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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52화 (152/325)

# 152

그걸로 끝이야, 땡이라고

미쳤다.

정말 미쳤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어디 몇 마디나 했나.

그저 어제 그 자리는 자신과 사장님을 대신해서 상무보가 나간 게 아니었냐고 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 속엔 정말 너무 많은 내용, 특히 양측 간의 관계부터 지난 역사까지 모든 게 다 들어있었고, 또 그 압축된 한마디로 상대의 전의를 모두 상실시켜버린 전무님의 카리스마 앞에 난 속으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혼자 뭔가에 흥분해서 속으로 박수를 계속 치다 보니 갑자기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영업은 과연 뭐였을까?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마진 협상, 상대와의 딜은 과연 뭐였을까?

맨날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상대방 혼을 쏙 빼놓기 위해 줄줄줄 말을 내뱉어왔던 내가 아니었나.

한마디라도 더 많이 하는 놈이 이기는 건 줄 알고···.

가끔씩 상대를 혼란시키기 위해 전문 용어들을 끼워가며, 그렇게 하면 내가 조금은 유식해 보이고 또 경험이 많아 보일 거란 생각에 상대가 흔들리는 포인트를 찾아 그때부터 더 어려운 표현들을 남발하며 상대를 압박했었다.

그런데 전무님은?

단 몇 마디, 단 한 번의 살벌한 표정으로 상대의 전의를 모두 빼앗아버렸다.

“그건 뭐 그렇다 치고···.”

그리고 상대의 실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도 않으셨다.

그게 끝이었다.

어제 당신들이 한 실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난 이미 보고를 받았다는 뉘앙스.

그걸 상대에게 강력한 어투와 표정으로 한 번 전달만 한 이후부터 나처럼 집요하게 그 포인트를 물고 늘어지며 뭔가를 요구하는 게 아니라 깔끔하게 그 부분에 대해선 더 이상 언급을 안 하셨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상대가 가지고 가야 하는 긴장감은 절대 거기서 끝이 아니겠지.

오히려 속으로 더 많은 고민과 계산을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상대라면 그럴 것 같았다.

“첫째 아드님 이번에 대학 들어가지 않았어요?”

갑자기 급선회.

그냥 같이 자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함께 자리한 사람의 심장까지 쫄깃해질 정도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내뿜으시다가 갑자기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한 표정을 지으시며 상대의 가정사를 물어보기 시작하신 전무님.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상황 자체를 동영상으로 찍어놓고 싶었다.

동영상으로 찍어놓고 어느 포인트에서 상대를 압박하고 또 풀어주는지··· 저러다 다시 또 압박을 하실 텐데, 그 포인트는 과연 언제쯤일지를 모두 찍어놓고 계속 반복적으로 재생하며 분석을 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대학은 작년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군대에 보내놨어요.”

“아이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네요.”

“걱정은요 무슨.”

“그럼 어디 보자··· 우리가 언제 보고 오늘이 처음이란 말이죠?”

“아마도 첫째 대학 이야기하시는 거로 봐선 2년 정도 된 거 같습니다.”

“자주 좀 봅시다.”

“그래야죠.”

“말만 하지 말고 진짜 좀 자주 봅시다. 서로 늙어가는 처지에 우리끼리라도 가깝게 지내면서 뭐··· 일을 떠나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거지. 안 그래요?”

“그럼요.”

그리고 의도된 침묵.

일부러 회의 의자 깊숙하게 등을 기대고 앉으시며 미소만 짓고 계셨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라는 뜻이 다분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 속에서 상대는 어떤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제··· 저희 쪽에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앞으로 좀 더 잘해 보자고 마련된 자리 아니었습니까.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고, 또 실망도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거기서 끝이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이렇게 또 어제 일로 사과를 하시겠다고 직접 찾아오셨는데, 그럼 된 거죠, 뭐.”

“···네.”

“다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모두가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하다 보면 욕심도 생길 수 있는 거고, 또 손해도 날 수 있는 거죠.”

