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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41화 (141/325)

# 141

너한테 갈 게 나한테 온 거 같다

"회사차원에서 공론화 시켜주기 전까지 대외비로 가져가자."

"..."

사장실을 나오기가 무섭게 장 부장이 사장실 쪽을 눈치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승진 부분 말이야."

"아, 네..."

"어쨌든 우리 입에서 먼저 나온 말로 소문이 도는 건 여러모로 보기가 안좋아."

"이런 건 묵힐 수록 맛있으니까요. 혼자 좋아하고 있겠습니다."

"으음..."

난 무조건 좋기만 했다.

걱정할 것도 없었고, 또 차장을 달 때처럼 내 능력을 염려하며 능력 대비 타이틀이 너무 무거운 게 아닐까 하는 부담감도 그때에 비해선 덜했다.

자신이 있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지금 상황 자체가 난 재밌기만 했다.

홍성 역대 최연소 차장.

홍성 초기 시절 몇 명 안되는 인원으로 컨트롤 업체를 꾸려나갈 때는 제외하고, 난 홍성 역대 최연소 차장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차장 타이틀을 단지 아직 1년도 안됐는데, 벌써 부장 승진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1년 뒤 부장이면 차장 승진 2년 정도 만에 부장으로 다시 한 번 승진을 한다는 소린데...

이정도면 레전드 급은 못되더라도 최소 업계에서 알아주는 초고속 승진 편에는 속한다.

물론 그때 가봐야 아는 거다.

당장 내일 벌어질 일도 모르는 게 사람 일 아닌가.

사장님이 던져주는 달콤한 약속에 푹 빠져서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손에 잡지 못하고 꿈 속만 방황하다보면, 잡을 수 있는 기회도 놓칠 수가 있다.

그냥 하던대로 하기만 하다보면 사장님 말씀처럼 내년이 됐든, 아님 그 내 후년이 됐든 달만하면 달아주겠지.

난 그냥 그정도까지만 생각을 하며 자켓 안주머니 속에 든 금일봉과 또 사장님의 달콤한 약속에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장 부장은 살짝 고민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띵동.

"내려가."

영업 마케팅 사무실 층.

엘레베이터에서 먼저 내리며 장 부장이 말했다.

난 그래도 담배라도 한 대 같이 피고 각자의 사무실로 복귀하자는 말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장 부장은 그냥 영업 마케팅 사무실 층에서 내려버렸다.

엘레베이터 문이 닫히려고 할 때 난 급하게 열림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장 부장의 등에 대고 말했다.

"부장님."

"...?"

장 부장이 천천히 몸을 돌려 날 쳐다봤고, 난 엘레베이터 열림 버튼을 계속 누른 채 말했다.

"오늘 퇴근하고 한 잔 어떠십니까?"

"오늘?"

"왜...안 되십니까?"

"난 괜찮은데...넌 괜찮겠냐?"

난 그저 싱긋이 웃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퇴근후 사대문 안 울산집.

"이모님 여기 육회 작은 거 두 접시하고 이슬 한 병 먼저 갖다주세요."

오늘은 내가 사는 게 맞는 거 같았다.

서로 월급 빤히 다 아는 처지에 나이가 많다고, 또 상사라고 매일같이 계산을 하게 만드는 건 좀 아니지.

사실 내가 홍성 생활을 하면서 상사들에게 예쁨을 받으며 지금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꼭 일을 잘해서만도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복종을 해서만도 아니다.

지갑을 적절하게 잘 열었기 때문이다.

난 이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고 확신한다.

술을 한 잔 같이 마시더라도 부담이 덜 가는 상대와 마시고 싶지, 매번 자기가 계산을 해야하는 상대와 술을 마셔야 한다면 어디 술 맛이 제대로 나기나 하겠나.

우리가 얼마나 계산적인 사람들인데...

그렇다고 그 술 값 몇 푼 아끼자고 술 자리에서까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상사들에게 술 한 잔 같이 하자는 말을 할 사람도 별로 없을 거고.

보통은 회사의 시스템, 부서 내의 공공의 적을 씹으며 술을 마시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런 자리가 필요할 때엔 무조건 들어주는 부하직원이 편할 수 밖에.

그러다보니 난 여러 상사들에게 꼭 데리고 가고싶은 부하직원의 이미지가 되어있었고, 그런 날 가장 확실하게 끌어안은 게 바로 장 부장이었다.

"오늘은 선지국이 없네요?"

"참...지금 끓이고 있다. 잠깐만 기다려요."

그동안 서로 회사에서 짬밥 안 될 때 이곳을 얼마나 자주 왔던지 나와 장 부장에겐 선지국이 서비스다.

그리고 그런 서비스를 너무나 당연하게 요구해도 될 정도로 나와 사장 이모님은 가까워져있었고.

난 육회와 먼저 나온 소주를 흔들어 딴 다음 장 부장의 잔을 채웠다.

"너 진짜 괜찮냐?"

