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안심하고 충전하십시오
“일어나.”
강혜선이 날 깨웠다.
하지만 난 못 들은 척, 여전히 자고 있는 척 연기를 했다.
연기만 한 게 아니라 거기서 강혜선이 더 깨우지 않았다면 그대로 계속 더 잘 수도 있었을 정도로 비몽사몽 한 상태였다.
“일어나요. 내려가서 아침밥 먹고 다시 올라와서 자.”
“….”
“일어나라고.”
“아… 그냥 안 먹으면 안 돼?”
“그럴 거면 왜 조식 포함시켜서 예약을 했어? 일어나. 먹고 올라와서 다시 자.”
“몇 신데?”
“9시 반.”
촤라락.
강혜선은 말로는 도저히 날 움직이게 만들 자신이 없었던지 간밤에 꽁꽁 싸매놓고 있었던 커튼을 걷어버렸다.
눈 부신 햇살이 확 밀려들어 왔다.
인공조명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햇살이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기 시작한 강혜선.
그녀 역시 작정하고 게을러지고 싶은 모양인지, 전날 저녁 마사지를 받으러 갈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챙겨 입었다.
난 여전히 실눈을 뜬 채로 침대 머리맡의 협탁 위로 손을 더듬거려 스마트폰을 찾았고, 버릇처럼 메일을 확인했다.
“아, 맞다…”
시차를 생각하지 못하고 한 짓이었다.
아직 한국은 출근도 하기 전이고, 모리엘츠 중국 전시 건으로 베이징에 넘어가 있는 양 차장에겐 새벽일 거다.
“얼른 일어나. 조식 시간 30분밖에 안 남았어.”
강혜선은 강제로 내가 끌어안고 있던 이불을 빼앗았고, 오히려 난 적당해진 온도에 일부러 그녀를 골려줄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안 일어나면 나 혼자 간다?”
“가, 가… 잠깐만 좀 있어 봐.”
침대를 내려와 객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졌던 옷가지를 챙겨 입고 스마트폰을 챙겼다.
그리고 시티 뷰가 펼쳐지는 창가로 가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완벽한 캄보디아의 아침 풍경을 즐겼다.
뷰 자체는 시티 뷰인데, 거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리조트 야외 수영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벌써부터 수영장을 이용하는 호텔 이용객은 한 명도 없었지만, 조리 샌들 차림의 리조트 직원 몇몇이 선베드 위로 매트와 쿠션을 정리하며 하루를 시작하느라 분주했다.
나와 강혜선은 씻지도 않고 슬리퍼 차림으로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우린 엘리베이터 안에서 서로의 부스스한 머리 상태를 손봐주며, 여행 와서 아직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여행 마지막 날 사람처럼 폐인이 된 거 같다며 서로의 상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두 사람이요.”
조식 레스토랑 입구에서 객실 번호가 적힌 방 카드를 보여주고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여유롭게 짠 휴가 일정만큼이나 레스토랑 안도 여유로웠다.
대부분이 빈자리였고, 식사 중인 호텔 이용객들 역시 대부분이 우리처럼 일정을 빠듯하지 않게 잡고 투숙을 하고 있는 듯, 입고 있는 복장이나 식사를 하는 속도에 무척 여유가 있었다.
창가 쪽 데크가 펼쳐지는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 바로 옆자리였는데, 그 유리 미닫이문 밖으로는 데크 바닥이 펼쳐져 있었고, 그 데크 바닥의 끝엔 객실에서 내려다봤던 리조트 야외 수영장이 위치해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미스터 공, 그리고 미세스 강.”
깜짝 놀랐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나와 강혜선을 안내했던 직원이 아닌 다른 직원이 다가와서 나와 강혜선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당황한 기색을 들키기도 전에 테이블 위로 고양이처럼 두 손을 올려놓고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연스럽게 나와 강혜선은 앉은 상태에서 그를 내려다보게 됐는데, 어딘지 모르게 살짝 불편한 기분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다른 테이블에서도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직원들이 호텔 이용객들을 대하는 모습을 발견했고, 곧 이게 이 호텔의 서비스 스탠다드인 모양이다… 하고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저희 호텔에 머무시는 동안 두 분의 편안한 호텔 이용을 도와드리게 된 통 마리스지라고 합니다. 그냥 편하게 통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아….”
