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88화 (188/325)

# 188

전 말 길게 안 합니다

차 팀장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전무님 방에서 카드를 받아 사무실로 내려왔을 때였다.

양 차장이 차 팀장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내가 등장하기가 무섭게 차 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티션 입구까지 날 마중 나왔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뭐가요?”

“괜히 저 때문에… 전무님한테 많이 깨지신 거 아닙니까?”

“아닌데? 나 칭찬받고 오는 길이에요, 지금.”

“…,”

난 불안해하는 차 팀장 앞으로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전무님의 법인 카드를 내밀었다.

“크흐… 거봐, 내가 뭐랬어.”

양 차장이 툭 하고 자신의 어깨로 차 팀장의 가슴을 때렸다.

“전무님 카드 직접 받은 팀장은 제가 알기로 현재 영업부 안에선 저 다음으로는 차 팀장이 처음일 거예요.”

“….”

“수고하셨습니다. 준비하신 발표 내용 최대한 하나도 안 빠뜨리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 진짜 멋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아니긴,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비싼 거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먹었는지 확인해보고 어설프게 먹었다 싶으면 다음부터 카드 같은 거 안 주실 거라고 경고까지 하셨어요. 지혜 씨 본사 복귀 환영회 겸 회식 한번 하세요.”

“…네.”

“그럼 일합시다.”

난 카드만 전달해주고 몸을 돌렸다.

그런데…

“공황장애는 저희 엄마도 있어요. 숨기실 이유 하나 없는 건데, 그걸 왜 숨기셨어요? 숨기는 게 더 스트레스였겠다.”

이지혜의 목소리였다.

난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지혜의 말에 차 팀장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걸 다 인정하고 있었다.

뭐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닌 게 되는 건가?

그런데 더 놀라웠던 건 다른 팀원들도 이제는 다 알게 된 거 같았다.

“솔직히 저희는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

팀원 하나가 어색하게 고백했다.

그 고백 앞에 나뿐만 아니라 양 차장도 화들짝 놀랐다.

“전 아닙니다.”

난 손을 들어 난 끝까지 비밀을 지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양 차장 역시 자신이 말하고 다닌 게 아니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저도 아닙니다”

파티션 건너편에서 나 팀장이 말했다.

“우리 셋만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내 말에 이지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히 대답했다.

“전… 안 차장님한테 들었는데요?”

“저도요. 다른 팀원들한테 말하지 말고 너희끼리만 알고 있으라면서….”

“저도요. 옆에서 눈치껏 잘 도와주라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차 팀장은 이제 모든 게 홀가분해진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어떻습니까. 어차피 다 알게 된 일이고….”

“아니 진짜 그 인간은 어떻게 그러지?”

“진짜 괜찮습니다, 부장님. 오히려 절 배려해 주시겠다고 저희 팀원들한테만 살짝 귀띔을 해주신 거 같은데, 오히려 감사하죠.”

“아니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그때 그 자리에 안 차장은 없었잖아.”

“…!”

“딱 나랑 양 차장님, 안 팀장만 알고 있었던 사실 아냐?”

“…?”

“두 사람 다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 했었죠?”

“네.”

“네, 맹세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습니다.”

“저도요. 저도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혹시 차 팀장이 안 차장님한테 말했어요?”

“…아뇨.”

“그럼 안 차장님은 그걸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이에요?”

안 차장.

모리엘츠 건으로 갤러리아 백화점으로 외근을 나가 있는 상태였다.

이건 업무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냥 개인적으로 너무 궁금했다.

도대체 안 차장은 차 팀장의 상태를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우린 또 궁금한 건 절대 못 참으니까.

점심시간에 맞춰서, 준비 중인 모리엘츠 전시 상황에 대해 물어볼 겸 안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때요? 준비는 잘되고 있습니까?”

-완벽합니다.

“부스 위치는요?”

-저희 쪽에서 요구한 대로 바꿔 보겠다고 합니다.

“무조건 바꿔야 됩니다, 그거. 그걸 못 바꿔줄 거 같음 조명 위치라도 바꿔 달라고 하시고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오늘도 거기서 바로 퇴근하십니까?”

-장 팀장이랑 박 대리는 먼저 보낼 겁니다. 저는 조금 있다가 전시 진행 요원들 입힐 유니폼 도착한다고 하니까, 그거까지만 확인하고 여기서 바로 퇴근하도록 하겠습니다.

“내일은요?”

-내일도 여기로 바로 출근해야 할 거 같습니다.

