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남편 키우는 맛 나네
퇴근 후 은행 앞에서 강혜선을 태워 곧장 집으로 향했다.
“저녁 뭐 먹을까?”
“그냥 집에 있는 거로 대충 먹자.”
“집에 아무것도 없어.”
“그럼 뭐 그냥 라면 끓여 먹자.”
“···왜?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강혜선의 눈길이 느껴졌다.
오늘 하루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그런데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일일이 다 설명하는 건 너무 피곤했고.
딱히 내가 뭔가를 실수했고, 또 그 실수로 인해 질책을 받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민망하고 또 생각이 많아지는 오후였다.
그 기분이 퇴근길까지 이어지고 있었고.
“일은 무슨. 그냥 좀 피곤하네.”
“···.”
“나 오늘 당신 집까지 데려다주고 바로 목욕탕 좀 갈게. 땀 좀 빼야겠어. 아후··· 좀 피곤하네.”
“그래, 뭐··· 그렇게 해.”
가급적이면 강혜선 앞에서 피곤한 기색을 숨기려고 한다.
그녀 역시 일을 하는 사람이고, 또 집안일만 놓고 보면 나보다 더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따라 그 피곤한 기색을 숨기는 게 힘들었다.
몸이 피곤한 건 아닌데,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머리가 무거워지는 저녁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 초등학교 운동회를 하고 난 직후의 기분이랄까?
강혜선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차를 몰아 근처 사우나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집에 갔다가 가.”
“그냥 뜨거운 물에 몸만 좀 담그고 바로 올 거야.”
“입었던 속옷 그대로 다시 입겠다고? 목욕통 챙겨줄 테니까 귀찮아도 잠시 올라갔다 가.”
이런 순간, 이런 챙김을 받을 때마다 난 내가 혼자가 아니라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결국 난 못 이긴 척 집까지 올라갔고, 내가 챙기면 1분이면 끝났을 목욕 도구를 10분 넘게 분주하게 챙기고 있는 강혜선의 모습에 그래도 난 이제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있는 존재라는 감사함을 느꼈다.
“자, 이거. 화장품 샘플은 안에 들고 들어가지 말고 여기 속옷이랑 양말이랑 같이 옷장에 넣어놓고.”
“뭔 양말까지 챙겼어?”
“아, 옷 갈아입어. 뭐 해? 그러고 갈 거야?”
“···.”
그런 강혜선을 가만히 꼬옥 안아봤다.
“···뭐 하는 거야?”
“그냥 이렇게 딱 1분만 가만히 있자.”
“···.”
“아이고··· 좋네.”
그렇게 한참을 내 품 속에서 가만히 있어 주던 강혜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많이 힘들어?”
“으으음··· 하나도 안 힘들어.”
“···?”
“그냥 좀 헷갈려.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야. 당신은 이럴 때 없어?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회사, 그리고 내가 꿈꿔오던 삶의 가치가 한순간 날 배신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뭔지 몰라서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주겠음.”
“크크큭··· 아놔, 당신 덕에 웃는다.”
“1분 지났어.”
“금방 갔다 올게.”
“천천히 해. 본전은 뽑고 와야 할 거 아냐.”
“씻고 기다려. 저녁은 나가서 사 먹자. 당신도 피곤할 텐데, 괜히 뭐 만든다고 힘 빼지 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갔다 와.”
하루 종일 건조해진 피부가 뜨거운 탕 속에서 찌지직 갈라지는 느낌을 만들어내며 이내 그 온도에 피부가 적응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난 뜨거운 물은 두 손에 모아 얼굴을 적셨고, 다시 한번 물을 받아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아아아···.”
이렇게라도 피로를 풀고 또 생각을 정리해야지, 안 그럼 오늘 하루 한꺼번에 날 덮친 너무 많은 생각들 때문에 녹다운이 될 것만 같았다.
‘모욕? 네가 모욕이 뭔지나 알아? 그게 뭔지나 알고 모욕을 받은 것 같단 그딴 소릴 해? 진짜 모욕이 뭔지 말해줄까? 가르쳐줘?’
야차와 같은 표정으로 상무보를 야단치던 전무님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어차피 직장이라는 판 자체가··· 꼰대를 이해해야만 살아남는 판이야. 넌 꼰대가 되지 마라. 요즘 널 보면 가끔씩··· 현실엔 없는 직장 생활을 꿈꾸고 있단 기분이 들어.’
띄엄띄엄 장 부장이 내게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장 부장의 말처럼 연속적인 급한 승진 몇 번에 난 이미 중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경험과 내공은 아직 팀장급인데, 성과는 부장급에 맞춰야 한다는 압박감이 날 흔들고 있는 모양이다.
정말 다행인 건 날 흔들고 있는 정체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는 거였다.
물론 그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아아아···.”
난 온탕 깊숙이 들어가 고개만 물 밖으로 빼내서 천장을 향해 그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물속으로 잠수를 했다.
