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
상무 전성규
“운동 같은 건 따로 안 하시구요?”
“…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의사가 물어보는 몇 가지 질문들이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우리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고 있는 이유가 꼭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인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내가 느꼈던 불안, 공포의 성질이 딱 그랬다.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는 의사의 편안한 표정까지도 갑자기 날 배려하는 표정인 것만 같았고…
“흐음…. 술 담배를 많이 하시네요?”
“…네.”
의사는 내가 미리 체크해 뒀던 질문지를 읽어내려가며 혼잣말을 하듯 낮게 말했고, 그때부터 난 뒷골이 조금씩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난 침을 한 번 꼴깍하고 삼키며 의사의 표정에 집중했고, 의사는 한참 동안 컴퓨터 모니터에 뜬 검사 결과와 내가 작성했던 질문지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좀 줄이시는 게 좋겠는데… 술도 술이지만 담배는 좀 줄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백해무익 아닙니까.”
“…그렇죠.”
“운동도 가벼운 맨손 체조 같은 거라도 꾸준히 좀 하시고요. 굳이 뭐 따로 시간을 내서 돈 주고 어디 가서 하라는 게 아니라 그냥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한다든지, 스트레칭을 한다든지… 그런 거 있잖아요.”
“…네.”
“혹시 현재 하고 계신 일이….”
“영업 관련 일을 하고 있습니다.”
“흐음….”
“최근 들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고….”
“그런 건 뭐 크게 상관 없습니다.”
“…그렇군요. 근데 혹시 무슨….”
의사는 질문지를 마우스 패드 옆으로 내려놓고 그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려놓더니 깍지를 꼈다.
그리고 그 깍지 낀 손 위로 턱을 붙여놓고 말했다.
“아니에요, 별 이상은 없습니다.”
우와, 이게 뭐라고 마치 지옥을 경험하고 있다가 천국 문이 열리는 것만 같았다.
“검사에 결과만 놓고 보면 별 이상이 없는데… 약간 우려되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긴 있습니다.”
“어떤….”
“정자 수 자체는 상당히 많습니다.”
“좋은… 건가요?”
“나쁠 이유는 없죠. 활발하게 생성이 되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생성 자체는 활발하게 잘되고 있는데… 쉽게 설명해서 중간중간 헤엄을 못 치는 애들이 더러 있네요.”
“아….”
“운동 같은 거 좀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술 담배를 많이 하시는데, 하고 계신 일에 따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컨트롤을 알아서 잘하시는 게 중요하고요. 중간중간 헤엄을 못 치는 애들이 있다는 말은 정자 수 자체는 많지만 대체적으로 헤엄을 치는 힘 자체가 부족하다는 말이 되는 거거든요.”
“네.”
“지금 당장 뭐 딱히 걱정하실 건 없을 거 같고요, 지난주부터 드시기 시작했다는 엽산은 꼭 챙겨 드세요.”
별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옥을 한 번 경험했었기에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은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신체 나이라고 해야 하나?
검사 결과는 딱 현재 내 나이에 맞는 수치로 나왔고, 살짝 염려되는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역시도 임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아니라는 의사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가벼워진 발걸음과는 상반되게 신경이 쓰였다.
핑계를 대는 게 아니라 영업 관련 직장 생활을 하면서 따로 시간을 내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힘들다.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술 담배는 몸에 안 좋으니까 안 해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하지만 운동을 하고, 또 술 담배를 끊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게 문제지…
2년에 한 번씩 종합 검진을 받을 때마다 내 건강에 대한 의심과 걱정을 하면서도 오늘처럼 막상 별 이상이 없다는 검사 결과만 손에 넣으면 다시 또 몸을 혹사시킬 수밖에 없는 우리.
그러고 보면 참 산다는 것 자체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의 모습과 하나 다를 게 없는 거 같다.
“후우….”
그리고 난 바로 조금 전 담배는 꼭 좀 줄이라는 의사의 당부를 상기하면서도 차에 올라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
그런데…
담배. 끊기는 진짜 끊어야 할 거 같았다.
내 몸에 대한 종합 검진을 받고 그 결과를 확인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운동 부족이나 그 외 내 몸에 절여져 있는 생활 습관들이 어쩌면 우리 2세의 건강과 직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실감이 확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 나 지금 막 검사 결과 듣고 나오는 길이야.”
-뭐래?
“이상 없대.”
의사가 했던 우려까지 전달하지는 않았다.
전달을 하는 순간 잔소리가 이어질 건 너무나 뻔했으니까.
그리고 그 부분은 지금부터 내가 알아서 관리를 하면 되는 부분인 거 같았고.
“밥은? 점심 먹었어?”
-지금 먹고 들어가는 길이야.
