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
쪽팔리지 않게만 해줘
“그럼… 그만 일어나죠.”
시간은 벌써 8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6시부터 먹기 시작했으니까, 딱 적당히 먹고 마신 것 같았다.
“차장님, 들어가십시오!”
“들어가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오늘 잘 먹었습니다!”
고깃집 앞에서 택시에 올랐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 난 팀장, 차장 예정자들에게 고기를 사 주며 내가 했던 말이 아니라, 왜 그렇게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따져봤다.
외로운 모양이다.
내가 왜 외로워야 하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았다.
“….”
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져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외롭다.
술기운이 살짝 올라와서 그런 걸까?
이상하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겐 사랑스러운, 날 믿고 절대적인 응원만을 보내주는 와이프가 있고, 서울에 친구는 없지만 그래도 편하게 술잔을 나눌 수 있는 직장 동료들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집안일이나 회사 일 모두 순조롭게 유지되고 있는 지금 갑자기 난 참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
술기운 때문이겠지.
이렇게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강혜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은 먹었어?
-끝났어?
“어, 지금 택시 안이야.”
-빨리 끝났네?
“그냥 간단하게 밥만 같이 먹었어.”
-잘했어. 다들 피곤해.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보이더라.”
-….
“저녁은? 저녁은 먹었어?”
-응, 집에 있는 걸로 대충 먹었어.
“왜 대충 먹어? 딸기 좀 사서 갈까?”
-됐어. 날씨 추워. 괜히 뭐 산다고 앞에서 내리지 말고 지하 주차장까지 택시 타고 들어와.
그렇게 도착한 집.
강혜선은 소파에 걸터앉아 티브이를 보며 빨래를 개고 있었다.
그리고 난 택시 안에서부터 참고 있었던 소변을 보기 위해 곧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볼일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왜 또 바로 나와? 들어간 김에 씻고 나오지.”
“속옷도 안 챙겨서 들어가냐?”
“갖다달라고 하면 되지. 스톱!”
“…?”
“딱 거기 그대로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쩝”
“실내화 좀 신고 들어오라니까… 하루 종일 구두 신고 다닌 발로 실내화도 안 신고….”
강혜선은 종종걸음으로 현관까지 나가서 실내화 한 짝을 가져와 내 앞으로 내려놓았고, 난 그 실내화를 억지로 신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살아온 생활 환경, 습관이 다르다 보니까 유독 이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깜빡깜빡한다.
강혜선은 집 안으로 들어올 때 꼭 실내화를 신으라는 입장이었고, 난 하루 종일 밖에서 일하느라 발 냄새가 진동을 하는 발을 그 실내화 속으로 넣는 게 꺼려졌다.
실내화를 신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난 실내화를 신더라도 깨끗하게 발을 씻고 나서 실내화를 신어야 그 실내화에 냄새가 안 밴다는 입장이었고, 강혜선은 그 실내화는 얼마든지 다시 빨면 되는 건데, 왜 그게 싫어서 온 집 안에 발 냄새를 풍기고 다니냐는 입장이었다.
“이건 또 뭐야?”
주방과 거실을 구분 짓는 아일랜드 식탁 위로 처음 보는 약통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마치 날 보라고 거기에 올려놓은 거 같았다.
“엽산. 하나는 내 거, 거기 초록 병에 든 건 당신 거야.”
“…엽산? 그게 뭔데?”
난 그때까지도 엽산이 뭔지 몰랐다.
“그냥 일종의 비타민이야.”
“나 지금 먹고 있는 종합 비타민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
“같이 먹으면 돼.”
“아, 뭐 이런 걸 사. 먹고 있는 게 있는데.”
“거 참 진짜… 씻어, 얼른.”
난 강혜선이 내 거라고 하는 초록 병을 들어 관심을 보이다가, 다시 내려놓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엽산이 뭔지 몰랐고, 강혜선이 왜 그런 걸 사 왔는지 그 이유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출근을 준비할 때였다.
평소처럼 일어나서 서로 분주하게 출근을 준비했다.
그리고 강혜선이 국을 올려놓은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놓고 메이크업을 하러 안방으로 들어갔고, 출근 준비를 먼저 끝낸 난 언제나처럼 아침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런데 전날 강혜선이 사 왔다고 하는 약통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평소 챙겨 먹는 종합 비타민과 같이 먹으면 되는가 보다… 하는 생각만 하며 집시에 밑반찬을 옮겨 담고 밥 두 그릇, 국 두 그릇을 떠놓고 강혜선을 불렀다.
그렇게 아침밥을 같이 먹고 있는 중에 강혜선이 이런 말을 꺼냈다.
“나 어제 병원 갔었어.”
“병원? 무슨 병원? 어디 아파?”