숨을 참아 본다.
10초, 20초, 30초···.
어렸을 땐 최소 1분 가까이는 숨을 참았던 거 같은데, 이제 40초만 넘어가니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푸후···.”
다시 물 밖으로 올라와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터뜨려봤다.
그래··· 최소한 회사가 이 물속처럼 타협 없는 공간은 아니니까.
숨은 쉴 수 있는 공간이니까···.
강혜선의 손은 꼼꼼했다.
속옷과 양말은 비닐 팩에 따로 담아놓고, 또 번거롭게 뭔가를 들고 다니는 걸 귀찮아하는 남편을 위해 화장품도 꼭 필요한 샘플 몇 개만 따로 챙겨 놓았다.
그리고 목욕에 필요한 제품들 역시 다른 비닐 팩에 따로 담아놓았고.
이상하게 목욕탕만 오면 양치질을 오래 한다.
집에선 3분도 못 채우는 양치질을 목욕탕만 오면 두 번 이상 하게 되는 거 같다.
그렇게 그동안 내 몸에 끼어 있던 찌든 때, 담배 냄새, 그리고 스트레스 모두를 한꺼번에 씻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벌써 왔어?”
“내가 뭐 한 번 목욕탕 가면 두 시간, 세 시간씩 눌러앉아 있는 당신이야?”
“진짜 돈 아깝다. 그럴 거면 그냥 다음부턴 집에서 욕조에 물 받아놓고 해.”
“누가 목욕탕에 목욕하러 가나? 그냥 쉬러 가는 거지. 근데 이건 뭔 냄새야?”
김치찌개 냄새였다.
이상하게도 목욕을 하고 나와서 그런지 아까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이 없었는데, 살짝 배가 고픈 것도 같고···
“맛은 기대하지 마. 집에 진짜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참치 넣고 끓였어. 파도 없고··· 주말에 장 한번 봐야겠어. 사실 오늘 당신 데리고 마트 가서 장이나 좀 볼까 했는데, 너무 피곤해 보여서 장 보러 가잔 말을 할 엄두가 안 나더라.””
“나가서 사 먹자니까.”
“외식도 습관이야. 그냥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면 몰라도 어떻게 매일같이 나가서 사 먹어? 왜? 내가 하는 음식 먹기 싫어?”
“당신 피곤할까 봐 그러는 거지.”
띵동···.
“공동 현관문에서 호출이 왔습니다. 공동 현관문에서 호출이 왔습니다.”
난 목욕 가방을 손에 든 채 이 시간에 누가 벨을 누르나 싶어 고개를 돌렸다.
“아, 족발 시켰어.”
“족발?”
“얼른 문부터 열어줘.”
뜻밖의 술상이 차려진다.
처가에서 얻어온 밑반찬 몇 개와 급조된 김치찌개, 그리고 족발만으로도 이미 한창 푸짐해 보였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소주 한잔 생각나는 얼굴이더라.”
“···.”
“목욕탕에서 땀까지 뺐겠다··· 소주 한잔 마시고 푹 자. 나도 간만에 당신이랑 단둘이 소주 한잔하고 싶었어.”
내가 하고 있던 생각, 가지고 있던 스트레스의 해답은 의외로 단순한 곳에 있었다.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장난스럽게 돌려 따는 강혜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모든 상황이 다 편하고 또 만만하게만 느껴졌다.
“받으시오, 받으시오···.”
“따르시오, 따르시오···.”
“올··· 이걸 알아? 역시 뭘 좀 아는데?”
“이걸 아는 당신은 최소 옛날 사람!”
“히히히···.”
“크크큭···.”
강혜선과 소주 한 병을 천천히 식사와 함께 나눠 마셨다.
그렇게 “한 병 더 딸까?” 하며 강혜선이 묻길래 난 그냥 고개를 저으며 밥그릇을 들고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술보다는 그냥··· 내 이야기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 같다.”
난 김치찌개 국물이 번져 있는 밥그릇 속으로 밥을 조금 더 퍼서 자리에 앉았다.
“하고 나니까 조금 나아.”
“차 바꿀래?”
뜬금없이 강혜선이 물었다.
“차? 갑자기 차는 왜?”
“그냥··· 요즘 들어 당신이 조금··· 안쓰러워 보여.”
“내가? 왜?”
“너무 모든 걸 다 혼자서만 안고 가려고 하는 거 같단 기분이 드네. 좀 나눠 들어도 될 거 같은데···.”
순간 난 누구랑 같이 나눠 들어야 하는지 묻고 싶었다.
“부모님 사시는 집부터 시작해서··· 그냥 이것저것 다. 그렇게 혼자 부담을 가지고 애쓰는 당신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까 이상하게 당신은 당신한테 해주는 보상엔 너무 인색하단 생각이 들어.”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그런 억지스러운 핑계 대지 말고 말이야. 그냥 그게 뭐가 됐든 당신을 위한 보상을 한 번 정도는 해줘. 안 그럼 나중에 당신··· 당신 스스로한테 상당히 미안해질걸?”
