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워라밸이 뭐 별거야?
“워라밸? 꿈같은 소리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토요일이었다.
밀려있던 잠을 보충하기 위해 점심이 다 될 때까지 나와 강혜선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자다깨다를 반복하며 잠이 대충 깬 뒤에도 오후 1시까지 이불 속에서 뒹굴었고, 둘 다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씻지도 않고 집을 나섰다.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브런치 카페에서 간단하게 허기를 채우고, 다시 시킨 커피 한 잔씩을 앞에 놓고 우린 주말의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동안 마음 속에만 있었던, 하지만 실행을 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감이 있었던 내 바람을 강혜선에게 조심히 꺼내봤다.
“그 워라밸이라는 개념이 요즘들어 나에게 더 뚜렷해지고 확장이 되고 있는 느낌이야.”
“...?”
강혜선은 뜬금없이 진지해진 남편의 모습에 커피를 홀짝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는 회사 일과 내 개인적인 시간을 효과적으로 분리시켜서 현명하게 생활한다...정도로 워라밸이란 걸 이해를 했거든.”
“당신하고는 거리가 먼 내용 아닌가?”
“그렇지.”
“그런 개념은 현실적으로 출퇴근 시간이 칼같이 지켜지는 무슨무슨 공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공무원들...뭐 그런 사람들한테나 가능한 말이지, 당신처럼 월화수목금금금, 거기다 하루가 멀다하고 술자리를 가져야 하는 사람들한테는 해당이 안되는 환상같
은 이야기 아닌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 다 가질 수는 없지. 진짜 아닌말로 형편이 괜찮은 사람들이야 대기업과 공기업, 이 둘을 놓고 페이는 좀 적더라도 정년이 확실히 보장이 되고 또 출퇴근 시간이 칼같이 지켜지는 공기업 쪽을 많이들 선택하면서 워라밸을 노래하지, 대부
분 일반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아직은 꿈 같은 소리지.”
“그런데 갑자기 평소 꺼내지도 않던 워라밸 이야기는 왜 해?”
“그런데 그 워라밸이라는 게 꼭 하루하루의 일과를 놓고 이야기 하는 걸까...하는 의심이 들더라고. 그렇게 따지면 이 지구상에 워라밸이라는 걸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왜 없어? 많아. 하다못해 우리 은행만해도 계약직으로 이번에 계장 진급한 유 계장은 그걸 실천하고 있고.”
“대단하네...그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그 워라밸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됐어.”
“...?”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집중을 할 수 있다면...모르겠어. 내 기준에선 그냥 그게 워라밸인 거 같아.”
“무슨 소리야? 마음의 짐이라니? 당신한테 그런 게 있어?”
난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살짝 적셔놓고 강혜선을 바라봤다.
“부모님.”
“...!”
“내가 이런 말 하면 당신이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난 항상 죄송스러워.”
강혜선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고, 난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 열심히 살고 있는데, 이상하게 부산에 계신 부모님만 생각하면 자식 도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거 같고...좀 그러네.”
“아무래도 떨어져 살고 있으니까.”
“그런 것도 그런 건데...앞으로 두 분 살면 얼마나 사실까...하는 생각이 요즘들어 부쩍 들어.”
“무슨 그런 소릴해?”
“현실적으로 말이야.”
“...”
“어머니, 아버지야 아들래미 서울 보내놓고 돈 버느라 고생하는 아들 제대로 뒷바라지도 못해줬다고 항상 죄스러워 하시지만...또 자식된 입장에선 결혼해서 내 가정 꾸린다고 내일 모레 70을 바라보고 계신 두 분 자주 찾아가 뵙지도 못하는 게 죄스러워.”
“어쩔 수 없잖아.”
“그 부모님을 누나 내외한테 다 맡기는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답답한 주제다.
속 시원하게 풀 수 있는 수학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강혜선에게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미안하기도 했고.
강혜선이라고 자기 부모님 걱정을 왜 안 하겠나.
나보다 더 한다.
그래도 처가는 가까이라도 있지.
그래서 아무리 못 찾아가도 2주일에 한 번 정도는 찾아가서 다같이 밥이라도 한끼 먹을 수 있지.
하지만 부산은 정말 자주 찾아가면 한 달에 한 번, 어떨 땐 세 달에 한 번 꼴로 밖에 못내려가는 상황이니...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모시고 싶다. 그렇게라도 해드려야...내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을 거 같애.”
“해. 당신 하고싶은 거 다 해.”
강혜선은 싱긋이 웃으며 말했고, 난 그녀의 그런 시원한 모습에 이번에도 위로를 받았다.
“저번에 부산 내려갔을 때 말이야.”
“언제? 나랑 같이, 아님 일 때문에 당신 혼자 내려갔을 때?”
“동부산 아웃렛 건으로 나 혼자 내려갔을 때.”
“응.”
“나 그때 실은...서울 올라오기 전에 부동산 몇 군데 들렀다가 올라왔어.”