자연스럽게 그의 가슴팍에 붙어 있는 명찰로 눈이 갔다.
“어제 체크인하실 땐 제가 퇴근한 상태여서 모우린이 두 분의 체크인을 도왔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저와 모우린이 두 분의 만족스러운 시엠립 일정을 도와드리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간밤에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무척 잘 잤습니다.”
“혹시 뭐 필요하신 거나 불편하셨던 점은 없으셨습니까?”
“아니요. 모든 게 완벽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커피 준비해 드릴까요?”
“네, 저는 커피 라테…”
“라테 두 잔 부탁드립니다.”
“네, 식사 천천히 즐기시고, 10시부터 뷔페 음식은 철수를 하지만 테이블은 계속 이용하셔도 됩니다. 그럼 바로 커피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떠난 뒤 나와 강혜선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뛰어난 호텔 서비스에 다시 한번 감동을 받았다.
항상 업무차 출장을 다니며 유럽의 3성급 호텔을 이용해 왔고, 혹 운이 좋아 비즈니스호텔을 이용할 기회가 있더라도 잠만 잤지 호텔 서비스라는 걸 제대로 받아 보지 못했던 내 입장에선 무척 신선했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뭘 잘 모르면 그냥 비싼 걸 선택하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고.
강혜선 역시 통이 떠난 뒤 우리 기준에서 조금은 과한 호텔 서비스에 원숭이처럼 아랫입술 속으로 윗입술을 숨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막 미친 듯이 비싼 호텔은 아니었다.
그저 씨엠립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리조트 대형 호텔이었고, 어플의 이용 후기도 가장 좋은 거 같았으며 무엇보다 씨엠립 시내와 가까워서 선택한 호텔이었다.
물론 한국과 물가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소리겠지만, 한 번씩 강혜선과 부산에 내려갈 때 종종 이용해 왔던 해운대 쪽의 특급 호텔 성수기 때와 비슷한 가격의 호텔이었다.
그리고 나와 강혜선은 시설은 당연히 부산 해운대의 오래된 5성급 호텔들보다는 뛰어나겠지만, 딱 그 정도의 서비스 정도만 기대를 했었고.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비록 여행 첫날은 어제였지만, 어제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묘한 기대와 설렘이 시작되는 아침이었다.
“안 되겠다.”
“뭐가?”
난 도착한 커피 라테 한 모금으로 속을 달래놓고 야외 데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야외 수영장 영업을 준비 중인 호텔 직원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먹고 나가자.”
“잔다며?”
“아니야. 나가자.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무작정 게을러지다가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었는데…갑자기 시간이 아깝단 생각이 들어.”
내 말에 강혜선은 기다렸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마치 짓궂은 장난을 모의하듯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식사는 괜찮으셨습니까?”
레스토랑 직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호텔 로비에서 다시 마주친 통.
그는 조리 샌들 차림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우아하게 우리 곁으로 다가왔고, 자신이 우릴 위해 해줄 게 없느냐고 물어봤다.
“나가서 시내 구경을 좀 해볼까 하는데, 나중에 택시 좀 잡아 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혹시 계획하신 일정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뇨, 그런 거 전혀 없이 왔어요.”
퉁은 손목에 채워진 카시오 전자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라면, 제 개인적인 생각인데 택시보다는 톡톡이를 한번 타 보시는 건 어떠세요?”
“톡톡이요?”
“네. 그냥 편하게 그거 타고 시내 한 바퀴 돌아보시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날씨가… 너무 완벽하잖아요.”
호텔에서 연계를 해주는 기사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반 오토바이 뒤로 사람이 탈 수 있는 수레가 붙어 있는 동남아풍의 교통수단이었는데, 재미 삼아 한번 타보기로 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일반 톡톡이보다는 훨씬 깔끔하게 정비가 되어 있고, 또 수레 역시도 깨끗해서 기분을 내기에는 그만이었다.
