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66화 (166/325)

# 166

냄새가 나요

“차장님, 혹시 정 주임 기억합니까?”

정 주임, 정 주임…!

“네, 기억하죠. 정주연 씨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네.”

화요일 오전.

안 팀장이 팀장 미팅 중에 뜻밖의 인물을 거론했다.

주임이라는 타이틀이 어느 순간 우리 홍성 영업부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것 역시도 회사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일 텐데, 예전에는 공채로 들어온 직원들은 일반 사원에서 대리로 승진을 했고, 계약직 2년 차를 채우고 3년 차에 접어드는 직원들에게는 주임 타이틀을 줘서 2년짜리 재계약을 했었다.

회사의 구식 시스템이었는데, 공교롭게도 계약직의 90퍼센트 이상은 현장 영업이 아닌 사무를 도와줄 수 있는 여직원들로 뽑았고, 또 그래서인지 대부분이 결혼, 출산 등의 사유로 주임 타이틀을 달면 아무리 길어도 2, 3년 후엔 퇴사를 했다.

안 팀장이 언급한 정 주임이 딱 그런 케이스였다.

나보다 1년 입사 선배.

나와 같은 팀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워낙에 일 처리가 깔끔하고 또 자기만의 기준이 확실한 사람이라 쉽게 다가가기 쉬운 스타일이 아니었음에도 함께 일할 당시 난 그녀를 인정하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 살이 어렸는데, 당시 내겐 없었던 카리스마가 그녀에게는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업무가 무거워도 군소리가 없었고, 또 거절을 할 때엔 확실하게 하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당시 나에겐 없었던 일종의 카리스마였다.

그런 그녀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

다른 계약직 직원들처럼 뭔가 조직의 불합리함, 불안감을 품고 출근을 하는 게 아니라 항상 당당하게 그리고 소신껏 자기 할 일을 쳐내는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3년 전쯤에 결혼과 거의 동시에 임신을 했고, 임신 6개월 차까지 출근을 하다가 퇴사를 했다.

그 이후로 그녀에 대한 소식을 따로 들어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또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안 팀장이 정 주임이라고 말을 하는 순간 너무나 선명하게 임신 상태로 별 불편함 없이 출근을 해서 업무를 보던 그녀의 홍성 막바지 모습이 떠올랐다.

“만토바 물건을 좀 받아서 팔아보고 싶다면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아….”

“이제 애도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고, 남편 혼자 벌어서는 조금 빠듯한 모양이에요. 근데….”

안 팀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새끼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어느 정도 물량을 예상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이게 참….”

“그냥 주세요.”

긴말 할 필요 없었다.

비록 우리가 컨트롤을 대행하고 있긴 하지만 만토바가 우리 물건도 아니고 또 그 정도 마진 권한은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까.

“뭐 사정이야 뻔한 거 아닙니까.”

“기본 마진율 적용시켜 줘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좀 귀찮으시더라도 언제 시간 내서 본사 한번 오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감이 많이 떨어져 있을 겁니다. 괜찮게 잘 나갈 만한 아이템들로만 찍어서 제안해주세요.”

보통 이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홍성맨들의 퇴직금이다.

이직을 하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퇴사를 하더라도 그동안 쌓아놓았던 이미지에 따라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움직일 수밖에 없고, 또 남아있는 사람들 역시 회사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어느 정도 마진을 챙겨줄 수가 있으니까.

홍성이 만토바를 잡은 뒤부터 홍성을 떠난 사람들로부터 이런 문의가 더 많이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물건을 떼기 위해 직접 만토바까지 비싼 비행기 표 끊어서 갈 이유가 없어졌고, 만토바 본진과의 마진 차이도 크게 나지가 않으며, 무엇보다 이미 세관 관련 처리가 다 끝난 물건이라 물건을 빨리 받을 수 있다는 메리트가 가장 컸다.