“음··· 전 상무님 얼굴을 보고 직접 어제 일을 사과드려야 할 거 같은데···.”

“뭘 또 그렇게까지··· 제가 단단히 혼을 내놨습니다.”

자연스럽게 아까 그 책걸상을 눈짓하며 전무님이 말씀을 하셨다.

“똑같이 해줘야 직성이 풀릴 거 같다고 하더군요.”

“···.”

“사장님 아들 아닙니까. 똑같습니다. 기분파고 또 그래서 아닌 건 절대 아닌 사람이죠.”

“홍성 사장님 스타일이야 워낙 유명해서··· 하하하···.”

“어쩜 그렇게 제발 안 닮았음 했던 부분만 그렇게 골라서 쏙 빼닮았는지··· 저기, 저 책상에 직원들 앉혀놓고 기록을 시키겠다고 하더라고요.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습니다. 하하하.”

“···하하···. 하하하···”

“그··· 내가 이 앞을 지나가다가 안 봤음 분명히 그렇게 했을 거야.”

“하아···.”

“우리가 어떻게 지금까지 계속 같이 가고 있습니까?”

“···네.”

“저희 힘들 때 도와주시고, 저희가 따온 브랜드들 매장에 깔 수 있도록 자리 내 주시고··· 그게 다 사실 귀사의 배려 덕분 아니었습니까?”

“···네.”

한참을 정신이 팔린 채 듣기만 하다가 전무님이 하고 계신 상대의 배려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그 배려는 당신이 한 게 아니라 당신이 그 회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혹은 입사는 했지만 완전 신입일 시절부터 있었던 사람들, 즉 지금의 당신 포지션에 있던 사람들이 홍성에게 해준 배려들이라는 뜻이었다.

비록 당시 홍성은 구멍가게에 불과했지만, 전무님과 사장님은 대형 유통 판들을 상대로 직접 물건을 깔아가며 오늘날의 홍성을 만들어 놓은 거고, 당신은 그때 이제 막 이 업계에 들어온 애송이라는 뜻.

그런 애송이가 어디 감히 홍성 사장의 아들에게 그런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있었느냐는 뉘앙스가 진하게 깔려 있었다.

물론 내 기분대로 해석한 거겠지만, 머뭇거리며 입맛만 다시는 상대의 반응만 봐도 상대 역시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 전 상무님은 어디 가신 겁니까?”

“아뇨, 아니에요. 회사에 있을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뵙고···.”

“에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할 거 같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전무님이 박 이사를 쳐다봤고, 난 재빨리 폰을 꺼내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혹시 상무···.”

하마터면 상대가 있는 앞에서 상무가 아닌 상무보라고 부를 뻔했다.

“상무님이랑 같이 계십니까?”

-응. 같이 있어.

“지금 상무님 좀 아까 회의실로 내려오시라고 전해주실 수 있습니까?”

-왔어?

“네, 지금 전무님이랑 이야기 중이십니다.”

-그래, 알았다. 나는? 나도 같이 내려오래?

“그런 말씀은 없으셨는데, 그냥 같이 내려오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 알았어. 바로 모시고 내려갈게.

그리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장 본부장님도 같이 계시다고 해서 같이 내려오라고 전달했습니다.”

“응, 잘했어.”

이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신경이 쓰이는 자리였다.

그리고 난 상무보가 내려오기 전까지 전무님과 상대측 상무가 가진 아우라를 분석해 봤다.

비록 상대가 굴지의 글로벌 대기업이라도, 그 대기업의 임원일지라도 전무님이 가진 압도적인 카리스마 앞에선 그다지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든든했다.

그리고 내가 홍성맨이라는 게 의미 없이 자랑스러웠고.

어디다 내놓아도 저 정도 무게는 감당을 하실 분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 순간 나의 홍성 생활 워너비는 전무님으로 확정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닮고 싶다는 생각···.

이렇게 설레게 다가왔던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던 거 같다.

