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지를 땐 좀 지릅시다!
“네, 그러셨군요.”
-하하하. 저희도 뭐 사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입장이라 나머지 대외비에 대해선 딱히 더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그래도 기본은 알고 있는 상대.
현재 자신들이 펼치고 있는 작전이 상도덕에 어긋난다는 건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무리수지만 결국 제 살 갉아먹기밖에 안 되는 그런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는 자기네 회사 입장에서 나와의 통화를 이어갔다.
그래, 어떻게 보면 저게 맞는 걸 수도 있다.
제 살을 갉아먹더라도 지금 당장 굶어 죽는 것보단 저렇게라도 하는 게 낫지.
하지만 문제는 꼭 이런 악수를 두지 않더라도 한성 정도 되면 얼마든지 내공이 있으니 다른 방향에서 살길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꼭 CGM과 손을 잡았어야 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거였다.
남의 집 제사상에 배 놔라 감 놔라 할 수는 없는 거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바쁘실 텐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궁금하신 내용은 해소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합니다.”
내가 상대와 통화를 하는 동안 양 팀장은 아예 차장 공간 파티션 안으로 들어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채 심기가 무척 불편한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었고, 그 옆에서 안 팀장은 파티션에 상체를 기대어 놓고 손가락 큐티클을 물어뜯고 있었다.
내가 상대와의 통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양 팀장이 물었다.
“뭐랍니까?”
난 그냥 웃었다.
웃음만으로도 이미 대답은 충분한 상황이었으니까.
양 팀장 역시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피식하고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정도면 CGM이 아니라 씨발엠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오… 라임 좋은데?”
옆에서 안 팀장이 엄지를 세우며 양 팀장이 한 말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이해를 할 수가 없네. 그래도 명색이 한성인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가 있는 거지?”
양 팀장의 아쉬움은 너무나 당연한 거였다.
우린 변화를 원하지 않으니까.
스타트 업 회사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업계 1위 자리를 수년째 지키고 있는 홍성의 입장에선 시장이 변화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
귀찮으니까.
변화가 시작되면 또 거기에 맞춰서 회사 체질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거니까.
그것만큼 귀찮은 일이 어디에 있겠나.
하지만 이미 상대는 주사위를 던졌고, 우린 주사위가 가진 가장 큰 숫자 6보다 훨씬 더 높은 숫자를 들고 있음에도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금 어쩌실 겁니까?”
양 팀장이 물었고, 난 책상 아래에서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구두로 갈아신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챙기며 말했다.
“지금요? 음… 일단 지금은 담배나 한 대 피우러 가려고요.”
“…?”
“좀 계세요. 저 담배 한 대만 얼른 피우고 내려올게요.”
“아, 좀 끊으세요. 몸에 좋지도 않은 거…”
양 팀장답지 않게 내가 담배를 피우는 거로 태클을 걸고 있었다.
그만큼 자기도 신경이 쓰인다는 뜻이겠지.
“한 대만 딱 피우고 올게요.”
나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라는 게 필요했으니까.
“흐으으음, 흠흠흠… 흠흠흠….”
17층으로 올라가 야외로 통하는 문을 열기가 무섭게 차가운 겨울바람이 볼에 와닿았다.
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난간 쪽으로 향했고, 바깥세상을 향해 난간에 기대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흠흠흠… 흐으음… 흠흠흠… 흐으음….”
겨울바람이라 확실히 날카롭긴 날카로웠다.
몇 모금 빨지도 않았는데, 담배 한 개비가 벌써 필터까지 타들어 가 있었다.
“콜록, 콜록….”
갑자기 마른기침이 나왔고, 그럼에도 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줄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계속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야 홍성이 호구 짓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더 이상은 이런 도발을 받지 않아도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며.
“흐으음… 흠흠… 흐으으음….”
그렇게 담배 두 대를 연이어 피운 다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영업 기획부 층을 누른 다음 그 버튼을 다시 한번 눌렀다.
아무래도 장 부장한테 먼저 말해주는 게 순서일 거 같았다.
