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
적당히 좀 하라고
“좀 늦었다. 택시가 안 잡히가…”
“안 그래도 그럴 거 같더라. 어서 들어온나.”
다음 날 새벽, 강혜선과 함께 다시 본가를 찾았다.
아직 거실 창 밖으론 어둠이 짙었다.
그럼에도 차례 준비로 집 안엔 모두 불이 켜져 분주했고,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의 얼굴에는 특별한 근심 없이 미소만 걸려 있었다.
이런 걸 바랐다.
내가 바란 삶, 가족…
난 거창한 걸 바랐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멋진 외제 스포츠카를 바라지도 않았고, 가사 도우미가 있는 궁궐 같은 집에 어울릴 만한 가족을 바라지도 않았었다.
딱 지금 이런 공기, 온기, 환함만 되찾을 수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거 같다고 항상 생각해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꾸 나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봤다.
누군가가 자꾸 나에게 목표가 뭐냐고 물어봤다.
그런 걸 왜 자꾸 물어보면서 꼭 그런 게 없으면 인생을 헛살고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지,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들의 의도를 모르겠다.
과연 그런 꿈, 목표가 뚜렷하게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다들 되는 대로 상황에, 그리고 현실에 맞춰서 살고 있는 거 아닌가?
난 명확한 꿈이 없었고 또 그렇다 할 목표가 없는 상태로 지금까지 대학을 나와 열심히 최선을 다해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나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그냥 딱 이런 배우자, 가족애, 형제애,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결국 가장 중요한 거겠지만) 적당히 아쉽지 않을 정도의 통장 잔고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고, 그걸 꿈이고 목표라고 생각해 오며 살아 왔던 거 같다.
지금 그걸 이룬 거 같은데… 그렇다고 여기에서 더 많은 걸 꿈꿔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유지만 잘하면, 그것만 잘해도 충분할 거 같다는 생각에 마음만큼은 상무보 못지않게 부자가 된 거 같았다.
“제가 할게요.”
“뭐를?”
“그러니까요. 뭘 좀 하면 될까요?”
재킷을 벗어 소매를 걷으며 강혜선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강혜선을 빤히 쳐다보며 누나가 웃었고.
“그냥 저기 아버지 옆에 앉아서 아버지가 밤 쳐 주시면 그거나 좀 쌓아라. 대추하고 같이.”
“그거 말고 딴 거 할 거 없어요?”
“주방이 솔다.”
“네?”
“주방이 좁다고. 두 명, 세 명 들어와서 움직이면 분잡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사 가고 나서.”
“….”
누나가 환하게 웃으며 강혜선에게 말했다.
“좀 더 큰 집으로 옮기고 나서부터 같이 하자. 오늘은 그냥 저기 니 시아버지 옆에 앉아서 밤 쳐 주시면 그거나 쌓고 있어라.”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대신 나중에 차례 지내고 나면 엄마 도와서 뒷정리 좀 니가 해라. 나는 차례 지내는 것만 보고 밥 먹고 바로 출근을 해야 돼서.”
“그야 당연하죠.”
“남편도 좀 시켜가면서. 어? 원래 집안일을 안 해서 그렇지 시켜놓으면 또 곧잘 한다. 요령껏 해라, 요령껏. 혼자 다 할라고 하지 말고.”
“네.”
“그람 저기 가서 앉아 있어라.”
“아영이는요?”
“아, 그라믄 혜선이 니가 가서 아영이 좀 깨울래. 아직 자고 있다.”
“그건 내가 할게. 내 전문 아이가.”
난 아직 차례상에 올리지도 않은 송편 하나를 집어 입에 넣은 후 아영이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 일나라.”
불을 켜고 아영이를 불렀다.
“아… 쫌…”
환함에 반응하며 아영이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일나라고. 좋은 말 할 때 일나라.”
“아, 좀 나가라고. 일어났다고.”
“눈을 떠라, 일어났으면.”
“아, 진짜…”
“어른들 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일하고 있는데… 제일 쪼깬한 게 빠지 가지고…”
난 녀석의 침대에 걸터앉아 볼을 한 번 꼬집었다.
“마, 좋나?”
“아, 뭐가?”
“아, 그냥 좋냐고. 묻는 말에 대답만 해라.”
“뭐라노, 아침부터…”
“삼촌은 마 좋아 죽겠는데, 니는 별로 안 좋나?”
난 부시시한 모습으로 아직 잠이 덜 깬 아영이에게 몇 차례 넥슬라이스를 날리며 계속 장난을 걸었다.
“좋제? 좋제?”
“하지 마라 했다.”
“니가 하지 말라고 하면 삼촌이 안 해야 되나?”
난 다시 한번 아영이에게 넥슬라이스를 날렸고, 결국 녀석의 반격을 유도해냈다.
“그래, 좋다, 좋다. 됐나? 좋아 죽겠다.”