“오늘 마치고 당신 안 피곤하면 외식이나 할까?”
-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간만에 당신이랑 데이트 한번 하고 싶어서.”
그날 저녁 평소 강혜선이 가보고 싶었다고 하는 간장게장집에서 저녁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결혼한 뒤로 우리가 하는 데이트 코스는 정해져 있다.
날씨와는 상관없이 우리의 주된 데이트 코스는 백화점이다.
제일 만만하고 또 편리한 데이트 코스.
살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그 주차비 삼아 커피나 밀크티 같은 걸 하나씩 사서 그걸 마시며 백화점 안을 걷는 게 우리의 유일한 힐링이고 또 데이트다.
각자 반대 손으로 난 밀크티를, 강혜선은 커피를 손에 들고 서로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우린 말없이 백화점 안을 걸어 다니며 성의 없이 윈도쇼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난주에 병원은 왜 갔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가 물었다.
강혜선이 나보다 한 칸 위에 서 있었고, 난 그런 강혜선을 살짝 올려다보며 빨대로 밀크티를 빨아 마셨다.
“며칠 뒤면 나 서른여섯이야.”
“맨날 만으로만 이야기하다가 꼭 이럴 때만….”
“만으로 쳐도. 한 번씩 친구들 인스타 같은 거 보면 다들 아기 사진 올려놓고, 또 시집 빨리 간 친구들 같은 경우엔 벌써 초등학교 다니는 애도 있어.”
난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빨대로 밀크티를 빨았다.
“왜? 당신은 아직이야?”
에스컬레이터를 갈아탔을 때였다.
강혜선이 내게 물었다.
“아직이라니?”
“아직 애 생각이 없냐고.”
“그게 뭐 생각이랑 상관이 있나. 생각한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생기면 낳자… 난 항상 그 생각밖에 안 하고 있었어. 우리 결혼 준비할 때도 그 이야기 한번 했었잖아.”
“부담스러운 건 아니지?”
“부담스러울 게 뭐가 있어? 난 오히려 당신한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냥 편하게 기다렸던 거야. 그리고….”
“그리고 뭐?”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도 너무 좋아.”
“….”
“물론 그렇다고 애를 가지지 말자는 건 아냐. 지금 우리 컨디션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안 해 봤다는 말이야.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생기겠지…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열심히 준비해서 부족한 거 없이 키우자… 딱 그 정도까지만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아. 그리고 항상 당신이랑 하는 말이지만, 연애 기간이 짧았던 만큼 신혼이라도 제대로 즐기자… 하는 생각이 컸던 거 같고. 난 당신이 이런 문제로 스트레스받고 있을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을 못 해 봤어.”
“나도 내가 며칠 뒤면 서른여섯이라는 게 안 믿겨.”
난 그저 피식하고 웃었고,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강혜선의 손을 잡고는 내 외투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안 되겠다. 오늘 하나 만들어 줘야겠네.”
강혜선은 쿵 하고 자신의 이마로 내 팔뚝을 때렸다.
“오늘은 안 만들어지는 날이야.”
그래서 나도 강혜선의 팔뚝을 똑같이 이마로 쿵 하고 때리며 말했다.
“그래도.”
“피…”
강혜선을 들고 있던 커피 컵을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버리고 두 손으로 내 팔을 꼭 껴안았다.
“회사 일 많이 힘들지?”
“아니? 전혀. 만만해.”
“만만하긴… 스트레스받고 있는 거 다 눈에 보이는구만.”
“아닌데? 내가 스트레스받을 일이 뭐가 있어. 큰 욕심 없어. 욕심을 가진다고 해서 다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
“그냥… 그냥 그런 생각으로 출근하는 중이야. 딱 2년 전까지만 해도 갑자기 수중에 없던 거금이 생겨버리니까 생각이 많았어. 지금의 나라면 마흔 중반까지 인생 세팅 제대로 해놓고 남은 인생 여기저기 여행이나 하면서 편안하게 살면 되겠다… 그런….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말도 안 되는 계획들을 당신 만나기 전까지 계속 세웠었단 말이야. 그런데 요즘은 할 수만 있다면 큰 욕심 안 부리고 최대한 길게 직장 생활 하자… 그런 마음으로 변했어. 이젠 꼭 월급 때문이 아니라, 마흔 중반 혹은 오십 초반에 사회와 단절되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길 거 같단 생각밖에 안 들어.”
“….”
“그런 생각으로 출근을 하다 보니까 그냥 직장 사람들이 다 내 친구들 같고 인생 선배, 인생 후배들 같고… 예전이었음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실수들이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또 그래서 욕심이 더 줄어드는… 그런 기분이야. 회사 일로 스트레스 안 받아. 걱정하지 마.”
