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반드시입니다
마진 장난.
우리 홍성의 입장에선 한성과 CGM이 서로 손을 잡고 반칙을 하고 있는 거였고, 또 한성과 CGM은 경쟁을 하고 있는 거라고 둘러댈 수도 있는 애매모호한 부분이었다.
우리 입장만 주장하다간 자칫 업계 1위 기업의 갑질이라며 우스운 꼴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성과 CGM이 반칙을 하고 있는 거라고 무턱대고 우길 게 아니라 해당 브랜드 본사들이 알아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얼마나 우리 쪽으로 유리한 판을 까느냐가 관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각오를 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상황에 따라 상대로부터 브랜드를 라이선스를 완벽하게 빼앗아오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 해당 브랜드를 포기한다는 각오로 CGM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의 무기로 쓸 마진 장난의 증거들은 이미 넘칠 정도로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걸 어떻게 포장을 잘해서 한성과 CGM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느냐가 포인트인데, 이걸 잘못하다간 소자본 업자들에 의해 우리 홍성이 공공의 적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난 사실 재미가 있었다.
CGM과의 전쟁을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과정이 은근히 재미있었다.
한 발만 떨어져서 지켜보면 그게 뭐든 조금은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되는 거 같다.
함몰.
회사 내에서 타이틀이 한 단계씩 올라갈 때마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단어가 함몰이라는 걸 이제는 알겠다.
내가 그 상황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함몰되어 버리면, 정작 눈앞에 나타난 힌트까지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 발 떨어져서 왜 CGM이 이런 하수들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차근차근 따져봤다.
마치 고만고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장기를 두는 걸 지켜보며 속으로만 훈수를 두는 것처럼.
그렇게 남의 장기에 훈수를 두듯 한성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CGM의 입장을 곰곰이 따져보니까, 지금 CGM은 한국 시장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을 얻어냈다.
이미 일전에 단독으로 한국 시장을 장악하고자 마진 장난을 치다가 만토바를 등에 업은 홍성에게 호되게 당한 이후로 CGM은 본의 아니게 업계에서 궁지에 몰려 있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물론 공룡 기업 CGM을 업신여길 수 있는 간 큰 브랜드는 몇 없겠지만, 그래도 그때의 실수로 업계에서 이미지가 많이 추락한 게 사실이다.
내가 만약 CGM이라면 눈에 보이는 게 없을 거 같았다.
여기까지 와서 유일하게 중국 시장을 뚫을 수 있는 길인 한국 시장을 포기한다는 건 더 말이 안 되는 거고.
업계 최대 공룡이라고 할 수 있는 만토바를 등에 업은 홍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지만, 여기서 허무하게 꼬리를 내리고 한국 시장에서 철수를 하기엔 자존심도 크게 상할 것이고, 무엇보다 후폭풍이 두려울 것 같았다.
그 후폭풍이라는 건 약간 기울어진 평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만토바와 CGM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며 공유하고 있던 브랜드들을 만토바 쪽으로 모두 빼앗길 수도 있다는 일종의 두려움일 거다.
브랜드들 입장에서 중국 시장 진출은 조건이 없다.
무조건 들어가야 하는 시장이다.
물론 브랜드 본사들이 직접 먼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요즘 같은 소셜 미디어 시대에 그레이마켓의 중요성은 그 그레이마켓을 강하게 배척했던 브랜드 본사들도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만 하는 시장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걸 만토바는 중국에서 문제없이 하고 있는데, CGM은 여전히 길을 뚫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브랜드가 만토바 쪽으로 몰빵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일종의 교란 작전이 아닐까.
우리 홍성이 자기네들이 펼치는 하수 전략에 스스로 말려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사이 어떻게 해서든 한성을 끼고 중국으로 들어갈 시간을 벌기 위한 교란 작전.
일단 어떻게 해서든 중국 시장에 들어가서 현재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들을 계속 그대로 유지하는 게 그들의 목적일 거다.
들어가서 다시 만토바와 어떻게 시장 경쟁을 펼칠지는 나중에 생각해 보겠다는 거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더 못 하게 막고 싶었다.