“어쭈? 제법이네?”
“아아아악!”
그래서 난 녀석이 덮고 있던 이불로 녀석을 똘똘 말아놓고 말했다.
“빨리 나와서 씻어라.”
간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던 모양이다.
울기도 제법 울었던 거 같고.
그랬겠지.
나도 생각할 게 많아서 잠을 설쳤는데…
통통 부어 있는 녀석의 눈을 쳐다보며 난 미소를 지었고, 아영이는 그런 삼촌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좋은 말 할 때 빨리 나온나. 코때까리 파서 입에 넣어뿌기 전에.”
사실 이 시간에 아영이를 깨워도 마땅히 할 게 없다.
아영이가 뭘 하겠나.
탕국 간을 보겠나, 아님 과일을 씻겠나.
그냥 내가 심심할 거 같으니까 전투적으로 깨운 것뿐이다.
난 아영이가 씻고 나올 때까지 매형이랑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명절 톨게이트 상황을 알려주는 교통 상황 뉴스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도 신문지 위에서 쳐낸 밤 껍데기를 쓸어 담고 계셨고, 강혜선은 아버지가 잘못 쳐낸 밤을 씹어먹으며 함께 뉴스를 보고 있었다.
누나가 시집을 간 이후부터 언제나 아버지, 어머니, 나 이렇게 셋이서만 보냈던 명절 차례.
그런데 어느덧 집 거실이 좁게 느껴질 만큼 가족이 많아졌고, 이 좁은 거실이 이상하게 더 이상 강혜선에게 부끄럽지가 않았다.
온기가 느껴졌으니까.
그러고 보면 내가 강혜선을 부산에 데리고 올 때마다 보여주기 싫었던 건 처가에 비해 좁은 집이 아니라 집안에 흐르는 차가운 냉기였던 거 같다.
“딴 거 보자.”
제대로 다 말리지 않아서 아직 물기가 축축한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건성건성 닦아내며 아영이가 나와 매형 사이 소파에 끼어 앉았다.
그러더니 겁도 없이 내가 들고 있던 리모컨을 빼앗았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채널을 돌리더니 “볼 거 없네.” 하며 다시 리모컨을 내게 건네주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기 역시도 그만큼 어제, 오늘 기분이 너무 좋다는 표현이겠지.
평소였음 잘 하지도 않는 그런 어리광을 한번 부려놓고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아영이를 난 기분 좋게 쳐다봤다.
결혼을 해서 명절 때엔 처가에도 가야 하다 보니까 어제 하루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가족들과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
차례를 지내고 누나와 강혜선이 차례 음식으로 아침상을 차리는 동안 난 부모님과 아영이에게 명절 돈을 전달했다.
그리고 매형도 흰 봉투에 담긴 명절 돈을 부모님께 하나씩 전달했다.
매형이 부모님 용돈을 드리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액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매형이 다시 내가 동경했던 예전의 매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절대 아니다.
그냥 난 지금의 매형이면 충분했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우짜노. 진짜 일만 아니면 점심까지 먹여서 보내고 싶은데…”
“아니에요.”
“언제 또 내려오노?”
누나는 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급하게 출근을 준비하면서도 강혜선에게 언제 다시 부산에 내려오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강혜선은 그런 누나에게 본가가 옮길 집 계약할 때 맞춰서 주말에 다시 내려오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명절 증후군은 지금부터가 본격적이었다.
결혼을 하기 전부터 우리 부모님은 내가 남자고 강혜선이 여자기 때문에 무조건 우리 집부터 와서 차례를 지내고 처가에 가야 한다… 하는 생각은 안 하셨던 분들이다.
특히나 현재 아들 내외가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결혼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 처가가 서울에 있기 때문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며 가령 추석을 부산에 내려와서 차례를 지내면 설날에는 처가부터 갔다가 귀성 행렬이 다 끝이 나거나 아님 한 주 뒤쯤에 여유롭게 부산에 내려와도 된다는 입장이셨다.
어머니 스타일이 그렇다.
형식보다는 편의가 더 중요한 분이시니까.
거기다 제사, 차례에 대해 그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분들도 아니시고.
거기다 누나 내외와 함께 살고 계시다 보니 오히려 딸만 둘이 있는 처가 쪽 신경을 많이 써주고 계신다.
그리고 나나 강혜선 역시도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KTX 표를 끊느라 전쟁 아닌 전쟁을 해야 하고 또 그 많은 귀성 행렬에 끼어 이동을 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라 그 부분에 대해선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그런데 정말 뜬금없는 곳에서 문제가 터져버린다.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일일 주차를 시켜놓았던 서울역 공영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차 트렁크를 열어 미리 준비해놓았던 명절 선물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일종의 강박증이다.
분명 거기에 선물이 들어있음을 알면서도 그냥 이유 없이 확인을 해야만 마음이 놓이는 강박증.