“좋다.”
“뭐가?”
“이렇게 퇴근하고 당신이랑 아무 걱정 없이 걸으며 좋은 생각들만 할 수 있고, 또 바로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너무 무서웠던 게 이렇게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지금 이 순간이 말이야.”
“….”
“당신이 웃을 수도 있는데, 점심때 당신한테 연락받기 전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
“몰라.”
“만약에 당신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냥 우리 둘만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 물론 스스로 위로를 한답시고 그런 생각을 해본 거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거 같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요 며칠 생각이 많았어, 내가.”
“참 쓸데없는 생각 많다. 안 되겠다.”
“뭐가?”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지. 문제가 있어? 아놔, 자존심 상하네. 얼른 집에 가자. 가서 내가 누군지 확실하게 보여줄게.”
강혜선은 주먹으로 내 팔뚝을 제법 강하게 때리며 주위 눈치를 살폈고, 나 역시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하는 생각에 얼른 주위를 둘러봤다.
“가자, 집에.”
“그럴까?”
* * *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한 해가 지나가고, 새해가 밝아오면서 난 그동안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금연이라는 걸 시도해봤다.
“차장님.”
“네.”
“혹시 회사 직원 게시판 보셨습니까?”
“…아니요? 왜요?”
“한번 보시죠.”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냥… 보시죠.”
최 대리가 파티션 너머로 조심히 상체를 얹어놓고 내 눈치를 보며 직원들 게시판을 보라고 했다.
사내 인터넷 게시판.
영업 마케팅부 직원 하나가 퇴사를 결심하게 된 이유라는 제목으로 밑도 끝도 없는 글을 하나 올려놓았다.
영업 마케팅부에서 행해지고 있는 부서 내 부조리와 합리적이지 못한 인사 시스템, 그리고 정산되지 않는 오버타임이라는 카테고리로 자기 딴에는 용기를 낸다고 내어서 올린 게시글이었다.
조회수는 단연 그 게시판 화면에서 가장 높았고, 덧글 차단까지 시켜놓은 상태였다.
가끔가다가 이런 빌런들이 등장을 한다.
딱 자기 기준과 눈높이에서만 회사의 시스템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
회사의 시스템을 권위적이라고 비난할 줄만 알지, 정작 자신이 얼마나 회사와 소통이 안 되는 사람인지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안타까운 사람들.
“아니, 근데… 오버타임 정산이 안 된다는 건 또 무슨 말이에요?”
다른 건 다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가겠는데, 오버타임에 관한 이야기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글쎄요.”
“아니, 카드 찍고 출퇴근하는 회사에서 이게 왜 정산이 안 돼?”
“아마 그런 뜻 아닐까요? 외근 때 하게 되는 오버타임…”
“에이 설마…”
“돌아이들 의외로 많습니다.”
“….”
이런 사람들이 본성을 드러낼 때마다 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안타깝다.
꼭 보면 자신이 가진 불만을 이렇게 극단적으로밖에 표현을 못 한다.
그리고 그 불만들 대부분은 사실 진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이 아니라 퇴사를 결심한 자신의 입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고 싶어 하는 본능이 만들어내는 가짜 불만들이 가능성이 높다.
회사 편에 서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피곤해지는 건 남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난 그런 사람들을 속으로 비난할 수밖에 없다.
-잠깐 올라와.
아니나 다를까 장 부장의 호출이 들어왔고, 김 차장은 내가 보는 앞에서 장 부장에게 열심히 깨졌다.
그리고 난 그 불편한 상황이 너무 싫었고… 그래서 금연을 결심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연초에 손을 댔다.
그렇게 며칠간 회사를 발칵 뒤집어놓은 게시글을 올린 장본인은 이 업계를 완전히 떠나겠다고 선언하며 회사를 나갔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우리 대부분은 그가 이 업계를 완전히 떠나든 안 떠나든 그런 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냥… 회사 나가서 뭘 하더라도 새로 시작하게 될 그 일이 무조건 잘 안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왔다.
겨울과 봄의 경계를 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이제 날씨가 많이 풀렸네….’ 하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계절의 변화에 민감해야 하지만 정작 계절의 변화를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늘은 따뜻한 겨울이 아닌 여전히 조금 쌀쌀하지만 그래도 봄인 게 되는 거다.
구정이 지나고 사람들이 두꺼운 외투 없이 그냥 단촐한 정장 차림으로 출근을 하기 시작한 3월.
드디어 본사 1층 엘리베이터 옆 공개 게시판에 정기 인사 승진자들의 명단이 붙었다.
상무보 - 상무 전성규
드디어 상무보가 상무로 공식 승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