두려워서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피곤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는 싹은 미리 잘라내는 게 현명한 거란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그래서 난 더 열심히 칼을 갈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섬뜩한 칼날에 오금이 지릴 정도로 칼을 갈고 또 갈았다.
그러다 만토바와 CGM이 동시에 확보하고 있고, 또 만토바를 업기 전부터 아직까지 국내에선 홍성이 라이선스를 가지고 직접 컨트롤을 하고 있는 브랜드의 제품 하나가 비양심적인 가격으로 인터넷상에 나와 있는 걸 발견하게 됐다.
만토바도 함께 확보를 하고 있는 브랜드라, 문제 삼기엔 그만인 브랜드가 되어버린 거다.
정상 매장가 128만 원.
면세점엔 정확히 같은 컬러는 깔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라인만 놓고 보면 똑같은 라인의 제품이 122만 원에 판매되고 있다.
인터넷 쇼핑이라는 점을 백번 감안해서 면세점 가격에서 다시 10퍼센트 정도 할인을 해봤다.
그래도 110만 원은 나와야 된다.
거기서 한 발 더 양보를 해봤다.
해외 직구 가격으로 말이다.
122만 원에서 정말 크게 양보해 25퍼센트까지 가격을 낮춰 봤다.
보통 직구는 구매자가 세금을 떠안아야 하니 그 밑으로까지 가격을 낮출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최소 90만 원은 나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해당 브랜드의 제품 라인 하나가 76만 원에 인터넷에 나왔다.
낚시일 수도 있다.
확보하지 못한 제품을 이미지만 올려놓고 가격을 무작정 낮춘 다음, 구매를 하려고 하면 확보하고 있는 제품이 없다는 문구가 뜰 때도 많으니까.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구매가 되는 게 아닌가?
난 멈추지 않았다.
일단 이 비용에 대해선 회사에 따로 청구할 마음을 먹고 곧바로 그 컬렉션을 구매해버렸다.
그리고 며칠을 기다렸다.
“우와….”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내가 만약 이쪽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일반 구매자였다면 이 얼마나 횡재란 말인가.
작전 개시.
지금부터는 무조건 직진이었다.
뒤를 돌아볼 이유도 없었고, 옆을 쳐다볼 겨를도 없이, 난 곧바로 다음 날 출근을 할 때 해당 제품을 가지고 회사로 향했고, 그걸 박 이사와 장 부장에게 보여줬다.
두 사람 다 나보다 선수들이다.
다만 칼자루를 내가 들고 휘두르기를 원하고 있을 뿐이었고.
“컨택해라. 컨택해서 컴플레인 걸어.”
“아니요, 이사님 잠시만요.”
장 부장이 손을 들어 침묵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잠시 뒤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브랜드들한테 일일이 해당 브랜드의 무너지고 있는 시장 가격에 대해 컴플레인 메일을 보내지 말고, 그냥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 자체를 최대한 간단명료한 메시지로 담아서 보내고,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브랜드들 모두를 첨부시켜버려. 그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브랜드들 모두를 첨부시켜버리라는 게.”
“A라는 브랜드의 시장 가격이 무너지는 걸 B, C, D도 다 알게 만들어버리라고. 그래야 문제의 심각성이 한눈에 보이지.”
“그렇지. 장 부장 말이 맞아. 그래야 이게 어느 한 개인업자의 욕심이 만들어낸 문제가 아니라 CGM이 뒤에서 시장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걸 다 알게 되는 거야. 그렇게 진행해.”
“넵! 지금 바로 합니까?”
“내려가. 공 차장 넌 내려가고, 장 부장 넌 김 차장 시켜서 문제 되는 브랜드의 팀장들한테 각 브랜드들에게 추가로 보낼 증거 자료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있게끔 만들어.”
“네, 알겠습니다.”
“둘 다 내려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긴장이 아니라, 이상하게 앞으로 펼쳐질 상황에 설레는 거 같았다.
그리고 키보드를 두드릴 손가락은 근질거렸고.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해당 브랜드들에게 단체 메일을 보내야 하다 보니 단 한 글자의 오타도 만들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해당 브랜드들은 앞으로 내가 보내게 될 메일을 가지고 CGM에게 정황을 다시 따질 테니.