거기에 데미지 난 제품들에 한해 CS 처리도 확실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소문이 나고 있고, 결정적으로 안 팀장의 기획 2팀이 현재 시장 가격을 잘 컨트롤하고 있는 중이다.

보통 예전의 만토바에서 직접 물건을 떼면 물건을 받는 게 끝이었다.

판매부터 시장에서 해야 할 가격 경쟁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개인 소매업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홍성은 만토바를 잡고 국내 유통권을 따낸 뒤부터 철저하게 시장 가격을 컨트롤해 왔다.

업자에게 넘겨주는 마진에는 융통성을 발휘하였지만, 업자들이 그 물건을 가지고 시장에 던지는 리테일 가격에 한해서만큼은 엄격하게 관리를 했다.

그들이 박리다매로 낮은 가격을 책정해 인터넷에 물건을 풀어버리면 1차적으로 오프라인 영업을 하고 있는 우리 홍성이 가장 큰 피해를 보니까.

그래서 처음 만토바 물건을 국내에 유통하기 시작하면서 우리가 만든 가이드라인이 있는데, 시장에 깔 수 있는 최저 금액, 최대 금액을 업자들에게 던져주고 그걸 오케이 하는 업자들에게만 물건을 주기 시작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와중에 많은 시행착오, 변수가 있었지만 처음 가이드라인을 만들 때부터 결국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시장이 움직여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1년 동안 홍성에서 만토바 물건을 받아가서 우리가 제시했던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고 낮은 금액으로 물건을 풀다가 우리에게 적발이 된 업자들도 있었고, 그로 인해 컴플레인이 빗발치기도 했으며 또 그걸 법적 대응까지 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홍성이 그렇게 강한 입장을 고집하며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시장을 이끌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만토바의 압박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토바는 처음부터 중국 시장만 보고 있었지, 한국 시장에 대해서는 큰 기대를 안 하는 입장이어서, 한국에서 얼마만큼의 물량이 빠지는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우린 어차피 약간의 커미션만 보고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시장과 타협을 할 이유가 없었고, 그런 배짱이 적중을 한 결과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며칠 뒤 정주연(정 주임)이 홍성 본사를 찾아왔다.

나는 며칠 전 팀장 미팅 때 그녀 소식을 간단하게 듣고 다른 업무에 정신이 팔려 그녀의 존재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안 팀장이 박 대리를 시켜 해당 업무를 진행하게 만들었고, 또 내가 지시했던 대로 정주연을 본사로 초대해 효과적인 개인 장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내년 예산 관련 부서장 미팅(원래는 부장급 미팅인데, 장 부장이 다른 부서장들의 동의를 얻어 날 자리에 포함을 시켰다. 1년에 한 번뿐인 예산 관련 부서장 미팅이라 내년부터 내가 부장을 맡아 나가려면 이번 기회에 직접 참석해서 어떻게 이뤄지는지 배워야 한다는 취지로)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통유리로 오픈된 소형 회의실에서 박기태와 정주연이 마주 보고 앉아 서류 몇 장을 테이블 위로 깔아놓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난 며칠 전 안 팀장으로부터 전해 들은 정주연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고, 반가운 마음에 그 회의실 통유리를 노크했다.

“이게 누구예요?”

그냥 듣기 좋으라고 했던 말이 아니라 정말 하나도 안 변해 있었다.

하긴 고작 3년인데, 그 3년 동안 뭔가가 상당히 많이 변해 있는 것도 이상하지.

하지만 우리 누나만 봐도 애를 낳고 그 애를 키우다 보면 보통은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거나 표정에 삶의 찌듦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던데, 정주연은 오히려 더 젊어진 거 같았다.

보기 좋았다.

“그대로네.”

“결혼하셨다면서요?”

“그러게요.”

“그러게요가 뭐예요. 꼭 남 이야기 하는 것처럼.”

그녀는 옅게 미소를 지었고, 나 역시 함께 미소를 지으며 양해를 구하고 그들이 마주 보고 앉아 있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박 대리가 알아서 잘 진행하고 있겠지만, 난 그 둘 사이에 놓여있던 서류를 챙겨봤다.

