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처음 홍성에 입사했을 때 난 부장은 신인 줄 알았다.
그 위로 더 대단한 존재들이 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만날 수 있는 최고 선이 바로 부장이었으니까.
그땐 부장이 무섭다는 생각도 크게 없었던 거 같다.
오히려 부장은 무척 포근하고 또 천사처럼 미소만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천사 같은 부장이 고함을 지르고 저기압일 때엔 차장, 팀장들이 무능하다고만 생각을 했었다.
부장 비위 하나 제대로 못 맞추나… 하면서 말이다.
저렇게 착하고 인자한 부장님을 어떻게 저렇게까지 화가 나게 만들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대리를 달았을 땐 부장이 별것도 아닌 일로 내게도 화를 내는구나… 하는 걸 처음 알게 됐다.
그때 처음으로 부장이 팀장, 차장보다 무서운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고, 때론 더 치사하기도 하다는 걸 몇 차례나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사소한 행동 말 한마디에 모두 뼈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팀장을 달았을 땐 부장이라고 하면 괜히 그 얼굴만 떠올려도 소화가 잘 안 되고, 무조건 악당, 날 못살게 굴기 위해 출근하는 존재 정도로 그 격이 많이 떨어지게 됐다.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존재였으니까.
매일같이 마주치고 잔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막상 내가 부장을 다니까 새삼 부장의 위치가 결코 쉬운 포지션이 아니라는 걸 최근 들어 절실하게 느낀다.
차장은 오히려 쉬운 포지션이었다.
차장, 팀장 포지션을 둘 다 오래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 둘 중 뭐가 더 쉬웠냐고 물어보면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장이 백 배는 더 편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박 이사와 장 본부장의 내공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거지.
장 본부장이 있을 땐 바람막이 역할이라도 해줬다.
내가 직접 뭔가를 책임질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최소한 영업부 안에선 모두가 그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했었고.
비록 독선적이다, 자기 사람만 챙긴다, 사이코패스다… 하는 뒷담화는 차장 때 비해 더 많이 늘었지만, 최소한 그의 리더십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전사 운영본부로 떠난 지금은 내가 영업부의 전체 바람막이 역할을 해야 하는데, 외부에서 밀려오는 바람보다 내부에서 시작되는 바람이 날 더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나에 대한 좋지 못한 소문들이 점점 내 귀에까지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문의 시작이 다름 아닌 영업부 내부라는 사실에 난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승진이 빨랐던 만큼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는데, 장 본부장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의 운용의 묘, 혹은 카리스마에 억지로 눌려 있던 것들이 내가 부장 승진을 하기가 무섭게 조금씩 스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또 피우네, 또….”
“본부장님….”
팀장들을 모두 불러놓고 한바탕 시원하게 퍼부은 다음 17층에 올라갔었다.
담배 한 대를 피우며 내가 왜 날 적대시하는 상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곰곰이 따져 보고 있을 때였다.
장 본부장이 철에 안 맞게 재킷도 챙겨 입지 않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끊을 거라더니 어떻게 작심삼일을 못 해?”
“그 작심삼일을 3일 단위로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거 끊는 게 그렇게 어려워?”
“본부장님이 하실 소린 아닌 거 같은데요?”
“난 그래서 누구처럼 끊겠단 장담 같은 건 애초에 안 하고 다녔잖아.”
“맞네요.”
“차 팀장은 이제 좀 괜찮아?”
장 본부장이 내 옆으로 나란히 서며 저 아래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아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평상시엔 멀쩡해요.”
“근데 얼굴이 왜 이렇게 무거워?”
“좀 어떠십니까, 전사 운영본부는?”
“왜? 사람에 치여?”
“그렇네요. 이게 참… 어이없게도 치이고 있네요.”
“홍성 에이스 공 부장을 위에서 찍어 누르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거고… 누가 계속 치고 올라와?”
“치고 올라오는데… 특정 누군가가 치고 올라오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런 거라서 애매합니다.”
“그럴 때 사람이 진짜 미치는 거야. 어디가 딱 정확하게 안 좋으면 안 좋은 그 부분만 해결을 하면 되는데, 그런 거 없이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안 좋을 때… 그때가 제일 힘들지.”
“본부장님도 그럴 때가 있으셨습니까?”
