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50화 (150/325)

# 150

혼자서도 잘 놀아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고무줄이 한쪽의 욕심으로 좀 더 위태롭게 늘어지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 그 고무줄이 어디까지 늘어질 수 있는지 아직 직접 경험을 해보지 못한 쪽에서 어쩔 수 없이 상대 쪽으로 한 발 다가갈 수 밖에 없다.

고무줄의 길이와 탄성을 결정하는 것 역시 상대의 재량이니까.

그리고 그 고무줄의 길이와 탄성을 결정할 힘이 있는 상대는 다소 여유롭게 그 고무줄을 잡고 있으면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볼 수 있는 거고.

이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갑과 을의 관계이고, 또 그 갑이 생각하는 협상의 원칙이다.

“누가 오라고 했어? 네가 온 거잖아. 싫으면 그냥 거기 가만히 있어. 난 가야돼. 우리가 어떻게 계속 네 사정 봐주겠다고 한곳에 머물러만 있어? 그리고 난 줄 많아. 이거 하나 끊어져도 나한텐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다른 줄 쓰면 돼. 그 줄 잡겠다는 사람은 많

고. 따라오기 싫으면 그냥 거기 가만히 있어.”

이게 갑의 입장이다.

하지만 을은 그런 게 아니지.

을은 그 고무줄이 더 늘어지다, 늘어지다 더 늘어지지 못하고 끊어져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디까지 늘어진다는 건 모르지만, 그 줄이 끊어졌을 때 어떤 아픔이 찾아온다는 것 정도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줄이 끊어지든, 아님 그냥 함께 그 고무줄을 당기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그 줄을 놓아버리든 말이다.

비록 그게 상상이 만들어낸 두려움일지라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닐 수 밖에 없다.

을이니까.

비록 그 고무줄이 회사가 준 고무줄이라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그 줄이 끊어져버리면 내 밥 줄도 함께 끊어질 수 있다는 걸.

그런 두려움들이 갑에겐 더 갑질을 하게 만들고 을에겐 끌려다니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일지도.

타탁타탁타탁타탁...뚝!

내가 상대 본사 상무에게 마진 부분에서 양해를 좀 구하겠다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옆 방에서 들려오던 타이핑 소리가 거짓말처럼 뚝하고 끊어져버렸다.

마치 양쪽에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고무줄이 뚝! 하고 끊어져버리듯...

자신들이 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상대.

자기들은 몰랐겠지.

그 줄을 우리가 먼저 먼저 놓을 수도 있다는 걸.

우리가 끊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줄을 당길 줄만 알았지, 상대가 그 줄을 놓아서 자기가 맞을 수도 있다는 걸 대부분의 갑들은 잘 모른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항시 마음의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을에 비해 더 당황을 하는 것일지도.

을이 그 줄을 먼저 놓거나 끊을 땐 그만큼 참다, 참다 도저히 참기 힘들 때, 더는 쳐다도 보기 싫을 정도로 그 상황이 질리고 염증이 생겼을 때에만 놓아버린다는 걸 갑들은 잘 알지 못한다.

“아니 그 마진 부분은...저희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던 게 아니라 홍성에서 먼저 그렇게 제안했던 거 아닙니까?”

“귀사 편집샵의 브랜드 구성을 만토바 물건들로만 채우겠다고 했던 것도 저희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던 게 아니라 귀사가 그렇게 하면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을 하셨던 거죠. 그래서 마진을 그렇게 맞춰드렸던 거고.”

“...!”

“귀사가 먼저 이렇게 앞서 했던 약속들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고 있는데, 저희라고 어떻게 가만히만 있겠습니까?”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룸 안으로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상대방의 당황과 우리쪽의 인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정적이었다.

마치 상대측 본사 상무의 얼굴 표정은 “야, 너 나 아니면 같이 놀아줄 사람 없잖아!” 하는 식이었고, 그런 상대를 향해 난 “난 꼭 누구랑 같이 안 놀아도 돼. 혼자서도 잘 놀아.” 하는 마음을 담아 짧게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말을 번복하면 옆 방에서 이 대화 내용을 듣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당신 입장이 상당히 우스워질 수도 있다는 뜻을 담아서 말이다.

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

때론 백 명의 아군보다 한 명의 적군이 더 무서울 때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진심도 없는 상대를 굳이 아군으로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겠냐는 게 상무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곧 전무님의 생각이고 또 사장님, 앞으로 변화할 홍성의 생각이라는 걸 이미 난 전해들었고.