결국 CGM도 내가 브랜드들에게 보낼 메일을 보게 된단 말일 거니까.
일단 한글로 작성했다.
그리고 그 작성된 내용을 장향은에게 사내 메신저로 보내서 영어와 불어로 동시 번역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렇게 영어, 불어로 번역된 컴플레인 레터를 김 차장과 장 부장, 그리고 박 이사에게 동시에 사내 메신저로 발송했다.
-진행해.
박 이사로부터 짧은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고, 난 해당 브랜드들에게 그 메일을 전체 보내기 하며, 거기에 장 부장과 박 이사의 메일 주소도 함께 첨부시켰다.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 폭발적이었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 오후 4시부터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랜드 본사들로부터 전화, 메일 가릴 것 없이 확인차 연락이 쏟아졌고, 꽤 오래 이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던 우리 홍성 영업부 팀장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홍성의 입장을 단단하게 전달했다.
“공 차장.”
“네, 차장님.”
김 차장이 영업 기획부 사무실까지 직접 내려왔다.
영업 마케팅부의 내선 전화기들이 모두 브랜드 본사들과 연결 중이라 내게 내선 전화를 칠 수도 없었고, 또 마침 내가 통화 중이라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 되더라면서 직접 내려온 거다.
“공 차장이 산 가방 있잖아.”
“네.”
“그 사이트 업자에 대해 물어볼 게 있다고 공 차장과 직접 통화를 좀 해봤음 좋겠다고 하는데?”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하미힐 본사지.”
“아, 네. 제가 전화 주면 되는 겁니까?”
“메신저 확인해 봐. 내가 거기 담당자 직통 번호 보내놨으니까. 후우… 전쟁이네, 전쟁.”
김 차장은 영업 마케팅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운이 덜 감도는 영업 기획부 사무실을 쭈욱 한번 훑어본 다음 엘리베이터 복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난 모니터에 뜬 메신저 창을 통해 김 차장이 보내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프랑스.
“홍성 인터내셔널 공은태입니다.”
-미스터 공, 하미힐의 에반 주르입니다.
상대는 이미 상황의 심각성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상당히 정중했으며, CGM 쪽의 잘못을 비난하는 걸 시작으로 나와의 통화를 이어갔다.
-저희 역시 이런 특수한 경우는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를 하는 게 맞는 건지 상당히 헷갈리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보낸 메일 말고 홍성의 귀사 브랜드 담당자로부터 추가 메일은 받으셨습니까?”
-네,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희가 그 메일만 가지고 사실 여부를 따져볼 수는 없지만, 홍성의 정보를 신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라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수월해지겠습니다.”
-저희가 CGM과 접촉을 해보기 전에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네, 말씀하시죠.
“제가 먼저 몇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처음 귀사와 홍성이 한국 시장 브랜드 컨트롤 계약을 맺었을 당시, 홍성이 컨트롤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오프라인 매장에만 한하고, 정말 특별한 경우 온라인 사업을 하거나, 혹은 온라인 사업자에게 사입 대행을 해야 할 경우 반드시 귀사와 합의를 해야 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명시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희가 한 게 아니라 귀사가 만든 계약서에 그 조항이 들어있었습니다.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그럼 혹시 그 조항이 컨트롤 기업에 따라 혹은 상대에 따라 포함이 되기도 하고 포함이 안 되기도 하는 겁니까? 그런 건데 홍성과의 계약 조건엔 포함이 된 거고… 혹시 그런 겁니까?
-음… 아닙니다. 다 똑같이 포함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럼 이번 CGM의 경우는 귀사의 동의하에 이뤄진 해프닝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미스터 공. 그 부분은 절대 오해가 없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CGM 측으로 온라인 판매에 대한 그 어떤 허가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이런 경우 귀사는 홍성과 계약을 할 당시 계약서에 명시했던 페널티를 반드시 CGM 쪽에 주셔야겠군요.”
-만약 사실로 드러나게 되면….
“반드시입니까, 아니면 상황에 따라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까?”
-….
“반드시입니까, 아니면 상황에 따라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까?”
난 재차 물었다.
-…반드시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셨으면 아마 홍성과 만토바는 동시에 귀사를 포기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