"아, 뭐가요? 도대체 아까부터 뭐가 계속 괜찮냐는 겁니까?"

장 부장은 술병을 건네받아 내 잔을 채워주었고, 우린 하루의 피로, 그리고 약속 받은 승진을 자축하듯 단 번에 술잔을 비워버렸다.

"제수 씨가 뭐라고 안해? 지난주까지도 쁘띠토널 아웃렛 입점 건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야근했잖아."

"크흐..."

소주 한 잔에 걸걸한 소리를 만들어 놓고, 먼저 서비스로 나온 생간을 기름장에 찍어 입에 넣었다.

"저는 결혼하기 전에 먼저 결혼한 사람들이 저한테 맞벌이 해라, 맞벌이 가능한 여자를 만나라...하는 소리를 할 때마다 그게 꼭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그러는 건 줄 알았어요."

난 다시 장 부장의 잔을 채웠고, 그때부터 우린 딱딱하게 얼어있는 육회를 각자 비비기 시작했다.

이집 육회의 특징이다.

가격이 싼 만큼 당연히 한우도 아니고 냉동인데 맛은 어지간한 바로 잡은 한우보다 더 맛있다.

마치 무채처럼 가늘고 길게 썰어서 꼭 보면 싸구려 부페에서나 나올 법한 육회 스타일인데, 이 집을 한 번도 안와본 사람은 많지만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맛이 대단하다.

얼어있는 고기가 부드럽게 녹을 때까지 슬라이스된 배와 함께 골고루 저어주어야 한다.

나와 장 부장은 환상에 가까운 첫 입을 즐기기 위해 부지런히 육회를 저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그런 부분도 당연히 크겠죠. 아니, 크더라고요. 혼자 벌 때보다 둘이 같이 버니까 모이는 것도 많고, 또 소비도 많이 줄어들고...그런데 그런 부분보다 더 중요한게 서로 일을 하니까 다른 업종이라도 일 때문에 늦게 들어오고 또 일 때문에 가사에 소홀해지

는 걸 서로 이해할 수 밖에 없어지더라고요."

"그렇지, 그런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

"한 번씩 월말 되고 또 지점 대출 목표 달성일 다가오면 와이프도 밤 10시나 돼야 집에 오고 그래요. 그럴 땐 또 제가 어설프지만 집안 일 하는 거고...조직 문화를 아니까, 거기다 또 제가 하는 일이 영업직이라는 걸 아니까 많이 이해해주더라고요. 그리고 요즘

은 자기도 피곤해서 집에 오면 뻗기 바빠요. 이럴 때 또 센스있게 저녁은 먹고 들어가주는 거죠."

"보기 좋네. 나도 신혼 때 그런 걸 미리 알았음 너처럼 했을텐데 말이야. 괜히 잘 다니고 있던 회사 관두라고 해서...근데 또 우리 땐 우리 부부처럼 하는 게 너무 일반적이었고. 시대가 바뀌는 거지 뭐. 그래도 두 사람 2세 준비는 해야하지 않나? 제수 씨 나이가

마냥 어린 것도 아니고..."

난 그냥 시익하고 웃었다.

"아기라...이게 참 이상한 거 같아요. 부장님 말씀대로 집 사람 나이도 있고 하니까, 거기다 양쪽 부모님들 모두 은근히 기대를 하고 계시고. 그리고 저나 집 사람도 아기가 있음 좋겠단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근데...지금 삶에 둘 다 너무 만족을 하고 있다보니까

여기서 뭔가 변화가 오는 게 살짝 두렵기도 해요."

장 부장은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집 사람하고 둘이 있을 때 한 번씩 그런 이야기 나올 때마다 그냥 자연스럽게 기다리자...하고 있는 거고요."

"그래도 제수 씨 다니는 은행 정도면 애가 생겨도 복직 같은 건 크게 안 부담스럽지 않나?"

"집 사람이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존중하고 또 지지해주듯이,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애가 태어나면 조금 다르겠죠."

"하긴...복직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리 옆에서 도와주는 가족이 있어도 여자 입장에선 애 보고 일까지 하려면 사람이 상한다."

"연애기간이 짧았던 만큼, 둘 만의 신혼 기간이라도 좀 즐기고 싶은 마음도 크고요."

그렇게 개인사 이야기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소주 두 병을 비웠고, 거기서 안주를 육회에서 초리구이로 바꿨을 때였다.

"근데 아까는 왜 그렇게 심각하셨습니까?'

"뭐가?"

"사장실 나와서요."

"내가?"

"네. 그 자리에서 바로 무슨 일 있냐고 묻기가 민망할 정도로 생각이 많으신 얼굴이셨어요."

"아...별 거 아니었어. 한 번씩 나도 내가 홍성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헷갈려."

"...?"