“요즘 경기가 많이 안 좋아요.”

영업을 하기에 앞서 한때 동료였던 사람이다 보니 솔직한 현 업계의 상황을 먼저 말해줬다.

“더군다나 이쪽 명품 온라인 쇼핑 쪽은 이미 레드오션이고. 아니 레드오션을 지나 블랙 오션에 가깝고.”

“그냥….”

정주연은 이미 그 정도쯤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그냥 집에서 애만 보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보고 싶어서요. 애 간식값 정도만 나와줘도 제 입장에선 땡큐죠.”

그랬다.

정주연이 받고자 하는 물량은 딱 그 정도 수준이었던 거다.

그래서 난 더 꼼꼼하게 박 대리가 준비한 서류들을 읽어봐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딱 그 정도 물량밖에 주문을 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 오더 금액이 가지는 의미는 다른 업자들의 오더 금액과는 크게 다를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았다.

박 대리가 뽑아온 브랜드 리스트도 내가 봤을 땐 적당했고, 또 그 리스트에 정주연 역시 만족하는 눈치였다.

“근데 프랑스 제품은 받기가 힘든 모양이에요?”

정주연이 거기까지 기대를 하는 건 자신의 욕심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살짝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받으려고 하면 받으실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마진이 별로죠.”

업계를 한 몇 년 떠나 있다 보니 감을 정말 많이 잃은 거 같았다.

현재 우리가 개인업자들에게 주는 물건들은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전 브랜드가 아니라 만토바에서 받는 브랜드에 한하고 있다는 걸 헷갈려 하는 눈치였다.

“지방시 같은 거 하나 있으면 참 좋을 거 같은데…. 지금은 혹시 지방시 컨트롤 안 하나요? 예전에 제가 있었을 땐 단독 컨트롤을 했었잖아요.”

“아, 지금도 합니다. 하는데 단독은 아니고요.”

“단독이 아니면 받기가 힘들겠죠?”

“조금 바뀌었습니다, 시스템이. 예전에는 저희가 브랜드 본사 동의를 얻어서 사입 요청을 쳐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만토바 브랜드들을 저희가 전량 국내 컨트롤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브랜드 사입 요청은 안 하고 있습니다. 만토바에 대한 일종의 예의? 하하하…. 뭐 그런 거죠.”

“아하! 이해했어요. 그냥 한번 여쭤본 거예요. 사실 홍성에 연락을 하기 전에 저 혼자 꽤 오래 이걸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나름 이것저것 많이 알아봤었거든요.”

“그러셨겠죠.”

“근데 최근에 한성도 CGM 브랜드들을 홍성처럼 국내 유통을 시키더라고요.”

“어… 음…. 자세하게는 모르겠는데 아마 그럴 겁니다. 한성이 CGM과 손을 잡긴 잡았습니다.”

“사입 컨트롤도 함께 하고 있던데요?”

그렇게 홍성을 롤 모델로 사업을 다각화시킬 거라는 건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기에 크게 놀라울 건 없었다.

다만 벌써 그걸 하고 있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아무래도 같은 업계이고 또 CGM과 손을 잡았기에 여러모로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 기업이 한성인데, 잠시 우리의 관심사가 모리엘츠 쪽으로 쏠리고 또 연말이 다가와 내년 예산 건으로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벌써 시작을 했던 모양이다.

난 의미 없는 서류 한 장을 뒤집어 이면지 대용으로 쓰며 거기에 정주연이 말한 부분을 적어놨다.

요즘은 진짜 돌아서면 깜빡깜빡한다.

이렇게 적어라도 놔야 나중에 안 까먹고 확인을 해볼 거 아닌가.

“사실 고민이 좀 많이 되더라고요. 어디에서 사입을 해야 조금이라도 싸게 물건을 받을 수 있을지. 근데 이상하게 CGM 쪽 브랜드들에서 냄새가 나요.”

