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이러니 여자들이 뻑이가지
어쩌다보니 결국 또 안 팀장에게 잡혔다.
양 팀장은 은근히 술자리를 기대하는 눈치였고, 나 역시 더이상 끌지말고 오늘 술자리에서 두 사람에게 앞으로 영업부에 있을 조직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두 사람도 어느정도 알고는 있을 거다.
양 팀장은 모르겠지만, 천하의 안 팀장이 그정도 눈치도 못 채고 있었을까.
다만 다른 사안에 비해 아직은 대외비로 가져가는 부분이라 확정된 내용까지 모르겠지만, 분명 어느정도 눈치는 채고 있을거다.
퇴근을 하고 회사 근처 꼼장어 집에서 저녁 식사 겸 술을 한 잔 마셨다.
내가 안 팀장에게 미안해해야할 자리는 아니었고, 아무래도 팀장 진급을 두 사람이 같이 했기 때문에 다만 신경이 조금 쓰인다는 정도?
“그래서 아마 내년 상반기 인사 때 그렇게 정리가 될 거 같아요.”
“우와...대박. 그럼 서른 여섯에 부장입니까?”
속이 없는 건지, 아님 아쉬움을 저렇게라도 숨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 팀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양 팀장의 차장 진급이 아닌 나의 부장 진급에 더 열을 올렸다.
“아마 앞으로 더 많은 기회들이 생길 겁니다.”
의미없는 위로였다.
하지만 그런 말이라도 해야 자리가 어색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자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가 않았다.
어차피 능력, 성과 여부와는 상관없이 회사 사정에 의해 모두 빠른 진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안 팀장 역시 따지고 보면 아직 팀장 1 년 차이지 않나.
비교를 해서 그렇지, 안 팀장 본인만 놓고 보면 이미 그의 다른 동기들에 비해 승진이 빠른 편이다.
하지만 초고속 승진중에 있는 내 입에서 그런 부분을 콕 찍어주기가 사실상 민망했고, 그래서 의미없는 위로지만 그런 말이라도 던질 수 밖에 없었던 거다.
“우와...이거 진짜 잘하면 마흔 전에 임원 진급까지 하시는 거 아닙니까?”
“에이, 거기까지는 진짜 오버고요. 그건 말이 안되는 거지.”
“그 말이 안되는 걸 지금 하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아무튼 듣기만 해도 너무 기분이 좋네요. 거봐요. 이런 날 술 마셔야지, 언제 마시겠어요?”
현저하게 말이 많아지고 있는 안 팀장에 비해 양 팀장은 말 수가 줄어들었다.
양 팀장은 그저 안 팀장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속으로만 조용히 승진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분위기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렇게 무거워지는 거임?”
양 팀장은 싱긋이 웃기만 했고, 나 역시 누가 누구에게 미안해하고 또 누군가가 위로를 받아야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술잔을 들었다.
그냥 마시자고, 좋을 일일 뿐이라고 말이다.
“혹시 지금 두 분...제 기분 생각하고 계시는 거?”
“...”
“에이, 그러지마요. 왜 그래?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아니, 그냥 두 병 갖다주세요!”
술잔을 비워놓고, 조금씩 껍질이 타기 시작하는 꼼장어 하나를 집어 먹은 후 안 팀장이 말했다.
“제가 중국 생활 포기하고 한국 돌아와서 가장 좋은 게 뭔지 아세요? 더이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게 너무 편하고 또 좋아요.”
새로 온 소주 한 병을 돌려딴 후, 나와 양 팀장의 술잔을 차례대로 채워놓고 다시 말을 잇는 안 팀장.
“자신의 목표가 명확한 사람일 수록, 그 목표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 감당해야 할 심적 압박, 부담감이 클 수 밖에 없더라고요. 법인 생활 하는 동안 저한텐 그게 너무 컸어요. 그리고 또 그 목표가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엔 더하
더라고요.”
그리고 양 팀장이 술병을 건네받아 안 팀장의 술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이미 그걸 한 번 경험해봐서...전 더이상 목표를 크게 세우지 않습니다. 이미 지금도 충분하다고요.”
“...”
“이렇게 차장님이나 양 팀장님이 저 대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주고 계셔서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요. 이래서 본사라고 하는구나...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법인에선 조금만 잘해도 금방 티가 나던데, 여기선 그걸로는 안되는구나...하는 걸 기분좋게 받
아들이며 일하고 있는 중이에요. 승진이야 빨리 하고 싶지. 안 그러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그런데...이젠 그냥 다른 사람에 비해 뒤쳐지지만 않으면 된다...하는 마인드로 출근하고 있는 중이에요. 남들 보다 빠른 거 보단 남들보다 늦지 않게 하는 게 더 좋은 거 같
더라고.”
