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그래서 요청드립니다
상무보가 직접 공항 픽업을 나갈 정도로 홍성은 이번 삼 사(만토바는 각각의 창고 사장들이지만, 그냥 하나의 만토바로 묶어서 진행한다) 회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형식을 중요시하는 모리엘츠 측.
상무보와 장 부장이 직접 공항 픽업을 나가서 그들을 환대하고, 호텔 체크인 수속을 끝낸 다음 해당 호텔 한식당에서 전무님 주최하에 형식상의 만찬 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그 식사 자리에서 다음 날 사장님께서 직접 참석하시는 삼 사 회동에 대해 다시 한번 구체적인 일정을 설명할 것이고, 삼사를 대표하는 수장들의 기념 촬영을 정식으로 요청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물론 기념 촬영에 관한 내용은 이미 타미 총게가 타고 올 그의 퍼스트 클래스 티켓을 이메일 상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정확하게 언급을 했었다.
그 기념 촬영을 위해 홍성은 포토존까지 미리 설치를 해놓은 상태였고, 타미 총게가 가져올 모리엘츠 컬렉션 한 벌을 특별 전시할 드레스 타워까지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나와 안 팀장이 맡게 된 만토바 사장단의 공항 픽업은 상대적으로 형식보다는 친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나와 안 팀장이 공항에서 그들을 환대한 뒤 홍성 본사를 기준으로 타미 총게 일행이 묵게 될 호텔과 정 반대쪽에 있는 호텔로 만토바 창고 사장들을 안내하고, 체크인을 도와준 뒤 박 이사와 합류를 하기로 되어있다.
“하이, 미스터 공!”
각자 자신의 기내용 슈트케이스를 하나씩 끌며 미스터 스폰짜를 시작으로 만토바 사장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긴 비행 하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가방 이리 주십시오.”
“아니에요. 난 괜찮으니까 삐에르 좀 도와주세요.”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살짝 내게 귓속말을 하는 스폰짜였다.
“미스 장 줄 거라고 선물을 챙겨왔다네요. 짐이 많아.”
다른 창고 사장들에 비해 그래도 아직은 상대적으로 젊고, 또 멋을 중시 여기는 미스터 스폰짜.
파란색 리모바 슈트케이스와 색깔을 맞춘 그의 파란색 슈트는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희끗희끗한 턱수염이 그림처럼 어울리는 중년의 잘생김도 한몫하고 있었고.
은근히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인물이다.
도로가 꽁꽁 얼어붙기 시작한 11월 말.
그럼에도 그는 마치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 한국의 날씨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리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파란색 슈트를 돋보이게 만드는 가슴팍의 노란색 행커칩은 이번 그의 공항 패션의 압권이었다.
공항에서 간단하게 창고 사장들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주고받았고, 안 팀장은 곧바로 주차장으로 가서 공항 청사 앞으로 승합차를 세웠다.
그러는 동안 난 미스터 스폰짜와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잠시 양해를 구하고 박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도착했어?
“네, 이사님. 지금 막 만났습니다.
-오케이, 오케이… 알았어. 그럼 나도 슬슬 준비해서 나갈게.
“그럼 전 장 대리한테 연락해서….”
-아냐, 아냐. 그냥 놔둬. 여기 일은 내가 챙길 테니까 공 차장 넌 여기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눈앞에 있는 손님들만 챙겨. 먼 길 온 사람들 앞에 놔두고 계속 전화기 붙들고 있는 모습 보이는 것도 실례다.
“네, 알겠습니다.”
난 박 이사의 음성에서 묘한 흥분을 감지할 수 있었다.
박 이사 역시 본격적으로 전투 모드에 들어갈 모양이었다.
안 팀장이 운전대를 잡은 승합차.
난 그 승합차에 만토바 창고 사장들 오르는 걸 확인한 다음 조수석에 올랐다.
“곧바로 호텔로 갈 겁니다. 체크인부터 한 다음 바로 저녁 식사를 하러 갈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삐에르가 미스 장도 오는지 물어보네요.”
삐에르라고 대머리 아저씨가 한 분 계신다.