그런 회사차원의 생각과 그 생각을 상대에게 보여주란 지시가 없었다면 내가 무슨 수로 이러고 있겠나.

감정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억지로 숨기고 있었다 뿐이지, 숨이 막힐 정도로 떨리고 또 과연 내가 이정도까지 심하게 질러도 되나 하는 두려움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다행히도 내가 하고 있는 게 큰 선을 넘지 않고 적당히 잘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일부러 얼굴에 정중한 미소를 담아 상대측 본사 상무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지만, 장 부장이나 박 이사, 상무보의 응원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혹시라도 내가 선을 넘었다면 중간에서 박 이사가 뭐라고 한 마디라도 끼어들었겠지.

하지만 박 이사는 침묵하고 있었다.

스윽...

그리고 상대 전무는 룸 안에 흐르고 있는 공기를 대충 파악하다가 노련하게 손을 뻗어 원탁 테이블 회전판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 놓여져 있던 술주전자가 상대 전무 앞으로 돌아갔고, 그 주전자를 들며 그가 말했다.

“거 왜 이런 자리에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서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드나?”

그렇게 수습에 들어가는 상대 전무였다.

“공 부장님이 정확한 거지. 백 번 맞는 말이고. 우리가 먼저 양해를 구했음 상대 양해도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니겠어? 왜 본전도 못찾을 이야기를 꺼내서 기분 좋게 마시던 술 맛을 떨어지게 만드나?”

그런데 참 이상하지?

어째서 내 눈에 보이는 걸까.

상대 전무의 노련함이 눈에 보였다.

꼭 그런 느낌이었다.

아기들이 뛰어노는 키즈카페에서 서너 살 정도 되는 아이가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기를 별 생각없이 툭하고 쳤다.

자기보다 몸집이 작고 약해 보이는 상대를 이유없이 툭하고 건드려보는 건 그 아이의 습관이었던 모양이다.

모든 게 다 장난이고 호기심일 때 아니겠나.

그만할 땐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던 아기가 타고난 기질이 순하지만은 않아서 키즈카페 전체가 떠나가라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렇게까지 서럽게 울 일도 아닌데,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 다 고자질을 하듯 크게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러자 자기보다 몸집이 작고 약해 보이는 상대를 툭 하고 건드렸던 아이가 당황을 하기 시작한다.

보통의 다른 아기들은 그냥 징징거리다 마는데, 이런 반응은 자기도 처음이었던 거다.

서둘러 양쪽 아기의 부모가 찾아온다.

그리고 상대를 건드렸던 아이의 엄마가 상대 부모 보기가 민망해서 자기 아기의 볼귀짝을 약하게 때리며 혼을 내는...지금 상대 전무가 하고 있는 모습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식사 자리에서 이게 무슨 실례야. 어? 앞으로 좀 더 잘해보자는 의미로 바쁘신 분들 초대해놓고, 이건 경우가 아니지. 그리고 한성 관련된 이야기는 내가 부탁을 하겠다고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자네가 거기서 왜 끼어드나?”

“...죄송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의 노련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침묵.

이제 쯤 끼어들만도 한데, 박 이사는 자신의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그래, 당신 애가 잘못했어. 집에서 애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시켰길래 밖에 나와서 이렇게 별나게 행동을 해? 교육 좀 제대로 시켜...하듯이 박 이사는 차갑게 식어버린 표정으로 자기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박 이사가 만들어낸 연출로 분위기는 더 겉잡을 수 없이 얼어갔고, 어떻게든 상황을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했던 상대는 의식적으로 술주전자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회전판을 돌렸다.

“방금 나왔던 내용들은 이 자리에서 바로 어떻게 하자...하는 식으로 결정을 할 사안은 아닌 거 같고...어차피 말이 나왔으니까 나중에 실무자들끼리 알아서 조율을 하도록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회사 돌아가서 해당 실무자한테 그렇게 전달해놓도록 하겠습니

다.”

차가워진 박 이사의 말을 들으며 상대 본사 상무는 단단히 얼어있는 얼굴로 날 한 번 쳐다본 다음 술주전자를 들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 그 술주전자가 내 앞으로 왔을 때 난 손을 뻗어 술주전자 대신 회전판을 잡고 옆으로 돌렸다.

