다.
난 그저 수고했고, 남은 전시 일정 동안 조금만 더 힘을 내달란 답장만 보내주고 전화를 걸지는 않았다.
김 차장과 양 차장으로부터 온 메일들 역시 내가 없어도 홍성 영업부는 너무나 잘 돌아가고 있다는 보고였다.
“여기가 영화 툼 레이더에 나왔던 전투 신을 찍은 장소예요.”
현지 가이드와 함께 시작부터 이걸 언제 다 보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웅장한 사원을 찾았다.
처음 그 입구에 들어가서 양쪽으로 펼쳐지는 초록의 정원과, 그 정원을 데칼코마니로 만들어버린 연못을 봤을 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 가슴 벅참도 잠시.
정원을 지나 진짜 사원 안으로 들어서서 몇 분 정도 만에 난 계속 똑같은 색깔의 돌과 건축양식이 펼쳐지는 그 모습에 벌써 질려버렸다.
역시 난 이런 유적지보다는 최첨단 쇼핑몰을 돌아다니는 걸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온 거, 거기다 현지 가이드까지 섭외를 한 거, 운동한다는 생각으로 따라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따라다니다가 이번엔 또 다른 장소로 이동을 한다고 해서 생각 없이 그의 차에 올라 근처 다른 유적지로 이동을 했다.
이동 중간중간 가이드가 이동 중인 곳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꼼꼼하게 설명을 해줬는데,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런데…
거대한 얼굴 석상이 사방으로 펼쳐지는, 분명 EBS 채널이나 여행 프로그램 같은 곳에서 한 번 정도는 봤을 법한 눈에 익은 장소에 도착을 했다.
“저기 저 석상이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 거 같네요. 상당히 환하게 웃고 있네요.”
“제가 사진 찍어드릴게요.”
나와 강혜선은 습관처럼 나란히 서서 포즈를 잡았다.
“아, 여기서는 한 분씩 찍을게요. 옆으로 이렇게 한번 서보세요. 네. 얼굴도 옆으로… 네, 그렇게 잠시만 가만히 계세요. 사진으로 찍었을 때 이 석상의 코와 맞닿게 나오도록 사진을 찍으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주위 다른 사람들 대부분이 기도하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앵글에 따라 저 멀리에 있는 석상의 코와 사진이 찍히는 사람의 코를 맞닿게 만들기 위해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자, 그럼 찍겠습니다.”
난 합장을 하듯 두 손바닥을 가슴 앞으로 맞닿아놓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참 유치하지만 소원이 이뤄진다고 하니까 그냥 재미 삼아 소원을 한번 빌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우습지…
소원이 뭔지 모르겠다.
“소원 비세요.”
“….”
“하나, 둘, 셋!”
찰칵!
그리고 강혜선의 차례.
난 가이드 뒤로 서서 어떻게 사진을 찍고 있는지, 그의 스마트폰 액정을 유심히 쳐다봤다.
저 멀리 솟아 있는 석상의 코와 강혜선의 코가 스마트폰 액정 속에서 맞닿는 순간, 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절실해져 있는 강혜선의 얼굴을 발견했다.
“….”
그리고 그녀가 어떤 소원을 빌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저기… 저 한 번만 다시 찍어줄 수 있나요?”
“네, 물론이죠.”
“진짜 빌어야 되는 소원을 못 빌었네요.”
“네, 저쪽으로 가서 자세 잡으세요.”
“감사합니다.”
난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아까보다 훨씬 더 경건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속으로 빌었다.
우리 강혜선 스트레스 덜 받도록, 얼른 아기 주세요….
“무슨 소원 빌었어?”
강혜선이 물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며 난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았다.
“우리 마누라 소원 꼭 좀 들어달라고.”
“내가 무슨 소원을 빌었을지 알고.”
“예쁜 아기 얼른 주세요… 하고 빌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