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0
생각 많이 하면 답이 나와?
혹시 4억짜리 옷을 실제로 본 적이 있나?
나는 처음 봤다.
이젠 나름 베테랑 소리를 들어도 될 정도로 이쪽 업계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런 나도 4억짜리 옷은 이번에 처음 봤다.
여자 옷이다.
여성 이브닝드레스.
워낙 억억 거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이 4억이라는 돈이 그냥 이야기로만 들어서는 크게 안 와닿을 수도 있는데,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금액의 옷이냐면 보통 샤넬도 2천만 원, 3천만 원 정도면 ‘괜찮은’ 라인의 이브닝드레스를 살 수가 있다.
그냥 괜찮은 정도가 아니고 그 정도면 꽤 높은 라인의 드레스를 찾을 수가 있다.
특별한 보석이 세팅되어 있지 않다는 전제하에.
물론 그 2천만 원, 3천만 원 하는 드레스도 말이 안 되는 금액이긴 한데, 그래도 4억에 비하면 현실적인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타미 총게가 뉴 컬렉션으로 내년 전시에 풀릴 옷 한 벌을 보험까지 들어가며 직접 가지고 왔다.
듣자 하니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그만큼 모리엘츠 측도 이번 홍성과의 계약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는 증거였고.
드레스 타워를 우리 홍성 측이 별도로 준비를 했는데, 그 드레스 타워가 민망할 정도로 화려한 드레스였다.
드레스 타워라고 하면 보통 웨딩드레스를 상상하면 이해가 쉬울 거 같다.
웨딩드레스 같은 경우 그냥 디스플레이를 하기도 하겠지만, 보통은 쇼윈도나 딱 그 드레스 사이즈에 맞는 유리 타워에 넣어서 디스플레이를 많이들 한다.
당연히 그 타워 안에는 드레스 라인을 최대한 잘 살려줄 수 있는 머리 없는 마네킹이 고정되어 들어가 있고.
웨딩드레스로 유명한 베라왕의 드레스 타워를 만드는 업체를 통해 특별 제작을 한 타워였는데, 처음 그 타워가 본사로 도착했을 땐, 이미 그 타워만으로도 무척 고급스럽단 느낌을 강하게 받았었다.
그런데 막상 4억짜리 이브닝드레스를 그 타워 안에 고정되어 있는 마네킹에 입히는데, 우리 쪽의 준비가 많이 부족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미 총게가 어느 정도까지 신경을 써서 이번에 한국을 방문했느냐면, 미키모토(진주 관련 주얼리 브랜드) 측에게 48구(펜던트 부분만 진주가 아니라 최상급 진주 48알이 꿰어져 있는 목걸이)짜리 진주 목걸이를 협찬까지 받아서 함께 가지고 왔다.
그 진주 목걸이의 실제 리테일 가격만 해도 8천만 원 가까이 한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 그냥 넋을 잃고 타미 총게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모리엘츠 측 VMD 담당자가 마네킹에 4억 8천만 원을 입히는 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검은색 벨벳 재질의 드레스였는데, 가슴팍에 다이아몬드로 수를 놓았다.
그런데 그 수가 놓인 형태가 거미줄을 표현한 거라고 한다.
비 온 뒤 거미줄에 맺힌 물방울.
그걸 검은색 벨벳 재질의 드레스 위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표현을 했다고 한다.
너무 기가 막히니까 크게 놀랍지도 않았다.
그냥 왜 옷에다가 저런 장난을 치는지 궁금할 뿐이었고.
그리고 허풍을 떠는 건지, 아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라인이면 아랍 쪽에서 쉽게 판매가 된다는 타미 총게의 말에 웃음밖에 안 나왔다.
세상은 넓고 돌아이는 많다고 하더니, 진짜 이런 옷을 제 돈 다 주고 사는 사람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런 사람들이 있으니 여전히 모리엘츠가 존재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여기서 드레스 한 벌에 4억이라는 것보다 더 말이 안 되는 돌발 상황이 발생한다.
