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홍성 최고의 사이코패스 장 부장이다!
상상 그 이상의 위계질서, 그리고 치밀함.
보는 것 만으로도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알맹이가 빠진 그들의 치밀함은 쉽게 바닥이 드러났다.
오전 11시 40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점심 약속 시간은 12시였지만, 우린 우리가 초대받는 입장이라는 사실보다 그저 습관처럼 10분, 20분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10시에 상무보 사무실에서 나와 장 부장, 그리고 박 이사가 상무보의 호출에 모였고, 간단하게 미팅을 가졌다.
그다지 내용 없는 미팅.
그저 오늘 식사 자리에 참석할 상대의 정보를 나누는 정도였다.
그 정보는 박 이사가 줄줄 꿰고 있었고, 상대의 스타일을 알기 때문에 그다지 불편한 자리는 아닐 거라는 게 그의 예상이었다.
우린 그냥 편한 마음으로 약속 장소로 향했다.
상무보 차 한 대로 다같이 움직였고, 당연히 운전대는 내가 잡았다.
“혹시 홍성 인터네셔널에서 오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평일 점심시간.
호텔 중식당은 한가했다.
저 멀리 창가쪽 테이블에서 마주보고 앉아 식사를 즐기는 중년 커플이 일단 보이기엔 중식당 개별 손님 중 유일해보였다.
레스토랑 입구에 해당 업장 리셉션 직원이 들어오는 손님들을 안내하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었고, 그 옆으로 서있는 삼십대 초반? 많으면 내 또래로 보이는 여성 역시 난 처음엔 해당 업장 매니저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스토랑 매니저 치고는 인상이 너무 딱딱했다.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자연스러운 맛이 없었다고 할까?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나의 시선을 그녀가 입고있는 복장으로 이어지게 만들었고, 검은 정장 차림이긴 하나, 그 복장 역시 레스토랑 매니저가 착용하기엔 다소 딱딱한 바지 정장이었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까지.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백화점 사업부 소속 인물이 확실했다.
말투나 자세, 그리고 다소 경직된 얼굴 표정까지...호텔리어의 그것이 절대 아니었으니까.
“과장님, 홍성에서 오셨습니다.”
그녀를 따라 레스토랑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가자 미닫이 문이 붙어있는 독립된 공간 두 개가 나란히 보였다.
그리고 그 문 앞으로 내 또래, 혹은 나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 몇 명이 무슨 마치 정상급 귀빈을 수행하듯 긴장한 상태로 대기를 하고 있었다.
그 무리 속으로 우리보다 몇 걸음 빠르게 다가간 여자가 우리를 눈짓하며 말했고, 그 말에 대기중이던 남자들이 일제히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과연 저렇게까지 해야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대의 환대는 극진했고, 그래서 난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남자 하나가 서둘러 미닫이 문을 열고 룸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그 안에서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인물들을 모두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고, 박 이사님. 이게 도대체 얼마만입니까.”
“그러니까요. 그때 러시아 가기 전에 잠깐 얼굴 보고 오늘 처음이니까 거의 4,5년 만이지 싶은데...”
“그대로십니다.”
“그대로는 무슨. 김 전무님이야 말로 진짜 하나도 안 변했네. 그대로예요.”
예전에 인터넷 기사에서 한 번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대형 기사여서 기억을 하고 있던 게 아니라 그냥 업계 관련된 내용이라 기억을 하고 있는 거였다.
거기다 명동점은 우리 홍성 입장에선 강남점보다 더 신경 써 챙겨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그리고 오늘 점심 약속이 확정되는 순간 다시 한 번 인터넷으로 해당 기사를 찾아봤었다.
젊은 나이에(여기서 젊다는 건 당시 그의 나이가 한 지점의 점장을 달기엔 다소 빠른 40대 중반이었음을 말한다.) 상무 타이틀을 달고 국내 주요 지점의 점장직을 몇차례 지내다가 백화점 본사 여성복 사업부 총괄 관리 이사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러다 지난 몇 년간은 중국 톈진과 러시아 모스크바 점에서 점장을 지내다 이번에 전무를 달고 해당 기업 백화점 사업부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명동점의 점장으로 부임해 온, 업계의 탑 클라스였다.
그는 박 이사의 소개로 상무보와 인사를 주고받았고, 박 이사는 다시 나와 장 부장을 차례대로 전사 운영본부장과 영업부장이라고 소개했다.
물론 상대에게 상무보를 소개할 땐 상무라고 소개를 했었고.
그리고 상대 역시 백화점 본사 사업부 상무와 여성복 사업부 총괄 관리 이사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들어가시죠.”
나란히 붙어있는 미닫이 문.
한쪽은 우리 일행이 들어갈 공간,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룸 역시 그들이 예약을 해놓은 게 틀림없었다.
