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앞으로는 신경 좀 쓰라고 하는 말이에요
그 다음 일주일이 고비였다.
문 팀장이 맡고 있던 업무를 인수인계 받는 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같은 공간 안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참 부담스러웠다.
비단 나 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껄끄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서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했고, 그래서 그녀의 홍성 영업부 마지막 날엔 아예 사무실에 내려가지도 않고 장 부장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치사한 방법을 선택해야만 했다.
-어디십니까?
양 팀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영업 마케팅부 사무실이요. 부장님이랑 같이 있습니다.”
-문 팀장...방금 갔습니다.
그래도 미우나 고우나 함께 했던 시간이라는 게 있다.
마음이 좋을 수 만은 없었다.
내 결혼식까지 왔었는데.
그리고 같이 사진까지 찍었는데...
그럼에도 난 나의 결정에 어떻게든 후회를 하지 않아야만 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양 팀장과의 통화를 끝내기가 무섭게 귀신같이 장 부장이 물었다.
“뭐래? 갔대?”
“...네. 후우...”
“찜찜해 하지마라. 내가 너였어도 똑같이 했을 거다.”
“네.”
“직장 생활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야. 그걸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거야.”
“...쩝.”
“그래도 넌 나은 편이야. 넌 네 판단 하에 네가 결정을 한 거잖아. 누구를 날리는 일. 그걸 위에서 하라고 해서 하면 그거 진짜 못할 짓이다.”
“내려가 보겠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려고 하지마라.”
“...?”
“오히려 그러는 모습이 더 부자연스럽게 비춰질 거다. 네 결정이 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문 팀장의 행동을 잘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거다. 어차피 남아있는 사람들은 결국 다 네 편이다. 위축되지 마라.”
“네,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네 편 내 편이 어딨나.
안 팀장 말처럼 이기는 놈이 내 편인 거지.
장 부장이 어떤 의미로 그런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지 뻔히 다 알면서도, 그냥 그 순간의 난 나란 사람을 포함해 회사라는 정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우리 모두가 가엽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그렇게 대책없이 감정 놀이에만 끌려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나가는 사람은 자기가 나간 뒤에 자기의 빈자리가 조금이라도 크게 느껴지길 바랄 겁니다.”
“...”
해외 영업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문 팀장이 사용했던 책상의 의자를 빼어 사무실 중앙으로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해외 영업부 팀원 전원을 불렀다.
팀원들은 내 지시대로 각자의 의자를 끌고와서 내 주위로 모여앉았다.
“하지만 전 그렇게 만들어줄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리고 평소 문 팀장과의 관계 정도에 따라 이번에 제가 내린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
“여러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전 한 대리가 다른 팀원들 다 보는 앞에서 문 팀장을 궁지로 몰고, 또 제게 사직서를 제출하는 순간 해외 영업부의 팀웍은 이미 박살이 났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전 문 팀장의 팀장 역량에 문제가
있다라고 판단을 했고, 그 뒤에 알게된 일련의 상황들은 그저 제가 확실한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을 줬을 뿐입니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해외 영업부와 붙어있는 기획 2팀에서도 모두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조금 전에 중국 법인 본부장님과 통화를 간단하게 했습니다. 보내줄 수 있으면 두 명 정도만 보내달라고 요청을 하시네요. 어차피 그쪽에서도 비자가 끝이나서 본사로 복귀해야하는 인원이 두 명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주고 받는 걸로 하기로 했습니다. 주재원
근무 신청...알아서들 신청 하시고요, 으음...”
난 양쪽 허벅지 위로 두 팔꿈치를 올려놓고 깍지를 꼈다.