그래서 다음 영업 마케팅부 층 버튼에 불이 들어오게 만들어놓고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는 거울로 내 상태를 확인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을 정리해놓고 그렇게 장 부장을 만나러 갔다.
“아….”
장 부장의 첫 반응은 나의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귀찮아 죽겠다는 식으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언제나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하는 습관성 발언을 혼잣말로 흘렸다.
“걔네들 진짜 왜 그러냐? 아, 피곤하네, 증말….”
그런 다음 또 버릇처럼 날 질책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 터지기 전에 미리미리 컨트롤 좀 하지 그랬어.”
이제는 안다.
이게 날 향한 질책이 아니라는 걸.
그냥 자기도 답답하고 피곤해서 화풀이 삼아 하는 말이라는 걸.
예전엔 내 잘못도 아닌데 장 부장에게 이런 소리를 들으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나쁘고 또 직장 생활에 힘이 빠졌는데, 이제 장 부장이라는 사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경지에 이르니까 이런 짜증 섞인 핀잔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가 있게 됐다.
여기서 장 부장이 나에게 더 이상 짜증을 못 내게 만들기 위해선 내가 더 화를 내버리면 된다.
내가 더 상대의 몰염치에 흥분하고 화를 내버리면 그런 모습을 보고 장 부장은 자신이 가진 화를 삭이며 날 진정시킨다.
직장 생활?
별거 없다.
지랄 맞은 상사?
그 역시 별거 없다.
내 눈앞에 있는 상대와 상황에 함몰되지 않고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만 있게 되면… 그럴 수만 있으면 따지고 보면 직장 생활만큼 할 만한 것도 없는 거 같다.
망해도 회사가 망하고 위기에 처해도 회사가 위기에 처하는 거지, 그 망함과 위기가 나의 삶과 직결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밟아버릴까요?”
“…!”
“그렇게 하시죠, 부장님.”
내가 던진 말에 장 부장은 흠칫하고 놀라며 입맛을 다셨다.
“이참에 상도덕이고 나발이고 그냥 밟아버리시죠.”
“….”
“아니,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관용이라는 걸 베푸는 것도 정도껏이지, 우리 직원들 피곤하게 만들어가면서까지 상대 업체한테 관용을 베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야, 인마, 은태야. 아무리 그래도…”
“이거…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틀림없이 나중에 엄한 곳에서 말 나옵니다.”
“…”
“솔직히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CGM이 한성 끼고 유통 판에 다시 들어갈 때, 그때 한 번 이해를 해줬으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닙니까? 여기서 저희가 뭘 더 어떻게 이해를 하고 지켜만 봐야 하는 겁니까?”
이렇게 장 부장의 속에 있는 말을 내가 내 입을 통해 속 시원하게 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다.
그럼 장 부장은 내가 하고 있는 흥분에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되는 거고.
이게 지금껏 내가 공부해온 장 부장이라는 사람이었다.
“일단 진정해. 무슨 말인지 다 알고 있으니까 일단 진정하고 차근차근 정리를 하면서 방법을 생각해 보자. 너처럼 그렇게 막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나가면 안 돼.”
“아, 부장님….”
“아, 안다니까? 나도 알아. 네가 지금 무슨 기분일지.”
“하아… 진짜 부장님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사람이 너무 좋은 게 탈입니다.”
“쩝… 어쩌겠냐.”
“아, 그냥 지를 땐 좀 지릅시다!”
“쓰읍… 목소리 좀 낮춰 인마. 아냐, 아냐… 별일 아냐. 다들 하던 일 해.”
그렇게 난 장 부장으로부터 총대는 자신이 멜 테니, 자신이 총대를 멜 수 있도록 괜찮은 그림을 하나 그려볼 수 있겠냐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 제안이라는 게 재밌다.
만약 내가 이렇게 장 부장을 대신해서 화를 내지 않고, 또 흥분을 하지 않았다면 그 제안은 괜찮은 그림을 하나 그려오라는 지시로 바뀌게 된다.