“아니. 그냥 뭐 좀 확인하러.”
“…?”
“산부인과.”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산부인과는… 왜?”
“나 결혼하고 피임한 적 한 번도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갑자기 훅하고 들어오니까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그냥 간단하게 검사만 받고 온 거야.”
“뭐래?”
“그냥 뭐… 정상이래.”
강혜선은 대수롭지 않은 척 계속 밥을 먹었지만, 내가 어디 강혜선을 모르나.
이렇게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낼 정도면 그동안 나에게 말을 안 했다 뿐이지 자기 혼자서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해왔단 소리다.
다만 난 산부인과를 가는데, 왜 나한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지, 그 부분이 살짝 서운하고 또 미안했던 거고.
“갈 거면 나한테 이야기라도 좀 하지.”
“그냥 점심시간에 갔다 와 본 거야.”
“스트레스받고 있는 건 아니지?”
“뭐가?”
“애 안 생기는 거 때문에 혹시 스트레스받냐고.”
“언제부턴가 살짝 걱정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야.”
“….”
“아예 안 낳을 거면 모르겠는데, 낳을 거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준비를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강혜선의 생각에는 나 역시 동의를 하니까.
그런데 사람이 참 이중적인 게, 그런 강혜선의 생각에 동의를 하면서도 현재의 삶에 큰 변화를 주기엔… 사실 난 지금 현재가 너무 좋았다.
2세를 원하지 않는 건 절대 아니지만… 갑자기, 앞으로 일이 년 정도라도 더 현재의 삶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물론 그런 속마음을 강혜선 앞에서 표현하지는 못했고.
“그래서 말인데…”
고개를 숙인 채 나의 시선을 피하며 강혜선이 말했다.
그녀는 젓가락으로 밥알 몇 개를 깨작거리고 있었다.
“당신도 시간 나면… 병원 가서 검사 한번 받아 보면 안 돼?”
“에헤이, 참… 나 몰라?”
“아니까 가서 검사 한번 받아 보라고 하는 거야.”
“….”
“내가 당신한테 술 담배 하지 말란 말 한 적 한 번도 없지?”
“….”
“근데 엽산 저건 꼭 챙겨 먹어. 안 그럼 지금 당신 생활 습관상, 애 바보 될 가능성 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에, 전자 담배를 사다 줘도 연초만 피우고… 내가 당신 밖에 나가서 힘들게 일하는 거 아니까 바가지까지 긁을 수가 없어서 그동안 말을 안 했는데, 사실 당신 안 좋은 건 골라서 다 하고 있잖아.”
“크흠….”
“그리고 병원은… 그냥 나 안심시켜준단 생각으로 한 번만 다녀와. 지금 당장 가지자는 게 아니라… 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생기기만 하면 난 좋을 거 같아.”
“…!”
“밥 먹어.”
오전 근무 내내 강혜선이 어제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고 왔다는 사실 때문에 일이 손에 잘 안 잡혔다.
생각해 보면 우린 날짜 계산과 같은 단순한 자연 피임마저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 병원에서 강혜선에게 정상이라고 말을 했다고 하니까 괜히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걱정이 될 수밖에.
인터넷으로 회사 근처 비뇨기과를 검색해 봤고, 그나마 괜찮은 방문 후기가 달려 있는 병원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봤다.
점심시간.
식사를 끝내고 17층으로 올라갔다.
“저기 혹시….”
-네, 말씀하세요.
“혹시 상담을 좀 받아 보려면 예약을 해야 하나요?”
-어떤 일로….
결혼을 언제 했고,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 따로 피임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어제 집사람이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받고 왔는데, 집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서 그 부분으로 상담을 좀 받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거면… 오늘 오셔서 간단하게 상담을 먼저 받아 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는데… 그러시는 것보다는 일단 상담보다는 검사를 받아 보셔야 하는 거니까, 혹시 어제 음주를 하셨나요?”
“…네.”
“아… 그럼 오늘은 안 될 거 같고요. 정확한 검사를 위해서 몇 가지 지켜주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검사를 하기 위해선 며칠간 절대 성관계를 해선 안 되고, 가급적 음주도 피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몸 컨디션을 만들기 위해 여유롭게 다음 주 월요일로 예약을 잡았다.
그런데 참….
오후 3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김 차장으로부터 사내 메신저로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이미 난 오늘부터 시작해서 금요일인 내일과 주말 동안 술을 안 마셔야겠다고 속으로 다짐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 차장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고, 그 내용은 퇴근 후에 단둘이 소주 한잔 같이 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어지간하면 양해를 구하겠는데, 상대가 김 차장이라 뺄 수가 없었다.
아까 내가 건 예약 전화를 받은 상대도 성관계에 관한 부분만 강조를 하며 유의를 하라고 했지, 술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는 식으로만 말을 했었다.