그렇게 장인어른께 드릴 홍삼 원액과 장모님께 드릴 석류 영양제가 잘 있다는 걸 확인하고 곧바로 처가로 향했다.
이미 처형 내외가 먼저 와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난 그 부분이 조금 죄송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던 사람 영업을 또 그 자리에서 펼치게 되는 거고.
장인과 장모, 그리고 처형, 손위 동서에게는 넉살 좋은 성격, 그리고 조카에게까지 용돈이라는 달콤한 미끼로 점수를 딸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다음 설 때는 아마 부산에 안 내려가도 될 거 같아요.”
식사 중에 내가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먼저 그 말을 꺼내려고 꺼냈던 건 아니었고, 손위 동서 되는 사람이 명절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왔다 갔다 많이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대답을 하다가 그 말이 나오게 된 거다.
“그럼 차례는?”
“누나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아마 조만간에 차례까지 그냥 다 절에 갖다 올리실 거 같더라고요.”
“아… 하긴 요즘 많이들 그렇게 하지.”
당연히 크게 내색은 안 하셨지만, 장인과 장모님은 좋아하셨다.
그리고 난 속으로 내가 이렇게 공평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그 내용은 그냥 지나가는가 싶었다.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때부터 뭐라고 콕 찝어 말을 하기는 애매한데 이상하게 손위 동서가 날 궁지로 몰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근데 두 사람 이제 슬슬 2세 준비해야 하지 않아?”
그 질문까지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넘겼다.
그래서 장인, 장모님이 앞에 계시지만 살짝 농담을 섞어서 재치 있게 대답을 했고.
“신경을 쓰고 있기는 한데 이게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네요.”
“일부러 계획을 하고 있는 건 아니고?”
그때까지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거지.
속으로 살짝 이건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설마 손위 동서가 뭐 때문에 감정을 실어서 날 궁지로 몰겠나 하는 생각에 어디에, 그냥 사람 자체가 필요 이상으로 오지랖이 넓은가 보다… 하는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다.
“아우, 계획은요. 저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이제 나이가 있는데 생기기만 하면 바로 준비를 해야죠. 직장도 거기에 맞춰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고.”
“흐음…”
근데 거기서 그만했으면 딱 좋았는데, 이 양반이 선을 넘어버린다.
그때부터 모두가 불편해지는 거고.
“아닌 난 또 뭐 소식이 들릴 만도 한데 하도 소식이 없어서… 요즘 일부러 애를 늦게 가지기를 원하는 부부들이 늘고 있는 추세잖아. 혹시라도 그런 건가 싶어서 물어봤어.”
자기 와이프 얼굴까지 굳어질 정도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던지 재빨리 다른 주제로 갈아타려고 애를 썼는데, 그게 어디 자기 마음대로 쉽게 되나.
“애 태어나면 자네가 대신 키워줄 거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실례되는 걸 집요하게 물어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어?”
결국 장모님이 직접적인 핀잔을 주셨고,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얼어버렸다.
피곤했다.
이건 부산에서 곧바로 올라온 것과는 별개로 그냥 정신이 피곤했다.
“내가 말실수를 했나 보네. 미안해, 공 서방. 미안해, 처제. 아닌 난 그냥… 다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런 날 다 같이 가족들끼리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그냥 밥 먹어요.”
그리고 처형이 자신의 남편을 말리며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나갔다.
그런데 여기서 난 손위 동서도 손위 동서지만 장모님이나 처형이 손위 동서를 대하는 태도에도 조금은 문제가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을 혼자 속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대우를 받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예전에 바람을 피우다가 걸린)가 있겠지만, 너무 티가 나도록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거 같았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내가 다 무안해질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그 순간만큼은 불쾌했던 게 사실이고.
그렇게 다시 식사 분위기는 마땅한 주제를 잡아서 원래대로 돌아갔다.
“공 서방.”
“네, 형님.”
“우리 나가서 담배 한 대 피울까?”
식사를 끝마치고 거실 소파로 자리를 옮길 때였다.
손위 동서가 장인, 장모님 몰래 나가서 같이 담배나 한 대 피우고 들어오자고 제안했고, 난 어른들 눈치는 보였지만 그렇다고 손위 동서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뭐해서 그러자고 했다.
“저희 나가서 담배 한 대씩만 금방 피우고 들어오겠습니다.”
그렇게 손위 동서와 아파트 분리수거장 근처에서 담배를 한 대씩 나눠 피우고 있을 때였다.
“공 서방.”
“네, 형님.”
“그… 좀 적당히 좀 하지?”
“…네?”
순간 사이코패스인 줄 알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자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날 꼬드겼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가워진 얼굴로 내게 그런 말을 하는데, 순간 그 사람이 무서워서 소름이 올라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이중성에 소름이 올라왔다.
“적당히 좀 하라고.”
“뭐, 뭘 말씀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