“없었겠어?”
“그럴 땐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했어.”
“역시….”
“솔직함과 무례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솔직한 게 쿨한 건 줄만 아는 사람들에겐 똑같이 내 속이 내 속인 것처럼 굴어줬고, 뒤에서 남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겐 강압적으로 입을 다물게 만드는 대신 말할 상대를 없게 만들어줬지.”
“크흐….”
“대신….”
“…?”
“내 사람은 끝까지 챙기려고 노력했다.”
장 본부장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서서 날 바라봤다.
“사람이 그렇거든. 차별당하는 누군가를 보게 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심을 하면서 그와 동시에 자기는 저런 입장이 되지 않으려고 긴장을 해. 그리고 자신이 차별의 대상이 되면 홀로 남겨진 거 같아서 두려워하기 마련이야.”
“….”
“차별해. 그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다.”
“차별… 차별을 하라 말씀이시군요.”
“차별이야 공 부장도 사람인데 계속 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그걸 좀 더 노골적으로 해 봐.”
“….”
“당당하게. 마치 너한텐 이렇게 해주는 게 정의라는 뉘앙스로 말이지. 치사하다 생각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치사하다고 생각해라,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내가 바뀌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오히려 더 빡세게 차별해 줄 테니까… 그런 마인드로.”
“그러다 상황이 더 악화되면요?”
“그런 걱정을 미리 하는 사람이 과연 상황을 더 악화시킬까? 감이라는 게 있을 거 아냐, 공 부장도. 그런 감도 없이 업계 최연소 부장을 단다는 게 말이나 돼?”
“….”
“우린 역사에 기록되는 사람들이 아니잖아. 홍성의 위인이 되려고 하지마. 그럴 필요 없어. 홍성이 우릴 영원히 기억해 줄 거 같아? 그냥 다들 한 번쯤 거치고 가는 영업부 부장 타이틀을 지금 이 순간 공 부장이 달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지난 부장들보다 무조건 잘해야지… 하는 생각? 의미 없다. 그런 의미 없는 것들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어차피 부장 타이틀 달았으니까, 그냥 다른 부장들처럼 여기저기 옮겨지며 술자리 안주가 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해. 다 공 부장이 잘나서 그런 거야. 질투, 시기 정도는 하게 내버려 둬라. 그런 낙이라도 있어야 팍팍한 직장 생활에서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거 아냐.”
“푸훕….”
“그런 거에 스트레스받아서 끊겠다고 했던 담배 다시 피우지 말고, 그럴 정신에 제수씨랑 데이트나 자주 해. 어디 애가 걱정만 한다고 생기냐?”
“안 그래도 다음 달에 저 휴가 갑니다.”
“휴가?”
“네. 결혼 1주년 기념으로 가까운 동남아라도 한번 다녀올까 합니다.”
“와… 팔자 좋네. 나는 상무님 휴가 가실 때 맞춰서 써야 되는데….”
“대신 여름 휴가 가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하긴. 생각해 보면 홍성 입사하고 지금까지 여름에 피서다운 피서 제대로 가 본 적 한 번도 없는 거 같다. 어떻게 이렇게 살았지? 참… 이렇게 일만 하려고 태어난 건 아닐 텐데 말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런데….”
“…네.”
“그런 건 좀 있어.”
“뭐요?”
“다시 내 이십 대, 삼십 대를 그렇게 살아 보라고 하면 때려죽여도 못 한다고 하겠지만, 내 지난 이십 대, 삼십 대한테 미안하게도 그 시간들이 후회스럽지는 않아. 오히려 고마워. 그렇게 살았으니 지금 여기서 공 부장이랑 이러고 있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 아직 삼십 댄데….”
“우선 애부터 만들어. 고민은 그 뒤에 천천히 해도 충분해. 다 때가 있어. 억지로 그 때에 다 맞춰 가면서 살 필요는 없지만, 맞출 수 있으면 맞추는 게 더 좋다고 봐, 난. 그리고 내가 봤을 때 공 부장이나 제수씨는 지금이 딱 그때인 거 같고. 나 지금 먹고 있는 장어즙 있는데, 몇 개 줄까?”
“아직 드십니까?”
“장모님이 계속 짜다 주시네.”