영어를 전혀 못 하는데, 통역이 가능한 장향은만 있으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다.
이번에 한국에 오면서 장향은에게 줄 선물이라며 베르사체 이브닝백을 하나 따로 챙겨왔다고 한다.
오십 중반의 아저씨다.
장향은에게 개인적인 사심이 있어서 그러는 건 절대 아니고, 홍성이 만토바 제품들을 중국 법인으로 센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매출이 기존보다 두 배 이상 뛴 창고의 주인이다.
베르사체 일체(가격 타깃에 따라 베르사체, 베르사체 컬렉션, 베르사체 진. 이렇게 세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를 유통하는 아저씨인데, 타이밍이 정말 기가 막혔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명품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중국에서 베르사체가 다시금 탄력을 받아 크게 터지고 있는 중이고, 그중에서도 가격 경쟁력이 좋은 서브 라인 베르사체 컬렉션이 한때 한국에서 모스치노 티셔츠가 불티나게 팔렸던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나가면서 큰돈을 만지고 있는 중이다.
물론 타이밍이 기가 막혔던 이유도 있지만, 장향은이 중간에서 센터를 잘 보기도 잘 봤다.
거기다 삐에르 아저씨의 입장에선 홍성 직원 중 유일하게 자기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장향은이니 한국에 초대받아 오는 길에 뭐라도 하나 챙겨주고 싶지 않았을까.
“당연하죠.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호텔로 향하는 동안 난 무음 모드로 바꿔놓은 스마트폰으로 장 부장에게 카톡을 하나 보냈다.
-지금 막 만토바 창고 사장님들 도착했고, 현재 호텔로 가는 중입니다.
일종의 보고였다.
그런데 내가 보낸 메시지에서 숫자 1은 만토바 창고 사장들과 함께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 수속을 끝낼 때까지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미 체크인 수속을 다 끝내놓고, 전무님과 만나 타미 총게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잘되어야 될 텐데…
호텔 근처의 암소 갈비 전문점.
며칠 전부터 미리 예약을 해뒀던 그 식당엔 이미 박 이사와 장 대리, 그리고 박 대리가 먼저 도착해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미스터 박.”
“그저 눈 한 번 감았다 뜬 게 전부인 거 같은데 벌써 이렇게 한국에서 다시 뵙는군요. 먼 길 오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만토바 창고 사장들 같은 경우는 이번 한국 방문을 사업적인 출장이라고 생각하기보다, 홍성으로부터 비행 티켓과 숙박을 제공받으면서 대우까지 받으러 온 일종의 한국 마실 정도로 여기고 있을 거다.
물론 현재 한성을 앞세운 CGM이 한국 인터넷 쇼핑몰 시장에서 무슨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지에 대해선 미리 안 팀장을 통해 전해 들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 큰 관심은 없는 눈치였다.
최소한 한국 시장 안에서만큼은 말이다.
“자, 그럼 제가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박 대리, 맥주컵 좀 내 앞으로 다 모아줘.”
“네엡!”
안 팀장과 장 대리, 그리고 박 대리가 차례대로 돌아가며 각자의 개성대로 만토바 창고 사장들을 위한 폭탄주 제조에 들어갔고, 그 폭탄주가 몇 차례 전국주로 돌아간 뒤 본격적으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근데… 홍성과 CGM은 어째서 지난 몇 년간 계속 그렇게 부딪치는 겁니까?”
스폰짜가 물었다.
나와 박 이사가 나란히 앉아있는 테이블에 미스터 스폰짜가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게요. 저희도 방법만 있다면 그 이유를 좀 알고 싶네요. 어째서 CGM씩이나 되는 글로벌 기업이 저희 홍성을 상대로 매번 이렇게 치사한 공격을 해오는 건지. 하하하….”
장 대리는 박 이사의 말을 영어가 부족한 다른 창고 사장들을 상대로 갖가지 표정과 손동작을 사용해가며 열심히 통역했다.
“혹시….”
스폰짜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저런 미소를 얼굴에 띨 때엔 뭔가 짓궂고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 이어지기 마련.