“···!”
“다른 사람들은 몰라. 당신이 무슨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인정? 그런 인정은 이미 받고 있잖아. 그런 거 말고 정말 당신한테 남을 수 있을 만한 뭔가를 하나 정도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당신 스스로에게 해줬음 좋겠네.”
“차는 무슨··· 굴러만 가면 되는 거지.”
“꼭 차가 아니더라도. 맨날 출장 갔다 올 때마다 내 물건 하나씩 사다 주고··· 물론 그렇게 당신이 보람을 느낀다는 건 잘 알겠지만, 그래서 난 당신이 너무 가족들만 챙기기보단 당신도 같이 좀 챙겼음 좋겠어.”
난 그저 씨익하고 웃었을 뿐이다.
차? 바꾸고야 싶지.
근데··· 지금 이 상황에서 차까지 바꾸면 너무 빠듯해진다.
돈, 돈 거리며 살고 싶지는 않다.
의미 없는 겉치레를 하느라 현재 컨디션을 더 빡빡하게 만들어가며 살고 싶지도 않고.
짧은 순간 혹했고, 그래서 재빨리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봤지만··· 역시 아직 차는 아닌 거 같다.
“나는··· 당신이 차려주는 이런 저녁이면 충분하네.”
“그럴 줄 알았다.”
“자신 있었거든.”
“···뭐가?”
“분명 처음 사장님한테 불려가서 내년에 부장 승진이 될 거란 소릴 들었을 땐 자신이 있었어.”
“···.”
“근데 오늘 회사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과연 내가 지금 가진 이만큼의 시야로 부장을 달아도 될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해. 짬 안 되고 시야 좁은 나 때문에 우리 영업부 직원들 전체가 피해를 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회사가 필요해서 달아주는 거잖아. 당신이 달아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리고 또 오늘 이렇게 한잔하고 내일 출근하면 언제 이런 고민을 했나 싶게 거기에 맞춰서 일을 할 거고. 그냥··· 그냥 당신 앞이니까 이렇게 이야기해 보는 거야. 회사 사람들 앞에서 이런 모습 보일 수는 없는 거 아냐.”
“너무 큰 산을 봐버렸구나.”
“큰 산?”
“아까 당신이 말한 전무님 말이야.”
“아··· 그런 모양이야. 그리고 맨날 봐오던 벽이 오늘따라 더 높게 느껴지는 기분?”
“장 부장님?”
“응.”
“당신 그거 알아?”
“뭐?”
“어쨌든 내가 당신보다는 사회생활을 1년 정도 먼저, 더 많이 했잖아.”
“응.”
“근데 이게 회사 성격이 서로 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난 지금까지 당신처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진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당신을 보면서 내가 하고 있는 직장 생활을 반성하기도 하고 또 동기부여도 받고 그래.”
“···그래?”
“응, 진짜. 당신이 잘하고 있다는 말은 내가 못 하지. 내가 당신 회사, 그쪽 업계를 전혀 모르니까. 하지만 남들보다 빠른 승진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잘하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는 거 아냐?”
“더 잘하고 싶은 모양이야.”
“참 남편 키우는 맛 나네.”
“뭐가?”
“이건 진짜 그냥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야.”
“···?”
“한 단계 더 성숙된 가치가 당신한테 형성되고 있는 거 같아. 아직 나는 그게 뭔지 모르는··· 멋있어. 꼭 진짜 어른을 보고 있는 기분이야.”
다음 날 아침.
알람이 울리기 5분 전에 저절로 눈을 떴다.
평소였으면 아직 남아 있는 그 5분이 그렇게 고맙고 또 남은 5분간 선잠을 자야 한다는 사실에 살짝 짜증이 났겠지만, 이상하게 개운했다.
그래서 알람을 미리 끄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강혜선은 이미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전날 저녁 목욕탕까지 다녀왔음에도 난 샤워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앞으로 섰다.
그리고 씻었다.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앞으로는 할 수만 있다면 매일매일을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출근을 준비하고 싶었다.
평소엔 잘 뿌리지도 않는 향수까지 뿌리는 날 보며 강혜선은 가만히 미소만 지었다.
평소보다 더 철저하게 출근을 준비했고, 또 평소보다 더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출근길에 나섰다.
“차장님, 출근하셨습니까.”
“네, 좋은 아침입니다. 양 팀장님.”
“네.”
“10분 뒤에 팀장 미팅 한 번 합시다.”
“네, 준비하겠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 팀장님.”
“넵!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자리까지 도착해서 책상 위로 짐을 풀며 해외 영업부를 둘러봤다.
“최 대리.”
“네, 차장님.”
“10분 뒤에 팀장 미팅 있을 겁니다.”
“···네.”
“최 대리도 참석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