“으으으… 그때 주셔서 한번 먹어봤는데, 너무 비리던데.”
“맛으로 먹나, 어디.”
“그럼 남는 거 있음 몇 개만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와 강혜선은 앙코르와트를 구경하기 위해 캄보디아 시엠립으로 결혼 1주년을 자축하기 위해 휴가를 떠났다.
날씨 따윈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관광이 목적이 아니었고, 휴식 겸 힐링이 목적이었으니까.
앙코르와트 사원만 시간 날 때 가보면 된다.
나머지는 뭐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사진으로 대신 감상해도 충분할 거 같았고.
굳이 캄보디아를 선택했던 이유는,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할 여행, 그래도 사진 한 장 정도 유명한 곳에서 찍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동남아 국가 몇 군데를 검색하다가, 앙코르와트 사원 앞에서 사진 한 장 같이 찍어서 기념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 정도였다.
강혜선 역시 결혼기념일에 남편과 함께 여행을 간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어디에 가서 뭘 할지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녀 역시 회사 일로 늘어지는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런 우리에게 캄보디아 시엠립은 흠잡을 곳 없는 완벽한 휴양지였다.
일상을 완전히 벗어나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비즈니스 클래스를 이용해보는 것 자체가 이미 나와 강혜선에게는 완벽한 휴가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예약해둔 시엠립의 가장 고급 리조트 호텔의 시티 뷰 객실은 그 완벽한 휴가의 정점을 찍어 주었고.
주말까지 끼워서 6박 7일로 떠났는데, 앙코르와트 사원을 방문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서, 최대한 그 6박 7일을 게을러지는 데 사용하자고 강혜선과 미리 약속을 했었다.
호텔에서 소개해 준 근처의 마사지 숍에서 두 시간 넘게 전신 마사지를 받았고, 밖으로 나와서는 야시장에 즐비하게 늘어선 닥터피시 수족관에 발을 담그기도 해봤다.
그렇게 일정 첫날을 아무것도 버릴 것 없이 알뜰하게, 하지만 제법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일정의 마지막을 피아노라는 꽤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칵테일 한 잔과 함께 마무리했다.
“미리 자수할게.”
“뭐?”
“다음 달 카드값이 조금 많이 나올 거 같아.”
“왜?”
난 그저 싱긋이 웃으며 강혜선 앞으로 결혼기념일 선물로 준비한 작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내밀었다.
평소 강혜선과 함께 백화점 윈도쇼핑을 하며 데이트를 할 때마다, 유독 한 브랜드 매장 앞에서만 멈춰 서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미쳤나 봐, 진짜! 이게 얼마짜린데!”
“그러니까. 이게 뭐 얼마짜리라고 계속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나 몰라. 어쩔 수 없어. 못 물려. 그냥 하고 다녀.”
“진짜 제정신 아니지?”
“이제 이 정도 사치 정도는 하면서 살자. 이런 기분까지 못 즐긴다면 나중에 너무 후회할 거 같다.”
“….”
“아직 나한테 사치하는 건 힘든데… 당신한테 하는 건 하나도 안 힘들어.”
“얼마 줬어, 이거?”
“우리 회사에서 한 번씩 기념일마다 백화점 상품권 나눠주잖아. 그거하고 또 당신 몰래 비자금 만들었던 거하고… 나머지는 카드로 긁었어.”
“비자금을 만들었어?”
“이럴 때만 쓰려고. 폼 안 나게 당신 선물 사는 데 공동 카드를 쓰고 싶지는 않더라고. 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긁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정도는 이해해줘라.”
“난 아무것도 준비한 게 없는데….”
“그냥 기분 좋게 이거 하고 다녀. 그럼 난 충분해.”
“왜 그래? 갑자기 왜 평소 안 하던 콘셉트야?”
“실은 나… 아침에 비행기 타기 전에 장어즙 먹었어. 나 지금 막 미칠 거 같아.”
“그럼 진작에 말을 하지. 참… 가자.”
“크흐… 역시.”
“오늘 막 너무 힘차게… 짐승으로 돌변해도 괜찮나?”
“제발.”
“인정사정 안 봐줘도 괜찮아?”
“플리즈.”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막 그렇게 한다?”
“말하는 반만큼만 해봐라, 인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