“그동안 CGM이 해오던 모리엘츠 SC 권한을 홍성에게 빼앗겨서… 거기에 대한 일종의 보복 같은 걸 하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박 이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CGM과 한성은 홍성이 모리엘츠와 인연이 닿기 이전부터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스폰짜는 그제야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스폰짜를 향해 박 이사가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CGM은 모리엘츠 SC 건에 대해 모리엘츠나 저희 홍성에게 서운해할 입장이 전혀 못 됩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선 팝업 전시를 진행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아직 중국 시장 역시 어떻게 들어가야 되는지 그 방법을 못 찾아 헤매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리고 보복이라니요?”
박 이사가 코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여긴 한국입니다.”
난 옆에서 가만히 들으면 침만 한번 꼴깍하고 삼켰다.
“그리고 상대는 CGM이고요. 보복이라는 걸 해도 저희가 해야 앞뒤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거지, 저희를 상대로 CGM이 보복을 한다? 글쎄요… 그건 좀 말이 안 되는 거 같습니다. 차라리….”
“…?”
“차라리 지금 CGM이 한성을 앞세워서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저희 홍성이 아니라 만토바를 겨냥한 게 아닐까… 라는 의문을 가져보는 게 좀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스폰짜는 무척이나 여유롭게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마치 만토바는 CGM 같은 족보 없는 유통 기업 따윈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투로.
하지만 박 이사는 여전히 진지했다.
난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스폰짜는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몇 차례 고개만 끄덕이기 시작했고, 이제 막 박 이사가 한 말을 통역한 장향은의 목소리를 끝으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웅-웅-웅….
진동 모드로 바꿔놓았던 스마트폰이 몇 차례 진동을 울렸다.
난 눈치를 보며 테이블 아래에서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이제야 장 부장으로부터 카톡 답장이 온 거였다.
-내년 모리엘츠 전시권
-홍성에게 1순위로 주겠다고
-금방 약속받아냈다
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카톡 메시지였다.
한 번에 보내지 않고 세 번에 나뉘어서 들어온 카톡 메시지.
그리고 그 순간 그 정적을 깨뜨리며 스폰짜가 말했다.
“한국에서 만토바를 겨냥하면 뭐 달라지는 게 있나요?”
스폰짜는 말을 끝내놓고 피식하고 웃었다.
물음을 던지면서도 CGM이 만토바를 겨냥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박 이사가 뭔가 대답을 하려고 했고, 난 그런 박 이사를 잠시 잡아 세우며 장 부장으로부터 받은 카톡 메시지를 보여주며 스폰짜를 향해 조심히 입을 열어 말했다.
“아직도 CGM을 잘 모르시네요.”
스폰짜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만약 저희가 지금 CGM과 만토바, 혹은 CGM과 저희 홍성이 겹치게 확보하고 있는 브랜드들을 상대로 현재 CGM이 한성을 앞세워서 한국 시장에서 하고 있는 마진 장난에 대해 고발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거 같으십니까?”
“…?”
“그럼 CGM은 틀림없이 해당 브랜드들에게 자기들은 몰랐던 일이라고 깜짝 놀라는 연기를 할 겁니다.”
“응?”
“CGM 본사가 아니라 CGM 코리아가 하고 있는 일이니까요.”
“…!”
“그게 바로 CGM 놈들의 스타일입니다. 한국에서 만토바를 겨냥하면 뭐 달라지는 게 있느냐고요? 아직 CGM이랑 정면으로 붙어보신 적 한 번도 없으시죠?”
“저희가 그쪽이랑 엮일 일이 어디에 있겠어요? 관심 없어요. 그쪽은 그쪽 길 가는 거고, 저흰 또 저희 길을 가는 거죠.”
“보통은 미스터 스폰짜처럼 사업을 대하는 게 정상인데, 안 그런 사람들이 있다니까요? 그게 바로 CGM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그런 그들의 스타일을 질리도록 봐 오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아직 참고 있을 뿐입니다. 그냥 어중간하게 대처를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번에 끝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
“그래서 요청드립니다. 저희가 브랜드 본사들을 상대로 만토바라는 타이틀을 무기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좀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런 거야 뭐 얼마든지 필요하면 갖다 쓰세요.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