잠시 뒤 상무보와 함께 장 부장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난 재빨리 박 이사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전무님의 옆자리를 상무보에게 넘기고, 장 부장은 상무보의 옆자리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무보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직접 홍성 본사까지 찾아온 상대에 대한 예의는 다했고, 어색한 분위기를 전무님이 적당하게 조율하기 시작하셨다.

“어제 그 자리는 저희가 홍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긴 실수였다는 점에 대해 인정하고 이렇게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참 상무보가 속이 없는 게, 바로 조금 전까지 차가운 시선을 유지하고 있다가 그 사과 한마디에 표정이 바뀌어 버린다.

이건 실망이라고 하기보다는 도대체 이건 뭐지? 하는 정도의 이해 불가 상황으로 날 이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귀사와의 좀 더 나은 관계를 위해 저희 쪽에서 급하게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직접 찾아왔습니다. 음··· 준비한 거 꺼내 봐.”

그쪽 실무자가 서류 가방에서 딱 봐도 급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하지만 공식 서류임이 틀림없는 서류 한 장을 꺼냈다.

“홍성 특별전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

“전 지점을 상대로 진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뭘 또 그렇게까지··· 특별전은 없어지지 않았어요? 몇 년 전부터 특별전 같은 건 안 했잖아.”

전무님의 질문에 상대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상황 자체가 특별하니까요. 사실 저희 입장에서 한성은 홍성 못지않게 오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그런데 한성이 CGM을 잡고 들어온다는 게 어쩔 수 없이 저희 입장에선 불편할 수밖에 없고요. 그럼에도 아시겠지만 한성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고요.”

“다 같이 먹고 살아야죠. 한성에 딸린 식구가 몇 명이고, 또 그 식구들이 건사하는 입이 몇 개나 되겠어.”

“전무님께서 그렇게까지 이해를 해주시니 조금은 더 편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래서 한성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는 대신, 홍성이 섭섭해하지 않도록 전 지점에 한해 현재 홍성이 컨트롤하고 있는 해외 명품 브랜드 포함 H.I 편집샵과 Kidshub에

한해 추석맞이 브랜드 특별전을 진행하고, H.I 편집샵과 Kidshub에 한해서는 내년 상반기까지 상품권 이벤트에 계속 포함을 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귀사의 편집샵 매출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그 부분 역시 추후에 따로 협조를 요청할 계획이긴 한데, 편집샵 브랜드들만 따로 묶어서 같이 이벤트를 크게 한번 열어볼까 구상 중에 있습니다.”

“괜찮은 방법이네.”

내가 요구하려고 했던 내용들보다 더 큰 성과들이 벌써 상대의 입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상대측과의 미팅이 모두 끝이 났을 때였다.

“그럼 조만간에 개인적으로 연락 한번 드리겠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그냥 이 자리에서 날짜를 잡읍시다. 이번 주 목요일 어떠십니까?”

“비워두겠습니다.”

“그럼 제가 따로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상무.”

“네, 전무님.”

“가신다는데, 로비 입구까지 같이 나가드려.”

“···네.”

그렇게 상무보와 장 부장, 내가 본사 로비까지 상대를 배웅해줬고, 다시 올라간 전무님 사무실에서 아까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박 이사가 전무님께 크게 꾸중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럴 거면 뭐 하겠다고 그 자리까지 따라갔노.”

“···죄송합니다.”

“진짜 성질 같았으면···. 하아··· 거기서 뭐 해, 왔으면 와서 안 앉고.”

아까와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노기를 띠고 계신 전무님이었다.

오늘 하루 정말 단 한 순간도 롤러코스터가 아니었을 때가 없다.

“다들 잘 들어.”

“···.”

“상대가 그 어떤 무례를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바로 지적을 못 했음 그걸로 끝이야. 땡이라고.”

“···.”

“그걸 그때 바로 눈치 못 채고 다음 자리까지 구질구질하게 끌고 가서 꼬투리를 잡는다? 에라이 이 사람들아··· 그것만큼 없어 보이는 게 어딨나!”

“···.”

“어제 그 자리에서 바로 지적하고 싸웠어야 할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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