그리고는 마치 빈집에 몰래 숨어든 도둑처럼, 어둠속을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흉내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착실하게 묻어가면서 소리소문없이 승진을 하는 거. 캬하...그것만큼 완벽한 월급쟁이 코스가 어디에 있겠어요. 안 그래?”
정말 진심으로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게 정석이다! 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런 코스를 한참전에 벗어나버린 내가 하기엔 앞뒤가 안맞는 말일 것 같아, 그 동의 마저도 이 자리에선 그를 향한 위로의 가식적인 말이 될 거 같아 섣부르게 못하고 억지로
삼켰다.
“자, 분위기를 보아하니까 안그래도 되는데, 어쩔 수 없이 두 분이 저한테 약간 미안해하시는 거 같은데...좋아요.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하자고요. 저 같이 기복이 심한 사람은 그런 목표를 만들면 만들 수록 오히려 더 부작용이 심하게 일어나는 거 같더라고요.
이미 중국 법인에서 한 번 경험해봤잖아요. 뭔가 욕심을 내고 그래서 하고 있는 일들이 제가 원하는대로 잘 안되니까...일단 몸이 먼저 반응을 하더라고요. 진짜 몸이 아팠습니다, 중국 법인에서의 마지막 세 달 정도는. 그러다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어서 회사를
그만 둘 작정을 하고 법인의 비리를 고발했었죠.”
“...”
“전 이미 홍성을 그만둘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에요. 그런 저한테 다시 홍성에 재미를 붙이게 만들어준 사람들이 바로 여기 계신 두 분이에요. 혹여나 이번 승진 건으로 저한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워, 워...넣어둬, 그냥 넣어둬.”
“그렇지. 이게 우리 안 팀장님 진짜 매력이지.”
“그 매력을 내가 다 감당을 못한다니까요? 아놔, 너무 넘쳐나. 이걸 어떻게 해야 돼? 이러니 여자들이 뻑이 가지.”
“미친...”
“크크큭...”
그제야 양 팀장도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진 듯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편하게...편하게? 아냐, 아냐. 편하게는 아니고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가 더 맞는 표현같네요. 자연스럽게 크게 욕심 안 부리고 남들과 비슷하게 올라갈게요.“
“자연스럽게라...”
안 팀장의 말을 되새기며...내가 말했다.
“좋네요, 자연스럽게라는 표현. 항상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한 표현인데, 오늘따라 그 표현이 왜 이렇게 와닿지?”
“한 번씩 그럴 때 있죠. 진짜 어려운 표현이 아닌데 그걸 잘 찾지 못할 때. 그리고 막상 그 표현을 찾아내면 그게 지금의 기분을 모두 다 설명해줄 수 있는...”
“그러네요. 자연스럽게...”
“그런 의미로 오늘 여기 술 값은 자연스럽게 제가 내겠습니다.”
나와 양 팀장은 거의 동시에 놀란 눈으로 손을 흔들며 말렸다.
아직 뜯지 않은 술도 한 병이나 더 있는 상황.
그런 상황에서 술값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젠 민망한 나이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안 팀장이 오늘 술값은 자기가 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를 축하할 일으면 이상하게 제가 내고 싶어요.”
“그래도 오늘은...”
“그런데 오늘은 특히 더 제가 내고 싶어요.”
“...?”
“나는 누군가가 큰 실적을 내거나 젝팟을 터뜨렸을 때 옆에 슬그머니 다가와서 한 턱 쏴! 라고 하는 사람들이 제일 밉상이더라. 아닌 말로 그 큰 실적 내고 젝팟을 터뜨리는데 자기들이 해준 게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잖아? 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본인들이
그만큼 열심히 하고 치열하게 해서 이뤄낸 결과 아니겠냐고. 그런데 속으로는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성과에 배 아파 하는 놈들이 꼭 자기가 뭐라도 도와준 게 있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 한 턱 쏴! 라고 말할 때 진짜 할 수만 있음 그 입을 한 대 쳐버리고 싶더라니
까요?”
“크크큭...그렇지. 꼭 보면 그런 인간들 어딜가나 한둘 씩은 있지.”