사장님과 타미 총게, 그리고 만토바 창고 사장들을 대표해서 스폰짜가 기념 촬영을 끝내고 포토존으로 만들었던 중형 회의실 옆의 대회의실로 옮겼을 때였다.
대회의실의 회의 테이블 역시 오늘을 위해 약간의 레이아웃을 다시 잡아놓은 상태였다.
벽 쪽으로 일인용 물소 가죽 소파 세 개를 자리시키고, 각 소파 사이에 물과 음료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키가 작은 협탁 세 개를 함께 놓아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엔 그냥 의자들만 열을 맞춰서 놓아두었고.
물론 난 그 의자에서도 가장 끄트머리 자리에 간신히 자리를 배정받은 입장이었다.
차례대로 전무님과 상무보를 시작으로 임원진들이 자리에 앉았고, 그 뒤 라인으로 각 부서장들이 자리를 잡았으며, 나와 김 차장, 그리고 영업 2팀 직원들은 가장 마지막 라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음… 조금 전에 옆 방에서 봤던 드레스 말입니다.”
사장님이 유창한 영어로 타미 총게에게 물었다.
사장님이 직접 영어를 구사하시는 것 역시 이번에 처음 본 거다.
상당히 유창했다.
비록 발음은 딱딱 끊어지는 국산 발음이었지만, 사용하시는 어휘는 무척 고급이었다.
“네.”
“보통 저 정도 라인의 작품도 판매가 이뤄지면 저희 같은 SC 에이전시나 유통 판이 가져가는 커미션 비율은 어떻게 됩니까?”
“가격엔 상관이 없습니다. 모든 컬렉션에 동일한 커미션 베이스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음….”
사장님은 고급스러운 물잔에 담긴 물 한 모금으로 입을 축이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럼 가지고 오신 컬렉션… 저희 홍성이 구매하도록 하겠습니다.”
“…!”
정말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타미 총게 역시 살짝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의젓하셨고, 오히려 당황하는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미소를 지으셨다.
“내년 모리엘츠 팝업 전시 순서에 저희 홍성을 1순위로 해주시겠다 약속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네.”
“저희 입장에선 상당한 영광이고 또 큰 의미가 있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럼 당연히 저희가 내년 모리엘츠 컬렉션의 첫 고객이 되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타미 총게를 사이에 두고 가장 사장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스폰짜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놀랍다는 표정을 애써 숨기고 있었다.
“저희 홍성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파트너십이라 함은 기본적으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신의가 먼저 자리를 잡아야 제대로 형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가는 숫자는 그 뒤의 일이구요. 아시안 정서일 수도 있지만, 전 제가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영업을 할 때에도 항상 그런 마인드로 브랜드 본사들과 관계를 맺어왔고, 또 그렇게 하니까 어지간하면 큰 실수는 나오지가 않더라고요.”
“….”
“항상 동등한 입장일 순 없더라도 최소한 동등한 입장에 서기 위해 서로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파트너가 힘들게 만들어 놓은 역사와 시장 장악력을 이용하려고만 할 게 아니라.”
“훌륭하십니다.”
“처음 저희 직원들이 모리엘츠와 접촉을 했단 이야기를 듣고 고민을 많이 해봤습니다. 과연 홍성이 모리엘츠를 그 급에 맞게 제대로 컨트롤을 할 수 있을까. 그 정도 역량이 갖춰져 있을까… 부끄럽지만 아직 그렇게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한 거 같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충분히 훌륭하고 또 자질을 갖춘 인재들이었습니다. 최소한 제가 직접 만나본 홍성의 직원들은.”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더 많이.”
그리고 사장님은 마치 자리에 참석한 홍성맨들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정면을 바라보시며 말을 이으셨다.
“파트너에게 실수를 하지 않도록, 그리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인해 실수가 났을 때엔 무의미하게 먼저 잘잘못부터 따지는 게 아닌 최대한 빠르게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그리고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직원들에게 주문을 하겠습니다.”