“당신은 왜 그런 걸 나한테 말을 안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남편이 자기 부모 챙기는 걸 고깝게 본다고 오해해.”
“아냐, 아냐. 그런 거 아냐. 그땐 그냥 시간도 좀 남고...또 마침 센텀점에 잠시 확인할 게 있어서 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빨리 끝나더라고. 그래서 시간도 죽일 겸...겸사겸사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마침 또 그 앞에 부동산 몇 군데가 있더라고. 그래서...”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 쭉 하고 있었어.”
“무슨?”
“집이 좁아. 어머님, 아버님 두 분이서만 살기에는 충분하지만, 아영이까지...좁아.”
“나 잘하면 내년에 부장 단다?”
내 말에 강혜선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마치 무슨 그런 농담을 하느냐는 식으로, 하지만 나라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의심 반, 믿음 반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될 거 같애. 이미 디테일까지 다 나왔고.”
“그럼 장 부장님은?”
“전사 운영본부라고 사장님 직할 부서가 하나 있는데, 아마 거기 본부장으로 가실 거 같아.”
“무슨 회사가 승진을 1년 단위로 시켜줘? 회사 맞아?”
“그러게. 운이 좋은 건지...계속 타이밍이 이렇게 걸려버리네. 회사를 더 키우고 싶으신가봐, 사장님이. 그런데 회사 스타일상 외부 인력을 끌어오기 보다는 자체적으로 소화를 하는 방향으로 가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적으로 있는 사람들로 승진을 시켜가
면서 신입들을 많이 뽑는 거지.”
“부럽다. 우린 꿈도 못 꾸는 일이야.”
“은행이랑 같나, 어디. 말이 대기업이지, 아직 시스템상으로는 갈 길이 멀었어, 우리 회사는. 그러다보니까 다른 회사였음 꿈도 못꿀 기회들이 계속 찾아오는 거고.”
“그래서?”
“아무래도 부장 달면...지금보다는 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하는 생각? 사실 우리 둘은 지금도 충분하잖아. 그래서...조금 더 좋은 곳으로 모시고 싶다고.”
“그러자고. 당신 하고싶은 거 다 하라니까? 뭐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까지 분위기 쫘악...깔면서 해?”
“그런데 당신이 이건 좀 아니라는 반응을 보일 수도 있어.”
“...?”
“센텀 쪽에 있는 오피스텔로 모시고 싶어.”
강혜선은 미간을 좁혔고, 그런 그녀의 반응을 예상했던 난 그동안 내가 조금씩 알아봤던 정보를 그녀와 공유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준비하고 또 함께 살 아파트 외에 마포 아파트를 추가로 매입하는 과정에서 나와 강혜선은 거의 부동산 쪽으로는 반 전문가가 다 되어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게 강혜선은 이미 은행에서 오래 근무를 하며 대출 관련 쪽으로는 전문가였기에 남들 보다 더 빠르게 부동산 움직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왜? 사는 순간 집값 떨어질 일 밖에 없는데, 왜 굳이 오피스텔이야? 현재 살고 계신 집 주변에 평수 넓은 아파트들 많잖아.”
“물론 나중의 집 값만 생각한다면 정말 미친짓이지. 근데 아까도 말했잖아.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사실까 싶다고. 지내시는 동안이라도 수준있는 커뮤니티에서 지내보실 수 있도록 만들어드리고 싶어.”
“...”
“왜 돈을 버는지, 왜 돈을 벌기만 해야하는지 요즘들어 살짝 헷갈려. 당신 부모님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부모님만 해도 봐. 평생을 백 원짜리 하나 허투루 안 쓰시며 모으기만 하셨어. 그런데 지금 그분들 손에 남은 건?”
강혜선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진짜 돈 있는 사람들이 어디 뭐 집값 오르는 거에 우리처럼 크게 신경이나 쓰겠어? 지내는 동안 얼마나 쾌적한 환경에서 만족을 하느냐에 더 초점을 두는 거지. 평생 좁은 수선집과 집만 왔다갔다 하면서 사신 분들이야. 그리고 지금은 그 좁은 집에서 사위에
외손주까지 데리고 함께 살고 계시고. 자식들한테는 최고의 것들만 해주려고 노력하셨던 분들이셔. 하지만 정작 당신들은 좋은 게 뭔지 한 번도 제대로 경험을 못해본 분들이시고.”
“...”
“그렇게 안 비싸. 서울이랑 달라.”
“알아. 비싸더라도 당신이 하고 싶다면 하는 거고. 그런데...아영이 학교는 어떻게 해?”
“지하철 있잖아. 지금도 버스 타고 학교 다니고 있는데, 그게 지하철로 바뀌는 거 밖에 더 있어?”
“...”
“월에 관리비 플러스 대출 이자까지 다해서 200정도 들어가지 싶어.”
“보고 온 집은 있어?”
