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
진짜 대단한 친구네
홍성의 이번 공격은 비단 CGM과 한성만을 겨냥했던 게 아니었다.
브랜드 본사들을 향한 직접적인 경고 사격이기도 했다.
홍성의 입장은 이랬다.
당신들의 브랜드다.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당신들의 브랜드가 이런 헐값에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걸 가만히 뒷짐 지고 지켜만 보고 있느냐.
이 정도면 방관이라고 표현해도 되지 않겠냐.
아무리 상대가 CGM이라도 지금 당신들은 결정을 해야만 할 것이다.
명색이 명품을 생산해내고, 또 명품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당신들이, 고작 CGM이라는 거대 유통 채널 하나 때문에 명품 가치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자존심까지 버리고 이리저리 휘둘린다고 하면 말이 되는 거냐.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당신들은 명품이다.
그렇기에 우린 당신들을 항상 어렵게 생각하고 있으며 또 당신들을 존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이 이런 명백한 정황들을 앞에 놓고도 망설이고 있는 모습은 전혀 명품답지가 않다.
그럼 우리가 당신네 브랜드를 존중하고 또 당신들의 브랜드를 컨트롤하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거 아니냐.
시장의 반응이 아닌 특정 한 유통 채널에 의해 명품의 가치가, 그것도 가격이 결정된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그걸 어떻게 명품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냐.
그리고 우리 홍성과 같은 로컬 컨트롤 기업들에게는 그렇게 빡빡하게 구는 당신들이 상대가 CGM이라고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못한다면…. 그건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다.
우린 이런 차별적인 대우를 참아가면서까지 당신들의 제품을 일방적으로 존중해줄 마음은 없다.
-….
수화기 너머로 한참 동안 침묵이 전해졌다.
그 침묵을 내가 먼저 깨뜨릴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상대가 침묵하는 시간 만큼 난 차분해질 수 있었으니까.
-우선… 저희가 CGM 쪽으로 연락해서 정확하게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플리즈.”
난 짧지만 최대한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혹시 아까 메일로 보내주셨던 해당 제품의 품질보증서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품질보증서 확인을 못 했습니다.
“물론입니다. 통화 끝내고 바로 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내가 인터넷 쇼핑으로 구매했던 제품이 CGM을 통해 한성이 유통시켰다는 증거를 확인해야겠다는 말이었다.
일반적인 명품의 경우 품질보증서에 레퍼런스 넘버와 시리얼 넘버는 무조건 함께 들어가 있어야 한다.
이건 아라비안 숫자로 찍혀있지 않고 바코딩이 되어 있더라도 무조건 들어가 있어야 하는 필수 항목이다.
레퍼런스 넘버는 제품의 디자인과 컬러, 사이즈 등을 구별할 때 필요한 넘버이고 시리얼 넘버는 브랜드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 제품이 생산된 순서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넘버다.
해당 제품이 생산된 순서만 확인이 되면 비록 최종 판매 업자가 어디에서 물건을 떼다가 인터넷에 깔았는지 그 경로를 제 입으로 밝히지 않더라도 그 제품의 유통경로를 되짚어 보는 건 일도 아니다.
그게 만약 진품이라면 말이다.
-그럼 저희 쪽에서 확인을 해보고 다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럼 바로 메일로 이미지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상대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 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품질보증서를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준 지 30분 정도나 지났을까.
상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정도 시간이면 이미 모든 걸 정확하게 알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우선 CGM 본사 담당자와 통화를 해봤는데, 자기들도 몰랐던 일이라며 상당히 당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이때부턴 나도 말이 곱게 나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이런 팩트를 앞에 놓고 저런 식으로 CGM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건 지금 이 상황의 심각성이나 우리 홍성이 얼마나 칼을 갈고 이 심각성을 더 부각시킬 것인지를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단 말이었으니까.
-CGM 본사가 직접 CGM 코리아를 통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하게 밝혀서 저희 쪽으로 전달을 해주겠다고 합니다.