나와 강혜선은 그 톡톡이에 올라 그리 넓지 않은 씨엡립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는 동안 평소 사진이라면 음식 사진을 찍는 게 전부였던 우린 그 톡톡이 수레에서 셀카봉을 이용해 어색했지만 다정한 포즈를 잡아봤고, 씨엠립 시내 풍경을 눈과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 오길 정말 잘했어!”
늦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시내 투어를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고, 나와 강혜선은 객실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간단하게 피자와 스파게티로 점심을 해결했다.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니까 괜히 기분 좋다. 다행이야. 내년에도 또 오자.”
“내년엔 다른 데 가 봐야지.”
“어디라도. 이렇게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시간 맞춰서 나오자.”
“내가 문젠가? 당신 회사 일이 문제지.”
“이제 문제없어. 아니, 지금 생각해 보면 원래 문제 같은 건 없었어. 그냥 뒤처지고 싶지 않은 욕심. 한 발이라도 남들보다 앞서고 싶은 욕심 때문에 시간을 못 냈던 거지, 사실… 마음만 먹었음 이렇게 다문다문 며칠이라도 시간을 내는 일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거 같아.”
서로가 즐기고 있는 여유에 건배를 하며 난 시원한 캄보디아 로컬 맥주 한 모금을, 강혜선은 생과일 오렌지 주스 한 모금을 마셨다.
그렇게 빈 접시들을 테이블 위에 그대로 올려두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다가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열었다.
그런데…
“…!”
베이징에 있는 안 차장으로부터 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왜 그래?”
이메일 내용에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심각해져 있으니 강혜선이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잠깐만….”
난 강혜선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안 차장이 보내온 메일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전날 첫 모리엘츠 중국 전시에서 일반 여성 이브닝드레스 컬렉션 다섯 벌이, 그것도 한 손님에 의해 판매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전시 첫날이었다.
한국에서보다 더 큰 홍보 이벤트를 한 건 사실이지만, 전시 첫날 그것도 한 손님에 의해 다섯 벌이 나갔다는 보고를 받으니 정신이 없었다.
“회사에 무슨 일 있어?”
가급적 휴가 기간 동안은 회사 일에 크게 신경을 안 쓰려고 했다.
물론 맡고 있는 부장 포지션 자체가 아예 전화기까지 다 꺼놓고 휴가랍시고 내 개인 시간만 가질 순 없는 포지션이지만, 그래도 정말 큰일이 아니면 보고 메일 정도만 제때제때 확인을 해주고 수고해 달란 답장만 보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건…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해보지 않고는 견디기가 힘든 뉴스였다.
“나 전화 한 통만 할게.”
“해. 근데 뭐 심각한 일이야?”
난 그저 강혜선을 향해 고개만 한차례 흔들어준 다음 메신저 앱 보이스톡으로 베이징에 있는 안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들려요?”
-여보세요?
“안 차장님?”
-네, 들립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네, 부장님.
연결은 됐는데, 대화의 텀이 생기는 통화였다.
안 차장의 대답이 한 박자 늦게 오는 거 같았다
“제가 다시 전화할게요.”
결국 난 보이스톡 대신 일반 국제전화로 안 차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가뜩이나 나도 지금 캄보디아인데, 베이징에 나가 있는 안 차장에게 국제전화를 걸다니…
다음 달 휴대폰 요금 장난 아니게 나오겠단 걱정도 잠시.
전시 첫날부터 말도 안 되는 성과를 만들어낸 안 차장의 목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었다.
“잘 들려요?”
-네, 이제 괜찮네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한 손님이 다섯 벌이나 초이스를 했다니…”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중국에선 최소 10벌 예상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모리엘츠가 원래 중국 테이스티예요?”
-아마 오늘도 어제 못지않게 나갈 겁니다. 살 만한 사람들 몇 명이 오기로 했거든요.
“…?”
-휴가는 잘 보내고 계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살 만한 사람들이 오기로 했다는 게…”
-부장님.
“네.”
-제발 마음 놓고 쉬세요. 저희는 또 그런 게 있습니다. 부장님이 자리를 비우셨을 때, 더 괜찮은 성과를 만들어내 보고 싶은…
“…!”
-저만 그런 건 아닐 거니까… 안심하고 충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