"사장님이 물어보실 때 최대한 빨리 대답을 한다고 생각나는대로 13년이라고 대답을 했는데, 다시 혼자 속으로 계산을 해보니까 13년이 아니라 14년 차더라고. 이게 계산을 해보면 금방 나오는 답인데, 꼭 계산을 해봐야 할 정도로 나도 내가 얼마나 있었는지

별 생각도 안하고 다닌다는 증거잖아."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런데 대뜸 승진 이야기를 하시니까 과연 내가 이 홍성에 얼마나 더 다닐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

"마흔 넘어 가봐라, 인마. 대한민국 평균 정년이 52 세란다. 그런데 우리 업계는 업계 특성상 그 평균 정년보다 5년은 짧잖아."

"그렇죠."

"47세 잡고...나 진짜 앞으로 몇 년 안 남았다."

"전사 운영 본부장 자리면 뭐..."

"그래서 아까 순간 나도 모르게 현타가 왔나봐. 우와 다행이다...그래도 몇 년은 더 늘어나겠네, 그래봤자 몇 년이야. 그렇게까지 생각이 발전되니까 갑자기 우리 애 대학갈 때까지라도 버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타 업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이직률도 높고 또 그래서 평균 정년도 불안정한 패션 업계.

대 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은 페이가 적어서 이직률이 높고, 또 대기업은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때문에 정년이 짧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정년까지 버티는 동안 큰 돈을 버느냐.

꼭 그렇지도 않다.

같은 대기업이지만 타 업계 대기업에 비해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의 페이, 그리고 복지.

다만 퇴직 후 소자본으로 자기 장사를 시작할 수 있다는 메리트는 있지만, 장 부장 정도 나이가 되면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먼저 홍성을 나간 정 팀장 처럼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스스로 트랜드를 따라갈 자신이 있고 또 팀장급 타이틀로 브랜드 업체들과 직접적인 컨텍이 가능할 때 자진 퇴사를 많이들 한다.

장 부장 정도 나이가 되면 솔직히 아슬아슬하지만 갈림길에 놓인 거라고 봐야한다.

박 이사 때와는 또 다른 게, 그땐 지금처럼 업계가 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패션업계 종사자도 그리 많지가 않았고, 인터넷 쇼핑이란 것도 활성화 되기 전이라 회사를 나가서 자기 사업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이야 물건을 받을 곳이 없어서 문제지 팔 곳을 걱정하는 시대는 아니지 않나.

다들 스마트 폰 하나만 있으면 그게 곧 오피스고 매장인 세상인데.

그랬기에 박 이사는 악착같이 경쟁에서 살아남아 이사까지 달 수 있었던 거겠지만, 장 부장은 또 말이 다르지.

완전 업계 화석이 된 것도 아니고, 아직은 시장 트랜드를 꿰고 있는 상태.

그럼에도 회사로부터 받은 인정과 대우 모두가 업계 탑 급이니 여러모로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은태 너는..."

"네."

"죽어도 홍성이냐?"

난 대답을 잠시 뒤로 미뤘다.

평소 장 부장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

"부장님은요?"

"입으로는 너한테 물으면서 속으로는 나한테 묻고 있는 중이다."

"그럼 저도 입으로는 부장님한테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저한테 대답하겠습니다."

"푸훕..."

"부장님만 지금처럼 제 앞에서 단단하게 버텨주신다면...저도 지금처럼 부지런히 따라가면서 뒤에서 부장님을 밀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전사 운영 본부장 자리...너한테 갈 게 나한테 온 거 같다."

난 말 없이 장 부장의 잔을 다시 채웠다.

"상무보는 나보다는 너잖아."

"나이 때문이죠."

"어쨌든."

"전 상무보 보다는 부장님입니다."

"요즘 점점 이빨 까는 게 자연스러워져?"

"예전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야만 했던 거고요."

"..."

"지금은 속에 있는 진심이 알아서 이빨이 되는 거 같네요. 진심입니다, 부장님. 저는 만약에...진짜 만약에 홍성에서 부장님이 없어지면, 제 홍성 생활의 구심점이 사라져버릴 거 같습니다.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저랑 부장님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웃을

지도 모르겠지만...저한테 부장님은 팀장이었을 시절 때부터 홍성 그 자체였습니다."

"...!"

"전 지금까지 홍성에서 일해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부장님 밑에서 일을 했었죠. 앞으로도 쭈욱 그러고 싶고요."

"잠깐 흔들렸다. 흔들리다 쓰러질 방향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지만, 애상치 못한 바람이 불어서 나도 모르게 잠시 흔들렸던 거야."

"어제 부장님이랑 같이 전무군단에 끼어서 로비를 걸었잖습니까. 그 기분 참 묘하데요."

"너도 그랬냐?"

"저는 나중에 한 십 년, 이십 년 뒤 쯤에 그 선두에 부장님이 서서 걷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만약 그때까지 우리 둘 다 홍성에 남아있다면 그 선두에 서는 건 내가 아니라 은태 네가 될 거다."

"...?"

"난 상무보 옆 자리가 되겠지.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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