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차장님, 사랑합니다!
비어 있는 사장석.
그 자리를 제외하고는 임원진들이 모두 모인 회의실이었다.
그리고 전무님의 표정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덩달아 모든 임원들의 얼굴에도 여유로운 미소가 스며있었다.
특히 이문 본부장님은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한쪽 눈을 감았다 뜨시며 싱긋이 웃으셨다.
중요한 회의라고 하기보다는 전무님 주최하에 열리는 형식적인 정기 임원 회의 성격이 강해 보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사부장과 함께 불려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종의 선수 기 살려주기 차원에서 나와 인사부장을 함께 부른 것 같았다.
CGM을 한국 시장에서 거의 벼랑 끝까지 몰아세워 놓고, 거기에 들떠서 축배를 들기보다는 차근차근 새로운 영업부의 조직도를 그려본 날 임원들 모두가 예쁘게 봐주시는 느낌이었다.
“영업 이사가 그러던데, 링겐 쪽과 접촉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가장 말석으로 인사부장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전무님으로부터 질문이 날아왔다.
분명 일어서서 대답을 하려고 하면 됐다면서, 그냥 앉아서 편하게 대답을 하라고 하실 게 뻔한데, 그럼에도 난 군기 든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역시나 그런 날 향해 전무님이 손을 내저으시며 앉아서 대답을 하라고 하셨다.
다시 자리에 앉아, 회의 테이블과 연결되어 있는 마이크 목의 위치부터 바로 잡았다.
그리고 엄지손톱만 한 마이크에 입술을 최대한 가깝게 가져다 놓고 대답했다.
“접촉은 꾸준히 하고 있었습니다. 현재 Kidshub에 들어가고 있는 프랑스 브랜드 유아복들이 다 링겐 물건입니다. 그리고 또….”
난 상무보를 살짝 눈짓한 후 솔직하게 대답했다.
설마하니 영업맨들의 영업법을 전무님이 모르실까 싶었다.
“그 물건들을 계약할 당시 조금이라도 유리한 마진을 받아내기 위해 약속 아닌 약속을 했었습니다.”
“무슨 약속?”
“링겐이 취급하고 있는 유아 아동복에 한해서 중국 시장 쪽 채널의 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해주겠다고….”
“공 차장하고는 절대 같이 포커 같은 거 못 치겠다. 베팅의 절반 이상이 뻥카 아냐. 어디 뭐 무서워서 같이 카드나 받아보겠어?”
전무님의 농담에 자리에 모인 임원진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중에서도 박 이사와 이문 본부장님이 가장 환하게 웃어주셨다.
그다지 쑥스럽지도 않았는데, 그냥 분위기를 보아하니 쑥스러운 척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난 목 주위를 매만지며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미소를 지었고, 그런 날 향해 다시 전무님의 질문이 날아왔다.
“그래, 링겐 물건을 받아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정확하게. 현재 컨트롤 대행해주고 있는 만토바 물건들처럼 그렇게 하겠다는 거야.”
“큰 그림은 비슷합니다.”
“차이점은?”
“아마도 유아 아동복의 경우는 링겐을 통해 해당 브랜드들의 한국 라이센스를 직접 받아서 국내 유통 판에는 홍성이 직접 깔 수 있을 거로 기대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이미 상당 부분 이야기가 진행이 된 상태입니다.”
“그럼 링겐을 통해서 브랜드 라이센스 확보하고, 대가로 링겐의 물건들을 중국으로 샌딩해준다?”
“유아 아동복에 한해서만요. 여기서 링겐이 확보하고 있는 성인복 브랜드까지 합쳐지면 만토바가 그리 반길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야 당연하지. 조심해야 되는 부분이야, 그 부분은. 상당히 예민한 부분이라고.”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브랜드 본사들과는 링겐 측에서 다리를 놔주는 건가?”
“아무래도 링겐을 통하면 마진 협상이 조금 수월하게 이뤄질 것 같습니다.”
“흐음….”
전무님은 고개만 몇 차례 끄덕이셨다.
“브랜드 본사들이 현재 링겐에게 공급하고 있는 마진 베이스로 받아보겠습니다.”
“쉽지 않을 건데….”