그 후로 더이상은 옆 방에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분위기는 수습이 되었지만, 식사자리가 끝날 때까지 더이상 한성에 관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고.

그렇게 식사를 끝내고 다시 회사로 복귀하는 차 안이었다.

분명 승기를 우리 쪽에서 잡은 건 사실인데, 모두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승기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최대한의 성과로 직결시키기 위해 다들 각자의 포지션에서 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계산하기에 바빴다.

“...”

“흐음...”

난 운전을 하면서도 수시로 백미러를 통해 뒷자리에 앉은 상무보와 박 이사의 표정을 살폈다.

서로 반대편 차창으로 시선을 던져놓고 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강을 건너기 위해 배에 올랐고, 그 배는 출발을 해버린 상황.

“장 부장.”

“네, 이사님.”

박 이사가 침묵을 깨뜨렸다.

“안 팀장이 만토바 제품 컨트롤 하고 있지?”

“네.”

“흐음...안 팀장 그 놈이 기발한 맛은 있어도 집요한 맛은 좀 떨어지지 않나?”

“공 차장이 직접 핸들링 해야 됩니다, 지금 이 사안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안 팀장이 집요한 맛은 상대적으로 양 팀장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프로젝트를 물어오는 재주는 탁월한데, 항상 보면 그걸 론칭시키는 과정에서 뒷심이 부족하다.

상대를 궁지로 모는 걸 잘 못한다.

오히려 이번 건은 안 팀장보다는 양 팀장에게 더 적합한 일일지도.

하지만 양 팀장에게 안 팀장의 기획 2팀의 일을 도와주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게, 안 팀장의 자존심 문제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양 팀장의 기획 1팀은 현재 이지혜까지 프랑스 법인으로 넘어가면서 맨파워가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H.I 편집샵과 Kidshub를 동시에 컨트롤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초능력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고.

“네,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이번 사안 만큼은.”

“어떻게 해야되는지 말 안해도 잘 알지? 마진 1퍼센트, 2퍼센트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만토바 제품은 중간에서 커미션 장사만 하고 있는 건데, 오늘 건져온 카드를 마진 협상에 써버릴 순 없죠.”

“그래, 그러면 만토바 좋은 일만 시켜주는 거라고.”

“네, 내실 없는 곳에 힘을 뺄 이유는 없다고 저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의미 있는 걸 뽑아내. 이번엔 진짜 제대로 물었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상무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전 오늘 처음으로 공 차장이 무서웠어요.”

“...?”

백 미러 속에서 상무보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 편이니 든든한 거지, 만약 상대였음 어땠을까 생각하니까 살짝 무섭더라.”

그래서 내가 말했다.

“아직 상무보님께서 장 부장님이 어떻게 상대를 몰아세우는지 한 번도 못 보셨군요. 하하하...”

“거기서 내 이야기가 왜 나와, 인마.”

“제가 어디 뭐 없는 말 하는 겁니까? 다 부장님한테 배운 건데.”

그렇게 복귀한 회사.

난 사무실로 복귀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상대측에 보낼 협조문을 만들었다.

에이포 용지 한 장도 안 될 그 협조문을 만드는데 썼다 지우기를 몇 차례 반복하다보니 오후 근무 시간을 모두 다 거기에만 써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완성된 협조문 파일을 안 팀장에게 사내 메신저로 보내놓고 기획 2팀 사무실을 찾았다.

“이거 뭡니까?”

이제 막 내가 보낸 메신저를 확인한 안 팀장.

“천천히 한 번 읽어봐요. 읽어보고 내일 출근과 동시에 상대 본사 브랜드 컨트롤 팀으로 메일 보내세요.”

“전쟁입니까?”

“으으음...전쟁은 무슨.”

“그런데 왜 저희 쪽에선 아무 의미도 없는 이런 마진 협조문을 보내시는 겁니까? 만토바 물건 마진 5퍼센트 해봤자, 저희 쪽으로 잡히는 커미션은 0.25퍼센트 정도 밖에 안되잖아요. 그거 더 받아내겠다고 이렇게 유통판을 도발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고 잠시 뒤...

“혹시...”

“내일 메일 보내면 안 팀장한테 전화가 올 거예요, 그 쪽에서.”

“...”

“그럼 그쪽 총책이 저한테 전화를 걸 수 있도록 상황을 유도해봐요. 거기까지만 해주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겁니다, 안 팀장님 입장에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