“음…”
난 잠시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며 생각했다.
어느 정도까지 노골적으로 말을 해줘야 상대가 정신을 차릴까.
자칫 감정싸움으로 발전될 수도 있는 부분인데, 난 여기서 내가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어도 괜찮을지, 아닐지를 먼저 따져봤다.
그리고 결정했다.
지금 통화 중인 상대를 놓치더라도 우리가 먼저 버린 게 되어버리면, 그리고 그걸 잘 포장해서 다른 브랜드들을 압박할 수 있는 사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남는 장사이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발전되자, 결국 상대 역시 만토바라는 초대형 공룡을 등에 업고 있는 홍성을 쉽게 놓칠 수 없을 거란 당연한 결과에 이르렀다.
“그렇게 안 봤는데, 귀사는 상당히 불공평하군요.”
-…네?
그리고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깔았다.
“물론 저희 홍성은 불공평을 인정하는 입장입니다. 아니, 불공평을 좋아합니다. 어떻게 모든 유통 채널을 상대로 공평할 수가 있겠습니까. 많이 팔아주는 채널, 좀 더 영향력 있는 채널을 신경 써서 챙기는 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불공평의 기우는 쪽에 서게 되니 상당히 불쾌하네요. 불공평을 인정하지만, 저희는 그 불공평의 우위에 서고 싶은 거지, 기우는 쪽에 서고 싶은 게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이해를 잘 못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우는 쪽에 저희만 있는 게 아니라 만토바도 함께 있다는 걸 만토바 쪽에서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
“CGM 코리아는 CGM이 아닙니까? 만약 홍성이 이번 CGM이 만든 이런 상황을 똑같이 만들었다면 귀사가 저희에게 어떤 통보를 해왔을지 너무나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져서 드리는 말입니다.”
상대는 침묵했다.
그동안 자기가 상대해왔던 홍성의 스타일과는 너무나 달라서 당황을 하고 있는 거겠지.
“뭔가 지금 상당히 헷갈려 하시는 거 같아서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지금 홍성을 대표해서 귀사에게 이번 사태를 강력하게 컴플레인 걸고 있는 중입니다. 그냥 한국에서 이런이런 일이 생겼다… 하는 식으로 보고를 하는 게 아니고요.”
-…네.
“저희 홍성은 지금까지 귀사의 브랜드를 라이선스 받아서 컨트롤하는 과정에 항상 컨트롤 기업이 해야 할 책임을 다해왔습니다. 왜? 귀사 역시 브랜드 본사의 입장에서 브랜드 가치를 유지, 발전시키는 책임을 다해주셨으니까요. 그런데 지금 그걸 안 하시겠단 말씀처럼 들리니까 상당히 당혹스럽네요. 그리고 그동안 저희가 왜 그렇게 귀사의 브랜드를 위해 최선을 다해왔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더 길게 말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사장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지시가 내려왔다.
CGM을 쫓아내라고.
그 지시 속에는 그 지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피해 정도는 얼마든지 회사 차원에서 커버를 치고 또 다 같이 감수를 하자는 뜻도 함께 포함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깔끔한 지시란 말인가.
현재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는 하나도 잃지 말고 CGM을 쫓아내라고 하셨음 정말 숨이 막히는 군대식 지시가 됐을 텐데, 쫓아낼 수만 있음 뭐든지 해도 좋다는 지시였다.
그런 든든한 지원과 각오를 보내주셨기에 브랜드 본사들을 직접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입장에서 마음이 한결 가벼울 수 있었고, 또 자신 있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해당 브랜드 본사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온다.
전날 내가 강력하게 컴플레인을 걸었던 사람보다 브랜드 본사 내에서 직급이 몇 단계 더 높은 인물이었다.
아마도 어제 나와 통화를 했던 사람은 우리 홍성에게 즉각적인 피드백을 줄 권한까지는 없는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베르난델이라고 합니다.
“공은태입니다.”