“브랜드 본사들 입장에서도 링겐이 홍성을 통해 중국 채널만 확보할 수 있다면 크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겁니다. 그렇게만 되면 브랜드 본사들의 CGM에 대한 의존도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거고요.”
“그게 진짜 목적인 거 같은데?”
“아니란 말씀은 못 드리겠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홍성이 CGM이랑 원수진 줄 알겠다. 철수하고 한국 시장에서 떠나겠다는데, 그렇게까지 쫓아가서 씨를 말릴 필요까지 있어?”
하지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 말을 하는 전무님의 표정에는 내가 한 대답에 대한 만족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서 난 큰 위험이 없는 무리수를 던져봤다.
“정말 할 수만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내가 한 대답에 전무님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거리셨다.
이런 자리에서 정답이라는 건 무조건 전무님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이 정답이 되는 거다.
앞으로 영업부를 이끌어갈 공 차장은 뼛속까지 홍성맨이라는 확신.
그런 공 차장은 홍성을 위협하는 상대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물어뜯을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메이킹.
그런 것들이 바로 정답이 되는 거 아닐까.
윗사람들은 젠틀한 부하 직원보단 자신을 젠틀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부하 직원을 원한다.
그래서 때론 내 기질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애써 야성적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이런 자리에선 당신들은 위에 점잖게 앉아서 교양 있게 사업을 논하세요, 당신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우린 대가리 깨질 각오하고 돌격 앞으로를 하겠습니다! 그 선봉에 제가 서겠습니다! 하는 파이팅 정도만 보여줘도 충분히 그들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
왜? 지금은 모든 게 다 홍성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돌아가고 있으니까.
난 전무님이 임원 회의 자리에 왜 박 이사를 시켜 나와 인사부장을 불렀는지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이런 대답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부르신 거겠지.
일개 차장의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와주면 전무님은 자신이 입 아프게 임원들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거니까.
“1부 3차장 체제로 바꿔주면 링겐 건 포함해서 최근에 주워온 브랜드들까지 차질 없게 컨트롤할 수 있는 거야?”
대답이 망설여졌다.
총대를 메고 싶지 않아서 망설였던 게 아니었다.
어떤 긍정적인 대답이 전무님을 감동시킬 수 있을지, 혹은 만족시킬 수 있을지 임팩트 있는 대답을 선택하느라 망설였던 거다.
“해보겠습니다.”
짧은 순간 난 ‘할 수 있습니다.’ ,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보다는 그냥 담백하게 ‘해보겠습니다.’라고 그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대답을 하는 게 더 믿음직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인사부자아앙… 은 모르지, 지금?”
“…네?”
“우리가 무슨 이야기 하고 있는 중인지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따로 들은 이야기가 없어서.”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이 사람아.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이제 막 들은 내용인데.”
인사부장의 진심 어린 당황.
그리고 그 당황을 장난으로 안심시켜주는 전무님의 위트에 다시 한번 회의실 안은 웃음바다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임원진들이 웃음을 수습하는 동안, 난 마이크를 손으로 가려놓고 인사부장에게 오늘 내가 박 이사에게 제안했던 영업부 조직도에 대해 최대한 짧게 요약해서 전달해줬다.
“연말이라 이것저것 신경 쓸 거 많아서 정신없이 바쁘다는 거 잘 아는데, 이번 건은 인사부장이 신경 좀 써줘라.”
“네.”
“디테일은 공 차장하고 따로 잡아보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새어 나오는 웃음.
참아볼까 하다가 그냥 들키기로 했다.
내가 만약 전무님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모습이 더 예뻐 보일까.
이렇게까지 신경 써서 예뻐해 주시는데 애써 경직된 표정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조금 가벼워 보이더라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을 거 같았다.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박 이사를 향해 감사하단 마음을 담아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또 그때처럼 우리 다 있는 앞에서 사장님 지갑 꺼내시게 만들지 말고 승진 예정자들 명함은 미리미리 준비해주고 말이야. 외부로 돌면서 거래업체 상대하는 영업부는 항상 별개로 놓고 생각해. 타이틀이 곧 무기고 협상 카드인 사람들이야.”
“네, 신경 쓰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부장과 함께 임원 회의실을 빠져나왔을 때였다.
인사부장이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주먹으로 내 가슴을 툭 하고 건드렸다.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자.”