“사실 그게 전부죠. 파트너십에서 그 이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토바와 모리엘츠의 역사, 그리고 시장의 영향력을 등에 업은 만큼 앞으로는 조금 더 겸손하라고도 주문하겠습니다.”
그때부터 타미 총게와 스폰짜는 사장님이 자신들에게 하는 말이 아닌 자리에 참석한 홍성맨들에게 하는 주문이라는 걸 눈치채고 일일이 사장님의 말씀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홍성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아주 오래전 로드샵까지 기웃거려야 했던 홍성. 당시 제가 몇 명 안 되는 홍성 직원들에게 홍성을 업계 탑으로 끌어올리겠다 약속을 했을 때 대부분 속으로 웃었을 겁니다.”
좌중은 조용했다.
그리고 조용한 좌중만큼이나 사장님의 표정은 고요했고.
“갖춰져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재밌게도 그때 제가 했던 막연한 약속을 믿어준 직원들만이 지금 저 자리에 저렇게 앉아 있네요. 그때 제가 홍성을 업계 탑으로 끌어올리겠다 했을 땐 솔직히 그런 약속을 하고 있는 저 스스로도 의문이 컸습니다. 의욕만 가지고 떠들었던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확신이 생기고 있습니다. 홍성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그리고 믿고 싶습니다. 지금은 제가 이런 말을 하더라도 속으로 웃는 직원들이 없기를….”
“….”
사장님은 타미 총게와 스폰짜에게 차례대로 손을 내밀며 말씀하셨다.
“제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타미 총게와 만토바 창고 사장들이 본사를 떠난 뒤, 사장님은 급하게 임원 회의를 소집하셨다.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의 선봉장을 잡을 수밖에 없게 된 나와 장 부장도 함께 불려가게 됐다.
조금 전 보여주셨던 진지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조금은 가벼워진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임원들을 향해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저 옆 방에 있는 드레스 말이야. 누구한테 입히면 본전을 뽑을 거 같나?”
갑자기 원래의 사장님 버전으로 돌아와 계셨다.
조금은 가볍게, 하지만 한마디, 한마디에 뼈를 담는 화술.
표정이 가벼워지셨다고 해서 절대 방심이란 걸 하면 안 된다.
언제 어디서 툭 하고 뼈 때리는 말씀을 하실 줄 모르니까.
“이영애? 심은하? 저 급에 맞을 만한 배우 중에 지금 급하게 떠오르는 사람은 난 그 둘밖에 없네.”
“….”
“입혀. 그게 누가 됐더라도 필요하겠다 싶으면 비용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입혀. 입혀서 최대한 홍성이 모리엘츠를 잡았고, 또 내년 모리엘츠 전시권 1순위를 따냈다고 홍보를 해. 아 참, 박 이사.”
“네, 사장님.”
“됐어, 앉아. 그냥 앉아서 대답해.”
“…네.”
“CGM…. 언제까지 그렇게 밍숭맹숭하게 처리할 건데?”
“….”
“쫓아내. 겁만 주지 말고 그냥 쫓아내 버리라고. 왜? 못 해?”
“아,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럼 해. 왜 안 하고 있어? 홍성이 동네북이야? 왜 홍성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나? 아직 안 맞아봐서 그래? 맞으면 어떤 기분일지 짐작만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맞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닙니다.”
“맞으면 아파. 그냥 그거밖에 없어. 눈에 보이는 게 전부야. 멱살을 잡고 흔들든, 아님 같이 돌멩이를 던지든 뭐라도 하라고. 왜 그렇게 생각이 많아. 생각 많이 하면 답이 나와?”
“….”
“다음에 내가 다시 묻기 전에 먼저 쫓아내놓고 쫓아냈다고 보고만 해.”
“…네.”
“자네가 그 정도도 못 막아내면 내가 직접 해야 되는데… 그럼 내가 왜 자네한테 회삿돈으로 월급을 줘야 되나? 내가 직접하고 자네한테 줄 월급 내가 먹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