금, 토, 일. 삼 일 정도 금주를 하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며 김 차장에게 답장을 보냈다.
-네엡! 저야 차장님이 한잔하자고 하시면 언제든 콜입니다.
김 차장.
애가 셋인 사람이다.
가정의 무게만 놓고 보면 나보다 훨씬 더 어깨가 무거운 사람이 퇴근 후에 같이 소주 한잔 할 수 있겠냐고 물어올 때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퇴근 후에 김 차장과 함께 회사 근처 곱창집에서 전골 하나를 시켜놓고 저녁 식사 겸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나도 나지만 김 차장은 홀로 독박 육아(애가 셋이면 독박 육아가 맞다고 본다)를 하고 있을 와이프 때문에라도 빨리 들어가야 한다.
“그….”
“편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인사부장님이랑 재편될 영업부 조직도 관해서 이야기 좀 나눠 봤어?”
“오늘 하루 종일 거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분명 뭔가 부탁할 게 있는 눈치였다.
“공 차장.”
“네.”
“혹시 불편해?”
“뭐가요?”
“나 앞지르고 먼저 부장 달아서….”
“음….”
난 가스버너 화력을 조금 줄여놓고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편할 수는 없죠.”
“그러지 말아 달란 말을 꼭 해주고 싶어.”
“감사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끌어주지는 못하더라도, 발목을 잡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요 며칠 안 팀장이 우리 사무실에 안 올라오더라?”
“….”
“하루에도 몇 번씩 올라와서 깐족거려야 될 친구가 안 올라오니까, 괜히 내 마음이 불편해지더라고. 눈치 같은 거 잘 안 보는 친구가 괜히 내 눈치 보는 거 같고… 공 차장이 먼저 부장을 단다고 해서 영업 마케팅부가 불편해해선 안 되는 거잖아.”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차장님.”
“우리가 언제부터 영업 마케팅부, 영업 기획부로 나뉘었어? 원래 한 영업부야. 이미 확정 난 일 가지고 서로 불편해하지 말자.”
“네, 신경 쓰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나 부탁 하나만 하자.”
“….”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이번만큼은 공 차장이 꼭 들어줬음 좋겠어.”
“말씀하세요.”
“나 대리 말이야.”
난 숟가락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최대한 예의 바르게 그가 할 부탁에 귀를 기울였다.
“양 팀장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공 차장이 손을 좀 써 주면 안 돼?”
“나 대리라면… 사실 차장님도 꼭 필요한 맨파워 중 하나 아닙니까?”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승진에 밀리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그렇게 되면… 그건 진짜 나 때문인 건데… 그건 진짜 싫다, 공 차장.”
김 차장이 소주병을 들길래, 서둘러 그 술병을 빼앗아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차 대리 동기 아냐. 영업부로 트랜스퍼된 입사 동시보다 승진이 늦어지면… 솔직히 일 할 맛 안 나지.”
“…네.”
“어차피 우리 쪽 브랜드들 아웃렛 관련해선 앞으로 양 팀장이 차고 나가야 할 거 아냐. 아웃렛 쪽이 공 차장도 잘 알겠지만, 널널하지가 않아.”
“알죠.”
“아웃렛 쪽만 따로 분리시켜 줘야 될 거야.”
“네, 지금 그렇게 구상 중에 있습니다.”
“따로 생각해둔 팀장이 있나?”
“….”
“있어? 있나 보네.”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다. 나 대리라도 그렇게 영업 기획부로 팀장 달아주고 빼야 영업 마케팅부에 대리 티오 하나라도 만들어낼 수 있잖아. 이해 좀 해줘. 선배 대우 해달란 말은 안 할게.”
“….”
“대신… 내 새끼들 앞에서 쪽팔리지 않게만 해줘.”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 쪽 애들 컴플레인 안 나오게 단도리는 내가 칠 거야. 그러니까 공 차장은 괜한 걱정 하지 말고 쭉쭉 올라만 가.”
“…네, 차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난 김 차장 앞으로 근무 시간에 잠시 나가서 구입해 온 그의 막내 아들에게 줄 패딩 조끼를 건넸다.
“뭘 또 이런 걸…”
“지금은 저도 정신이 없어서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앞으로는 제가 더 많이 신경 써서 챙기겠습니다.”
그렇게 금요일과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찾아왔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비뇨기과를 찾아갔다.
하기 민망한 검사를 끝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내일 다시 찾아오란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다시 찾은 병원.
날 바라보는 의사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서 상담실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마음이 놓였다.
“앉으세요, 이쪽으로.”
“네.”
의사는 한참 동안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다가 편안한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날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다리를 꼬며 말했다.
“음… 언제 마지막으로 성관계를 가지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