-우선 어제 최종 보고를 받고 바로 연락을 드리려고 했는데, 한국 현지 시각을 확인해 보니 실례가 되는 시간대라 지금까지 기다렸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현재 저희 하미힐은 CGM을 상대로 어떻게 한국에서 그런 가격으로 하미힐 제품이 유통되고 있었는지 그 자세한 이유를 알려달라고 요청을 보내놓은 상태입니다. 그리고 만약 상대가 CGM 코리아의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CGM 본사를 상대로 브랜드 가치 훼손의 책임을 묻고, 또 계약 위반에 대한 책임을 법적으로 따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상대가 이렇게 적극적인 입장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상대가 여전히 CGM의 입장을 두둔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에 살짝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전달해 주니 고맙기까지 했다.
하지만 고마운 감정을 목소리에 묻힐 이유는 없었다.
“요청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방금 하셨던 말씀을 공식 메일로 만들어서 홍성 쪽으로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
“어제 제가 현재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전 브랜드들을 상대로 보낸 전체 메일을 보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네, 봤습니다.
“정말 많은 브랜드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브랜드 본사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자 전체 메일을 보낸 저희 홍성은 현재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고 있는지, 계속해서 진행 상황을 알려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그래서 하미힐 쪽에서 보여주신 입장을 시작으로 꾸준히 업데이트 메일을 전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사장님은 CGM을 한국에서 쫓아내라고만 지시를 하셨지만, 사실 나를 포함한 장 부장이나 다른 홍성맨들 대부분은 곱게 쫓아낼 마음이 없었다.
최대한 CGM 본사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한국 시장에서 철수를 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해줘야만 한국 시장의 매운맛 때문에 두 번 다시는 똑같은 도발을 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해서는… 그냥 CGM이라고 하면 이젠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싫었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하미힐의 입장이 담긴 공식 메일을 받았고, 그 메일을 박 이사의 허락을 받아서 현재 한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브랜드 본사들에게 다시 한번 전체 메일을 보냈다.
내가 보낸 전체 메일은 각 브랜드별로 압박을 가하고 있는 영업부 팀장들에게 아주 강력한 지원 사격 역할을 해주었다.
본격적인 CGM 사냥에 돌입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마침내 홍성은 전 브랜드 본사들을 상대로 이 부분에 대해 CGM 본사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처음 만토바를 등에 업고 홍성이 한국 시장에서 CGM을 간신히 막아냈던 당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업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CGM 채널을 통해 물건을 공급받아오던 중소형 업체들 얼마나 많겠나.
그리고 또 CGM과 독점 계약을 하고 있었던 브랜드들도 발에 불이 떨어졌다.
한성 측으로부터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왔고, CGM 코리아 측으로부터도 여러 차례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우리 홍성의 입장은 그들이 몇 번을 연락하든, 얼마나 집요하게 접촉을 시도하든 시종일관 단호했다.
“저희는 브랜드 본사들하고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파리 쁘띠토널 쪽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공 차장, 나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네, 본부장님.”
-혹시 김형찬이라고 알아?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본부장님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연락이 왔더라고.
“뭐라고….”
-CGM에서 이번에 브띠토널을 공격적으로 마케팅해 보고 싶다면서 말이야.
“하하하하… 크크큭… 아놔, 진짜 CGM 놈들 코미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나도 웃기긴 웃겼는데, 김형찬이라는 사람이 연락이 와서 너랑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다면서 약속을 잡길 원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잘 알아?
“잘 알죠.”
-아, 그래? 난 또 그냥 하는 말인 줄 알고 혹시나 해서 확인부터 해보려고 전화했던 거야. 근데… 어떻게 알아?
“그 인간이 바로 그 인간입니다.”
-…?
“나크리스.”
-아!
“하하하….”
-우와, 그런데 어떻게…진짜 대단한 친구네.
“그렇네요. 진짜 대단하네요. 자기가 한 걸 기억을 못 하나 봐요. 제 이름을 파는 걸 보면…”
-알았어.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내가 알아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