어차피 내가 해야 하는 거라면 이렇게 이렇게 해오라는 지시를 받는 것보다는 이렇게 해볼 수 있겠어? 하는 제안을 받으며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난 다시 영업 기획부 층으로 내려왔다.
“담배를 몇 개비나 피우셨습니까?”
“기다리셨습니까?”
“아, 당연하죠.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온다고 하셨잖아요.”
양 팀장은 입맛을 다시며 잔소리를 시작했고, 여전히 큐티클을 물어뜯으며 안 팀장이 내 자리로 왔다.
“부장님께 보고 좀 드리고 왔습니다.”
“아…”
“사고를 치더라도 보고부터 해놓고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제야 안 팀장은 역시 이렇게 나와줘야 공 차장이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를 걸었다.
양 팀장 역시 이번엔 홍성이 그냥 넘어가 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살짝 안심을 하는 눈치였고.
“회의실 잡을까요?”
안 팀장이 말했다.
그래서 난 고개를 짧게 흔들며 말했다.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이렇게 합시다.”
“….”
“양 팀장님.”
“네, 차장님.”
“현재 만토바랑 CGM이 겹치고 있는 브랜드 리스트 한번 쫘악 뽑아보세요.”
“넵!”
“최소한 국내 시장 안에서만큼은 라이센스 다 뺏어버립시다. 이것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우릴 보자기로 보고 있네요.”
“그러니까요. 아닌 건 아닌 건데, 그동안 홍성이 너무 젠틀했습니다.”
“일단 양 팀장님은 겹치는 브랜드 리스트만 뽑아놓고 대기하세요. 그리고 안 팀장님.”
“네엡!”
“그… 모리엘츠 말입니다. 모리엘츠 마케팅 디렉터.”
“미스터 총게.”
“네, 그 양반 초대 한번 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로요? 한국으로요?”
“네. 일단 명분은 알아서 만들어 보시고, 뭐 어차피 내년부터 한국이랑 중국 쪽 SC를 우리가 하기로 했으니까 전시권 순서 정해지기 전에 한국으로 초대해서 간단하게나마 사진 촬영 몇 번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요?”
“사진 촬영이요?”
“기사 내야 될 거 아닙니까.”
“…!”
“모리엘츠와 홍성이 손을 잡았다… 그걸 업계 브랜드들에게 어필하려고 마이너스 매출 각오하고 모리엘츠를 잡은 건데, 그걸 안 할 수는 없잖아요. 또 그런 공격적인 마케팅이 있어야 양 팀장님이 현재 만토바와 CGM이 함께 가지고 있는 브랜드들의 국내 라이선스를 효과적으로 뺏어오기가 수월해질 거고. 이미 내년 영업부 예산 신청할 때 그 부분에 들어갈 마케팅 비용까지 다 측정해서 넣어놨습니다. 그리고 저기 만토바에 스폰짜 말입니다.”
“네.”
“가능하면 만토바 창고 사장님들도 같이 초대를 하세요. 홍성이 왜 홍성인지… 제대로 한번 보여줍시다, 이번 기회에.”
“우와… 차장님 칼 가셨네.”
안 팀장이 우스갯소리로 말했고, 양 팀장은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다는 투로 미소만 지었다.
“칼은 이미 예전부터 갈려 있었습니다. 이게 만약 제 회사고 제 사업이었다면 진작에 뽑아서 휘둘렀겠죠. 다만 위에서 그 칼을 휘둘러도 좋다는 사인을 받아낼 명분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차장님은 그런 명분을 CGM이라면 시간이 좀 걸린다 뿐이지, 언제고 알아서 만들어줄 거라는 걸 너무나 잘 아셨던 거고?”
양 팀장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손뼉을 쳤다.
“급할 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일은 천천히 상대가 시장을 상대로 실수를 만들어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우리의 당위성을 충분히 확보해놓고 진행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상대가 무슨 병신 짓을 하더라도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우린 천천히 한 방에 상대를 녹다운을 시킬 수 있도록 준비만 해놓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