“대충. 꼭 그 층이 아니더라도 매물은 많아. 저층은 평당 700, 800선에서 거래가 되던데, 사실 그쪽으로 옮기면서 뷰가 안나오는 저층으로 옮기면 의미가 없는 거고, 수영강 제대로 다 보이는 20층 위로 올라가면 평당 거의 1100에서 1200사이더라고.”
“지금 살고 계신집은?”
“팔면 3억 5천 정도 나와. 그리고 그때 내가 보고 온 집은 7억 선?”
“60평대네? 그런 대형 평수로 갈 거면 차라리 마린시티로 가지. 그때 가서 보니까 마린시티라고 해서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더만.”
“거긴 집들이 다들 너무 오래됐어. 거기다 자기 차 없음 살기가 불편해.”
“하긴, 그건 좀 그렇더라.”
“67평인데, 실제 빠지는 건 40평 조금 넘어.”
“그야 오피스텔이니까 당연한 거고. 그래도 현재 살고계신 집보다는 훨씬 넒겠네. 방은 몇 갠데?”
“세 개. 옮겨도 우리가 지낼 방은 없어. 그쪽으로 옮겨도 우린 호텔 가야 돼. 그런 부분은 걱정 안해도 돼.”
“걱정 안하거든요?”
“커뮤니티 안에 대중 목욕탕도 있고, 있을 건 다 있더라고.”
“평생을 지금 살고 계신 그 동네 밖으로는 잘 벗어나지도 않으신 분들이잖아. 안 불편하실까?”
“벗어날 이유가 없으셨던 거지, 막상 센텀으로 옮겨드리면 또 거기에 맞춰서 적응을 하실 거야. 당신도 가봤잖아. 안 멀어. 차만 안 막히면 15분이면 충분해. 그리고...”
“...?”
“아영이한테 조금은 더 괜찮은 환경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고.”
“흐음...”
“지금 살고 있는 동네도 크게 나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부산은 해운대나 센텀 이쪽 수준이 다른 동네 보다는 높잖아.”
난 날 조금만 이해해달란 투로 의자에 등을 기대며 강혜선에게 말했다.
“이유야 어찌됐든 난 누나한테도 갚아야 할 게 참 많은 사람이야. 나한텐 누나가 또 다른 엄마나 다름 없었거든.”
“당신 어렸을 때 누님이 당신한테 어떻게 해줬는지는 이미 다 들었고.”
“비록 지금은 매형 때문에 저렇게 부모님한테 얹혀 살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만약 매형 사업이 무너지지 않았어도 누나랑 매형이 부모님을 모셨을 거야. 난 서울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
“이런 거 저런 거 다 감안해보면...그 다섯 사람이 사는 집이라도 내가 깔끔하게 정리를 해주는 게 맞는 거 같다.”
“그렇게 해드리는 게 당신의 워라밸이야?”
“마음의 짐을 조금 더는 거지, 그렇게라도 해서.”
“누구...명의로 하는 거야?”
“그야 당연히 아버지 명의지. 그러다 나중에 봐서...”
“...”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아영이 명의로 바꿔줘야지.”
“...!”
“그러고 싶은 거잖아.”
난 입을 꼬옥 다물었다.
“그런데 당신 이거 하나는 꼭 알아줬음 좋겠어.”
“뭐?”
“당신은 이미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
“밖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편으로, 또 아들로, 사위로, 동생으로, 삼촌으로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공은태 씨 아무한테도 미안해 하지마. 당신 로또 걸린 거 부모님한테 비밀로 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항상 마음을 쓰고 있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이렇게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당신이 누군가에게 미안해하면, 당신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더 미안해해야 하는 거야.”
“알았어.”
“우리 엄마, 아빠도 그렇고 다들 당신이 열심히 사는 모습에 흡족해하기만 하지 당신이 열심히 해서 뭔가를 이뤄내는 중이라고 당신한테 뭔가를 바라지 않아.”
“내가 좋아서 그래.”
“...?”
“내가 이만큼 벌어서 당신이랑 쓸 거 이만큼 챙겨놓고, 또 그 외 남는 것들로 내 가족, 당신 부모님한테 이만큼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그냥 그게 좋아서 그러는 거라고. 그리고 또 이렇게 우리 부모님 사는 집 해결하고 나면...이젠 장인, 장모님한테 뭘 해드릴
까를 고민해보는 거지.”
“피...”
“그러겠다고 열심히 사는 거니까. 워라밸이 뭐 별 거야? 애초에 그런 직장을 못 구했음 그냥 이렇게 적당히 밸런스 맞춰가며 사는 거지...”
“다음 주말에 같이 부산 한 번 내려가자. 가서 당신이 보고 왔다는 집 보자. 누님 모시고.”
“크흠...장인어른, 홍삼 하나 해드려야 하지 않을까?”
“됐네요. 말이라도 감사하네요. 무리하지 마시죠, 우리 부모님은 내가 알아서 챙길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