“냄새요? 무슨 냄새?”

“음….”

정주연은 어떻게 자신이 맡은 수상한 냄새를 내게 설명해줘야 할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가 홍성 스타일을 그나마 조금은 알고 있잖아요.”

“네.”

“꼭 정도만 걷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홍성은 최소한 시장 가격을 해치지는 않죠.”

“…?”

“근데 여기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성 쪽 담당자하고도 연락을 한번 해봤는데… 리테일 가격에 대한 제안을 안 걸어주더라고요.”

“그럼 뭐 마음대로 팔아라… 하는 식이란 말인가요?”

“거의 그런 거죠. 사실 저 같은 소자본 업자 입장에선 좋죠. 마진만 잘 받을 수 있으면 피곤하더라도 다른 사이트들과 비교해가며 게릴라식으로 치고 빠지며 단돈 만 원만 낮춰서 물건을 깔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제가 이쪽 업계에서 일을 안 해본 사람도 아니고 뻔히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은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데… 한성처럼 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더라고요.”

“흐음….”

“처음에야 저 같은 소자본 업자들은 딱 내가 원하는 브랜드들만 좋은 마진으로 가져갈 수 있으니 무조건 좋은 거겠지만, 점점 한성 쪽으로 중형 사이즈 업자들이 붙어버리면 소자본 업자들이 무슨 수로 가격 경쟁에서 그들을 이길 수 있겠어요?”

그냥 넘어가기엔 자칫 위험한 상황으로 발전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국내에서 만토바 브랜드들로 올리는 커미션이 문제가 아니라, 정주연이 말한 대로라면 오프라인 매장 매출에 타격이 올 수도 있는 부분이다.

보통 오프라인 가격은 컨트롤 기업이 정하는 게 아니라 약간의 융통성 정도는 발휘할 수 있지만 브랜드 본사가 주는 대로 팔아야 한다.

가령 본사가 100달러로 리테일 가격을 측정하라고 하면, 브랜드에 따라 정말로 비싸고 잘나가는 브랜드의 경우에는 환율이 최고치를 찍었을 최근 3개월간의 환율을 적용해 국내 가격을 만든다. 반대로 가격 경쟁이 필요한 브랜드의 경우는 환율이 가장 낮을 때 환율을 적용해 국내 가격을 만드는 식이다.

그 정도는 브랜드 본사에서도 알면서도 애교로 넘어가 주는 부분이고.

그런데 개인업자들이 온라인상에서 가격을 무너뜨리면 브랜드 본사가 주는 가격대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오프라인 매장들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부분에 대해 난 안 팀장에게 자세하게 알아보고 보고서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안 팀장은 요즘 모리엘츠 건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태다.

그럼에도 그 프로젝트를 잠시 스톱을 시키게 만들고 해당 건을 깊게 파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정주연이 말한 내용이 팩트라는 걸 안 팀장이 올린 보고서를 통해 알게 됐다.

“한성이 두지 말아야 할 악수를 두고 있네요.”

“그러게요. 이게 어디 한성 스타일이겠습니까? 딱 봐도 CGM 스타일인데…”

“어떻게 합니까?”

“이건 제가 한성 쪽과 직접 접촉을 한번 해볼게요. 안 팀장님은 모리엘츠 쪽으로 다시 붙으세요.”

“넵!”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 게 태산처럼 쌓여 있는 상태에서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된 거다.

난 몇 가지 준비를 한 다음 한성 쪽으로 전화를 걸었다.

싸우기 위함이 아니라, 한성의 의도를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한때엔 CGM의 공격을 함께 받았었고, 또 홍성이 만토바를 끌고 들어올 당시 많은 부분 협조를 했던 기업이다.

뭔가 대처를 하기에 앞서 자초지종 정도는 물어보는 게 매너일 거 같았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홍성 인터내셔널의 공은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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