“그래서 저는 진짜 진심으로 누군가를 축하를 하고싶을 땐 그게 밥이 됐든, 커피가 됐든, 술이 됐든 가급적 제가 사요. 속으로 배가 아플 땐 그냥 말로만 축하한다 말해버리고 치우는데, 오늘처럼 진짜 내 일처럼 기쁠 땐 꼭 제가 사요.”
“...”
“오늘 제가 위로받는 날 아니죠?”
“아니에요. 위로는 무슨.”
“그런 날이면 얻어먹겠는데, 제가 축하만 해줘도 되는 날이면 제가 살게요. 대신...”
“...?”
“그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승진할 때엔 두 분이 사주세요. 그럼 되잖아.”
“그땐 내가 소고기 쏜다.”
“저도요.”
“그렇지. 이렇게 따로따로. 내가 살 땐 한꺼번에 사는 게 좋지만 또 얻어 먹을 땐 따로따로 얻어먹는 게 좋거든. 그럼 난 오늘 한 번만 사면 되지만 제가 승진할 땐 두 번 얻어먹을 수 있는 거 아냐. 크흐...역시 난 머리가 좋아. 이러니 사람들이 뻑이가지.”
어쩌면 안 팀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따뜻하고 마음이 넓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단 기분이 들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나이.
업무 능력, 회사 내의 이미지를 떠나서라도 우리 셋은 다들 비슷비슷한 사회 생활 경험과 인생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난 더 마음이 든든했다.
이 나이에 부장을 달면서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부하직원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부담이고, 그렇다고 쉽게 일을 시킬 수 있는 부하직원들을 옆에 앉히고자 사회 경험이 부족한 사람을 곁에 두는 것도 무리수.
그런데 이 둘이라면 정말 한 번 해볼만 하겠단 확신이 섰다.
부장...
앞으로 펼쳐질 모험이 더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그림을 그려본다.
영업부를 더 키워서 안 팀장까지 차장으로 올렸을 때의 영업부 전체 그림을...
그냥 단순히 홍성 역대 최고의 맨파워가 아니라, 그정도면 이미 업계 최강의 맨파워이지 않을까.
홍성이 업계 1위 기업이라는 걸 떠나서 말이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드디어 Kidshub에 들어간 쁘띠토널이 본격적으로 비정상적인 성장 그래프를 그리기 시작했다.
매장 직원들의 푸쉬도 크게 있었지만,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지원해준 마케팅비로 진행했던 육아맘들을 겨냥한 SNS 마케팅이 적중을 한 결과라고 본다.
그리고 그 중간에 유통판들이 포함시켜준 Kidshub 매장과 쁘띠토널 단독매장 상품권 이벤트가 크게 얻어걸리기도 했고.
거기에 힘을 실어 양 팀장은 쁘띠토널 브랜드 노출을 위해 프랑스 법인 더욱 압박했다.
실수로 꺼낸 표현이든, 아님 그게 그들의 진심이었든 각자도생이란 표현은 쁘띠토널을 직접 컨트롤해야 하는 우리 본사 영업부의 입장에선 무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더 많은 오더를 넣어주길 바란다면 그만큼의 마케팅비를 달라는 식으로 양 팀장은 매일같이 프랑스 법인을 압박했고, 그 압박에 프랑스 법인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오더를 넣어주고 있으니까.
그리고 또 그만큼 브랜드를 팔아주고 띄워주는 중이니까.
“우먼센스부터 해서 이번에 대형 매거진 몇 군데에 브랜드 노출을 진행해볼 생각입니다.”
“양 팀장님.”
“네, 차장님.”
“살살해요.”
“뭘요?”
“너무 힘 들어간 거 아냐?”
“하하하...그래 보이나요?”
“뭐 내 입장에선 좋은데...너무 무리하는 거 같아 보여서요.”
“약점을 인정하니까 편하네요.”
“그건 또 뭔 소리야?”
“그동안 안 팀장에 비해 제 섭외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속으로 분한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그냥 제 약점을 보완하기 보다는 잘 하는 걸 더 잘하게 만들어보자 생각하니까 편하네요.”
“...”
“브랜드 따오는 섭외 능력은 안 팀장에 비해 부족하지만, 확보된 브랜드를 띄우는 영업력은 제가 안 팀장보다 나은 거 같아요.”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알고는 있었는데, 그냥 모든 부분에서 다 안 팀장보다 조금씩이라도 뛰어나고 싶었던 거죠. 약점을 인정하니까 비로소 진짜 제 장점이 나오는 거 같아요.”
“그 장점이 차장 타이틀에선 절대적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