그 미닫이 문 앞으로 상대측에서 온 직원들 몇몇이 바짝 긴장을 한 채 어슬렁거리고 있었으니까.
자기들 딴에는 제법 무게를 갖추고 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눈엔 사실상 자기들도 이 자리에 왜 따라 나왔는지 몰라 그냥 자리만 지키고 있는 듯 한 인물이 몇 보였다.
룸 안으로 들어가는 순서에서 난 가장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상무보와 박 이사, 장 부장이 차례대로 룸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 살짝 고개를 돌려 옆 방의 모습을 훔쳐봤다.
넓은 원탁 테이블 위로 미처 숨기지 못한 노트북 두 대가 세팅되어 있었다.
물론 기본 식사 테이블 세팅도 다 되어 있는 상태였고.
룸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으면서도 난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 과연 옆 방에선 뭘 하는 걸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천장에 붙어있는 이동식 파티션으로 두 룸을 나누어 놓았는데, 필요에 따라서는 그 파티션을 치워 대형 룸으로 사용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파티션 하나가 살짝 치워진다.
자연스럽게 이 방의 대화 내용도 옆 방에서 다 들리게끔 말이다.
상대는 치밀했다.
우리 홍성 일행을 그 파티션 쪽을 등지고 앉도록 미리 자리 배치까지 다 해놓고 우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그 모든 걸 나만 눈치챈 건 아니겠지.
오히려 박 이사는 상대의 이런 치밀함이 익숙한 듯 슬쩍슬쩍 옆 방의 상황을 의식하고 있던 내게 짧게 고개를 흔드는 모습으로 신경을 쓰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왔다.
하지만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나.
얼마나 재밌는 상황인가.
난 이 방에서 앞으로 진행될 대화 내용을 저 방에서 쥐죽은 듯 조용히 기록한다는 사실이 꽤 신선했다.
비록 홍성이 우리끼리는 대기업이라고 자부하지만 대형 유통판이나 대형 브랜드 업체들과 비교하면 사실상 구멍가게 수준이다.
홍성 이름을 아는 사람들 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테니까.
좁은 국내 패션 업계 안에서만, 그것도 컨트롤 관련 업계에서 우리가 왕이네...하며 떵떵거리지, 이런 글로벌 기업에 비하면 부족한 게 많다.
그런 걸 다 알지만...그럼에도 상대의 준비는 지나치리만큼 철저했고, 또 과연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지금은 홍성과 완전이 연이 끊어졌지만, 한 때 우리가 프라다를 국내에서 잠시 컨트롤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난 사원, 대리 타이틀이었고 브랜드 연수차 프라다 본사를 몇 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세계적인 네임드 브랜드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기업 문화가 우리와 완전히 다르다는 걸 이미 충분히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런 자리가 처음인 내 입장에선 상황 자체가 무척 신선하고 또 재밌었다.
지방에서 마이너스 매출을 올리는 지점이라도 해당 지점의 점장은 그곳에서 왕 노릇을 한다는 백화점 아닌가.
하물며 백화점 사업부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명동점의 전무 타이틀 점장과 본사 백화점 사업부 상무가 함께 자리했으니...이런 건 사실 돈주고도 하기 힘든 경험일 거다.
타닥타닥타닥...
식사가 진행되고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업계 관련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옆 방에서 노트북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는데, 내가 계속 그쪽으로 신경을 쓰고있다보니 내 귀엔 유별나게 크게 들리는 거 같았다.
식사가 중간 쯤 진행될 때까지도 난 음식을 입에 넣을 때 말고는 가급적 입을 다물고 이 방에서 진행되는 대화 내용과 옆 방에서 소심하게 흘러나오는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에만 귀를 열어놓고 있었다.
“아마 그때가...어디보자, 제가 이제 막 상무보 타이틀로 평택점 점장을 하고 있을 때였죠?”
“그랬을 거예요. 평택점이 맞아.”
상대의 말에 박 이사는 자신이 정확히 기억을 한다는 투로 말했다.
“하아...진짜 그때 홍성 사장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노발대발 하시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살이 떨린다, 살이 떨려.”
“그때 처음 만났잖아요, 우리.”
“그랬죠.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찾아와서는 브랜드를 다 빼네마네, 본사에 직접 컴플레인을 넣네마네...그러면서 저한테 이거 어떻게 할 거냐고 하는데 진짜 순간 숨이 막히
더라고요.”
“하하하...그때 우린 전무님이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사장님이 더 뚜껑이 열리신 거지.”
“에이, 설마요. 제가 알았음 찾아오시기 전에 먼저 연락을 해서 사과를 했죠.”
“나중에 알았지, 우리도. 진짜 위로는 하나도 보고가 안 올라가고 밑에 직원들끼리 어떻게든 무마를 해보겠다고 끙끙대다가 일이 더 커져버렸다는 걸.”