“오케이, 오케이… 조금만 더 힘내세요.”

-예얍!

“아 참, 근데 안 차장님.”

-네, 부장님.

“그… 차 팀장 공황장애 있는 거 어떻게 알고 계셨어요?”

-뭘요?

“모르는 척하지 말고. 다 들었습니다. 차 팀장 팀 직원들한테 안 차장님이 다 말했다면서요?”

-아, 그거….

“아니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양 차장님도 아무한테도 말 안 했다고 하고 나 팀장은 자기 부모님까지 걸고 안 했다고 하던데…”

-저는 부장님이 하시는 말씀 들은 건데요?

“제가 언제요!”

-그때 화장실에서…

“언제?”

-화장실에서 손 씻으시면서 차 팀장한테 이야기하시는 거 소변 보면서 들었죠.

“아냐, 아냐… 이건 말이 안 돼. 그때 내가 분명 거울로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는 거 확인했었는데?”

-저는 세면대 바로 옆에 칸막이 있잖아요? 그 칸막이 옆에 붙어 있는 소변기에서 볼일 보고 있었습니다.

“아, 그럼 인기척이라도 좀 내지!”

-비밀 이야기 하시는 거 같아서 그냥 듣고만 있었죠. 괜히 저 때문에 할 이야기 못 하실까 봐.

“그 넓은 자리 다 놔두고 왜 하필이면 가장 구석진 곳에서 볼일을 보신 겁니까?”

-구석진 자리 좋아하는 취향이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와… 진짜 대단하다.”

-뭐 그 정도 가지고….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도 하루 종일 외근입니까?”

-아뇨, 내일 점심시간 전에 마무리 짓고 사무실 들어갈 겁니다.

“잘됐네.”

-왜, 내일 뭐 있습니까?

“내일 팀장 전체 미팅 한번 해볼까 합니다. 영업 마케팅부, 기획부, 해외 영업부 전부.”

-오…

“처음이자 마지막 팀장 전체 미팅이 될 겁니다.”

-…네?

부장 승진 후 처음으로 영업부 팀장 전원을 소집했다.

장 본부장이 있었을 때만 해도 일주일에 최소 한 번씩은 팀장 미팅이라는 걸 했었는데, 난 그걸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나에 대한 직접적인 적대심은 없었지만, 영업 마케팅부엔 상반기 정기 인사 이후 패배 의식이 짙게 깔려 있었고, 난 그 바이러스를 직접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물이 너무 깨끗해도 물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하지 않나.

난 오히려 적당한 바이러스는 영업부 전체 밸런스를 맞춰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김 차장이 직접 영업 마케팅부에 스며 있는 패배 의식을 정화시키길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꼭 부장 타이틀을 잡았다고 내가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걸 먼저 인정하면 자발적인 노력을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1/4분기가 정리되어 가는 시점까지 영업 마케팅부의 매출 그래프가 계속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보니 내가 직접 전 팀원을 소집해서 약간의 충격요법을 써야 되는 상황이었다.

“제가 미리 차장님들한테는 전달을 다 했는데, 제가 영업부장으로 있는 동안 전체 팀장 미팅은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겁니다.”

“…!”

“사실 의미 없는 자리잖아요, 팀장 미팅.”

“…”

“지금도 보세요. 저만 말 못 해서 죽은 조상이 있는 사람처럼 혼자 계속 떠들고 있고 다른 분들은 다들 듣기만 하는데, 이게 무슨 미팅 시간이에요? 지시 시간, 전달 시간이라고 하면 또 모를까.”

“….”

“저도 팀장 기간 없이 바로 차장, 부장을 달았던 건 아니니까. 이런 자리가 얼마나 피곤하고 또 팀장님들 입장에서 시간 낭비라고 생각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딱히 필요한 자리라는 생각은 안 들어요. 그래서 앞으로는 전달 내용이 있음 단톡방에서 공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 시간 끝나는 대로 단톡방을 하나 만들어서 차장, 팀장님들을 다 초대할 테니까 수락만 해주세요. 그럼 앞으로 이런 자리는 없을 겁니다.”

여전히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영업 기획부, 해외 영업부 소속의 팀장들은 영업 마케팅부 소속의 팀장들을 의식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고, 영업 마케팅부 소속 팀장들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불편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거겠지.