“아니, 저도 이게 이렇게 빨리 공론화가 될지는 몰랐어요. 바로 몇 시간 전에 처음 박 이사님한테 건의드렸던 내용이라고요.”
“아, 몰라. 씨…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난 또 뭐 사고 터졌는지 알고 식겁했잖아.”
벌써 5시 반이 넘어있었다.
퇴근을 하기 위해 서둘러 사무실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미 벌써 퇴근을 했어야 할 안 팀장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안 팀장은 5시 땡하면 퇴근을 해야 정상인데, 의외였다.
“왜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어디서 소고기 냄새가 나는 거 같아서요.”
내 몸에 코를 갖다 대며 킁킁거리는 안 팀장.
그런 안 팀장을 보며 양 팀장은 고개를 내저었고, 이제 막 퇴근을 준비하고 있던 장향은은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
내가 무슨 일로 불려간 줄 알고 어떻게 됐느냐고 묻는 걸까?
난 양 팀장을 쳐다봤지만, 양 팀장은 아직 아무한테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살짝 들었다 놓았다.
“아, 어떻게 됐냐니까요?”
“뭐가요?”
“링겐 건으로 불려가신 거 아닙니까?”
다행히 아직 모르는 모양이다.
“진행하면 될 거 같습니다.”
“크흐… 이제 뭐 우리 차장님 말이라면 똥을 갖다 팔자고 해도 무조건 다 통과네요.”
사실 안 팀장의 말도 틀린 게 아닌 게, 링겐 건은 이렇게 빨리, 재무 리스크팀의 분석도 없이 임원 회의에서 바로 통과를 시켜버리기엔 사이즈가 큰 프로젝트였다.
“그…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양 팀장이랑, 안 팀장님, 그리고 장 대리, 차 대리, 최 대리, 한 대리까지 해서 저랑 저녁에 소주 한잔합시다.”
“왜 내일입니까. 그냥 오늘 하면 안 됩니까?”
“최 대리, 한 대리 퇴근했잖아요.”
“아, 그야 다시 부르면 되죠.”
“그래서 안 팀장님이 외로운 거예요. 좀 퇴근했으면 놔주세요.”
“아, 왜 내일입니까!”
“저 오늘 집사람이랑 퇴근하고 같이 마트 가기로 했습니다. 벌써 늦었어요.”
“헐… 거짓말.”
“저한테는 중요한 일입니다.”
“결혼하면 다 차장님처럼 바뀌는 겁니까?”
“궁금하면 해보세요.”
“그냥 안 궁금한 거로 하겠습니다. 근데….”
“…?”
“기태는 왜 뺍니까? 기태도 대린데….”
“그냥 내일은 그렇게만 같이 가는 거로 합시다. 박 대리는 내가 나중에 따로 고기 사 먹이면 됩니다.”
그렇게 간신히 안 팀장의 마수로부터 벗어나 퇴근을 하고 은행 앞에서 강혜선을 차에 태워 집 근처 마트로 향할 때였다.
뭔가 냄새를 맡았는지 안 팀장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아, 왜요, 또!”
운전을 해야 했기에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했다.
-혹시 저 차장 승진합니까?
“아, 그건 또 누구한테 들었습니까?”
-저 지금 인사부장님이랑 같이 있습니다.
“아니, 왜요?”
-혼자 적적하신 거 같아서 제가 소주나 한잔 같이하자고 했죠.
“우와,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이젠 하다 하다 다른 부서 부서장까지 섭외해서 마십니까?”
-아니 난 그냥 집에 가려고 했죠. 진짜로. 근데 인사부장님이...그나저나 진짭니까?
“아, 인사부장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겠죠. 왜 다 들어놓고 확인을 합니까?”
-우와… 씨, 우리 차장님 진짜 완전 멋진데?
“저 지금 운전 중입니다. 내일 회사에서 봅시다.”
-저 그때 차장님이랑 양 팀장님한테 소고기 산 거 기억하시죠? 승진 턱 제가 쐈잖아요.
“아, 그래서 내일 제가 산다고 아까 말했지 않습니까.”
-전 따로 사주세요. 전 내일 대리들 팀장 승진 축하 기념으로 사주시는데 잠깐 같이 참석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아, 끊어요, 쫌!”
-차장님.
“하아… 아, 왜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