“하이고...진짜 옛날 이야기 하다보면 이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른다니까. 근데 무슨 말 하다가 지금 이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맞다, 맞다...아무튼 작년에 모스크바에서 홍성이랑 다시 한 번 제대로 붙었다는 이야기 듣고 해당 점장 똥줄 꽤나 타겠네 하고 혼자
웃었어요. 작년에 강남점에 홍성 브랜드 다 빼겠다고 어름장 놓았다던 부장이 여기 공 부장님이신가?”
“으으음...여기 장 본부장.”
“아...”
“앞으로 잘 좀 부탁합니다. 난 할 수만 있음 가급적 홍성이랑 좋게 지내고 싶은 사람이에요. 하도 데인 게 많아서. 하하하...제가 이번에 명동점으로 오면서 직원들 교육을 다시 한 번 제대로 해놨어요. 절대 홍성은 건드리지마라. 건드려서 득 볼 거 하나 없다...
하고 말이죠.”
어떻게 하면 저렇게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저런 속에도 없는 말을 그것도 마치 진심인 듯 할 수 있을까.
그게 뭐가 됐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이런 자리에서 나란 사람이 저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신경쓰지않고, 두려움 없는 상태에서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모양이다.
아무리 상대가 대기업이고, 또 이 자리에서 나보다 발언권이 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난 이 자리가 이상하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옆 방에서 들려오는 소심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로, 그 소리가 어떤 보고서를 만들어낼지 혼자 상상해볼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한성 대표가 저한테 직접 부탁을 하더라고요. 사업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상무님. 하다보면 좋을 때만 있을 수는 없는 거거든. 그 관계가 좋을 때도 있음 안 좋아질 때도 있고, 또 안 좋다가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을 잡아야 할 때도 있잖아
요.”
“이해합니다.”
상무보가 말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걸 양보할 수만은 없다는 식의 단호한 표정을 얼굴에 걸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 귀사와 한성은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던 걸로 아는데요.”
“그렇죠. 그러니 CGM 이놈들이 얼마나 여웁니까? 작년에 그 일 한 번 있고나서 사실 가장 큰 피해를 본 게 한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홍성이 곧바로 만토바를 끌고 들어오면서 그동안 한성이 컨트롤하던 굵직한 브랜드들도 다 홍성한테 넘어갔
고.”
맞는 말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다.
“당시 저는 국내에 없어서 이야기로만 그때의 상황을 전해들은 게 전부인데, CGM 들어온다고 했을 때 홍성과 한성이 같이 국내 컨트롤 기업들을 대표해서 저희 뿐 아니라 신세계까지 함께 압박을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 통했죠.”
옆에서 나와 함께 줄곧 입을 다물고만 있었던 장 부장이 드디어 조심스럽게 상대의 말을 받아쳤다.
“그리고 정확하게 표현을 하자면 압박이 아니라 부탁이었습니다. 그것도 정중한 부탁. 그런데 그 부탁을...하하하...안 들어주시더라고요.”
상대 백화점 본사 소속 상무의 눈썹 끝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순간이었다.
마치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 모양은 고작 컨트롤 기업 본부장 따위가 어디 감히 어른들 이야기 하시는데 끼어들어? 하는 식이었다.
불쾌함을 직접적으로 노출하지는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 꿈틀거리는 그의 눈썹을 난 정확하게 포착했다.
그래서 난 속으로 ‘누구긴 누구야. 비록 지금은 살짝 갱년기가 와서 감수성이 풍부해져 있지만, 자타 공인 홍성 최고의 사이코패스 장 부장이다!’ 하고 말하며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제가 한 말씀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요, 해. 편하게 해요.”
난 상대 전무의 닳고 닳은 리엑션 앞에 고개를 짧게 숙인 뒤 말했다.
“홍성이 만토바를 국내에 상륙시켜서 한성이 대표 브랜드 몇 개를 놓치게 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한성과 이미 사전에 이야기가 다 끝난 부분이었죠. 홍성과 한성 모두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만토바를 들고 들어오지 않으면 CGM이 펼칠 마
진 경쟁, 우리끼린 치킨게임이라고 표현했습니다만, 아무튼 국내 컨트롤 기업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 한성 입장에서도 대표 브랜드 몇 개를 놓치더라도 국내 컨트롤 시장부터 지켜내는 게 더 급했으니까요. 그래서 드리는 말입니다. 만토바가 들어와서 한성이 대
표 브랜드 몇 개를 놓친 게 먼저가 아니라, 홍성이 만토바를 섭외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집중적으로 먼저 이야기 하는 게 맞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공은태 부장님이라고 하셨나요?”
상대 전무의 말에 박 이사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에 만토바를 끌고 들어온 장본인.”
“...!”
“만토바 관련해서 우린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있는 장 본부장, 공 부장 두 사람이 그 때 그 일을 다 했던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