“그 단톡방은 근무 시간에만 사용하는 거로 합시다. 근무 시간 이후, 주말, 빨간 날에 그 단톡방에 뭔가 글을 올리는 사람은 이유 불문하고 벌금 만 원씩 내는 거로. 진짜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럴 땐 벌금 낼 각오하고 사용하는 거로 합시다. 그리고 팀장 미팅은 앞으로 각 차장님들이 알아서 진행하도록 하세요. 차장님들은 미팅 결과만 저한테 올려주시면 됩니다.”

“….”

“그리고 다음 달에 전 휴가를 쓸 생각입니다.”

“…!”

“다들 아시겠지만, 그동안 제가 휴가를 제대로 써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작년에 신혼여행 간다고 며칠 주말에 붙여서 쓴 거 말고는 거의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쓰기 싫어서 안 썼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아요. 다 이리저리 상사들 눈치 살피느라 타이밍을 놓치고, 그게 몇 해 반복되다 보니까 그냥 귀찮아서 안 썼던 거뿐이지. 그런데 앞으로는 매년 꼬박꼬박 제가 쓰고 싶은 날짜에 휴가를 쓸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모이신 차장님들, 부장님들도 생각 너무 많이 하지 마시고, 또 괜히 부하 직원들 눈치 주지 마시고 원하시는 날짜 있으면 거기에 맞춰서 휴가 쓰세요.”

“….”

“제가 휴가를 안 쓰면 차장님들이 못 쓰실 거고, 또 차장님들이 휴가를 안 가시면 팀장들이 휴가 쓰기가 눈치가 보일 겁니다. 그런 무식한 문화를 계속 이어갈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는 휴가 계획서 부분에 있어서 팀장님들이 팀원들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해서 올려주세요. 특히 예비군 훈련 가야 하는 직원들. 눈치 주지 마세요. 왜 눈치를 줍니까? 그때 영업 마케팅부에서 직원 하나 퇴사하면서 회사 인터넷 게시판에 글 올렸던 거 다들 기억하시죠?”

“….”

“아, 혼자 말하려니까 입 아프네.”

“네.”

“기억합니다.”

그제야 팀장 몇 명이 억지로 대답을 내놓았다.

“신입이라 내부 사정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싸지른 글이긴 했지만, 양심적으로 말해서 그 친구 고자질이 백 퍼센트 헛소리는 아니었잖아요. 우린 그냥 이미 나간 사람이니까 그 친구가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무마하고 말았지만… 전 그 친구가 사내 게시판에 올린 글 보면 어떤 부분에선 좀 찔리기도 하던데, 다른 분들은 그런 거 없었어요?”

“….”

“김 차장님.”

“네, 부장님.”

“미팅 분위기가 도대체 왜 이럴까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좀 심하다. 이건 뭐 듣기 싫다는 기색이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

“사실 장 본부장님이 계실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잖아요. 그 말인즉 제가 부장을 단 게 문제란 말일까요?”

“아닙니다.”

“좋습니다. 저도 더 이상 말 안 하고 싶습니다. 제가 다 끌어안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마세요. 따라올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저도 안 데리고 갑니다. 다만… 이거 하나 명심하세요. 제 뒤에서 저에 관한, 혹은 영업부에 관한 이상한 소문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들, 그리고 자기 이직할 거라고 여기저기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 다 들립니다. 부끄러운 줄 아세요. 수준 이하니까. 제가 지금 상당히 많이 참아주고 있다는 것만 아세요. 그리고 제가 참아드리고 있는 이유가, 여기 계신 김 차장님 때문이라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제가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말만 하지 마시고요, 차장님. 부탁 좀 드립니다, 진짜. 도와주세요.”

“…네.”

“이런 말 하는 저라고 어디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안 따라오면, 괜히 안 되는 거 잡고 힘 빼지 마시고 그냥 나가라고 하세요. 그럼 남아 있는 대리들이라도 빨리빨리 팀장 승진시켜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네, 알겠습니다.”

“진짜 나갈 사람들은 이런저런 구질구질한 소리 소문 안 만들어내고 그냥 바로 나가요. 꼭 보면 나가지도 않을 거면서 바이러스만 퍼뜨리지. 딴 사람들 나가게 만들려고. 자신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경쟁자를 떼내고 싶은 거야, 뭐야 도대체? 그리고 전 분명히 말했습니다. 따라올 마음이 없는 사람은 저도 안 데리고 간다고. 제가 지금까지 영업부에서 해왔던 거, 그리고 제 성격, 지금 제 포지션 모든 걸 감안해서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서들 이해하고 조심하세요. 전 말 길게 안 합니다. 그럼 미팅은 여기서 끝. 앞으로는 차장님들이 알아서 팀장 미팅 진행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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