그리고 자세를 앞으로 살짝 숙여 해외 영업부 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나만 잘되면 되는 게 맞습니다. 당연히 다같이 잘되면 좋지만, 그게 불가능 할 때엔 내가 제일 잘 되고 싶은 건 어쩌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본능 아닙니까? 그 본능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사람을 속물취급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걸 속물이라
고 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속물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다만...나 혼자 잘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그것도 반칙까지 써가며 짬을 시키는 행동은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제가 문 팀장과 같이 일을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렇다
고 제가 문 팀장을 다른 곳으로 보낸 걸로 여러분들의 이해를 바라려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제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들에게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앞으로 저와 같이 일하는 동안은 문 팀장이 했던 실수, 혹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
“앞서 말했다시피 나가는 사람은 좋게 나가건, 안 좋게 나가건 자기가 나간 뒤 자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길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인수인계 해놓고 나간 꼬라지를 보니까 해외 영업부 업무에 큰 빵구가 나길 바라면서 나가는 거 같던데...이럴 때 남아있는
사람들이 해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복수는 네가 나가고 난 뒤 팀이 더 잘 돌아간다는 걸 보여주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여기서 말이 더 길어지면 잔소리 밖에 안되는 거고...일단 제가 양 팀장님이랑은 이야기를 다 끝냈습니다.”
해외 영업부 팀원들은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획 1팀과 해외 영업부의 사무실 위치를 바꿀 겁니다. 다들 보고 있던 업무 잠시 보류하고 우선 사무실 위치부터 바꾸세요, 제 자리 옆으로. 앞으로 해외 영업부는 역량이 되는 팀장이 나타나기 전까지 제가 직접 차고 나갈 겁니다. 그리고 이번 문 팀장으로 인
해 프랑스 파견근무 신청을 하지 못하신 분들은...안타깝지만 똥 밟은 셈 치세요. 어쩔 수 없잖아. 이미 프랑스로 넘어갈 팀이 다 꾸려진 상태인데....대신 제가 책임지고 꾸준히 중국 법인 주재원 티오를 늘려보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다음 기수 프랑스 파견
근무에도 최대한 밀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한 대리가 휴가에서 복귀했다.
“잘 쉬고 왔어요?”
“네.”
“음...대략적인 건 알아서 보고를 받도록하고, 일단 이거.”
난 한 대리 앞으로 중국 법인 주재원 근무 신청서를 건넸다.
한 대리는 그 신청서와 날 번갈아쳐다봤고, 난 그런 한 대리에게 생각이 있으면 신청을 하라고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 제가 이걸 신청한다는 것 자체가 코메디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요.”
“봐지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선은 제가 하던 업무부터 보겠습니다.”
“...”
“그 전에 사무실 사람들에게 사과부터 해야할 거 같은데...”
“무슨 사과요?”
“차장님께 사직서까지 제출하며 그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정작 저만 이렇게 남아서 계속 출근을 한다는 게...”
“아무도 신경 안써요.”
“...!”
“다들 그냥 그런 헤프닝이 있었다 정도로만 기억하지, 크게 신경 안써. 다른 사람들은 뭐 노나? 다들 자기 할 일 바쁜 사람들이야. 이미 다 해결된 일인데, 뭐하러 좋지도 않았던 일을 다시 들춰내요? 그냥 업무 복귀하세요.”
“하지만...”
“원래 불 구경 다음으로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라고 하잖아. 재밌는 구경 한 번 했네...로 끝이야.”
“감사합니다, 그리고...죄송합니다.”
“대신 나 좀 도와줘요. 주재원 근무 신청 안한다니까 하는 말이야.”
“네, 물론입니다.”
“해외 영업부 관련 디테일이 사실 나한테는 아직 많이 버겁네. 성격상 한 번 하기로 한 건 끝까지 파고 들어야 적성이 풀리거든.”
“필요하신 내용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바로바로 뽑아드리겠습니다.”
“그래요. 한 대리.”
“네, 차장님.”
“폭탄이 하나 떨어질 거예요.”
“폭탄이요?”
“어쩔 수 없이 인원이 부족하다보니 이번에 중국 법인에서 주재원 근무 마치고 복귀하는 인원 둘 중에 한 명은 양 팀장에게 토스하고 다른 한 명은 해외 영업부로 배치시키기로 결정했어. 그런데 둘 다 한 대리 보다는 선배더라고.”
“아, 네.”
“거기다 둘 다 주재원 근무를 하고 복귀를 했으니 팀장 승진에 가산점이 붙을 수 밖에 없고. 문 팀장만 계속 붙어 있었으면 어쩌면 한 대리한테 기회가 조금 일찍 갈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은 꼬이게 생겼어?”
“괜찮습니다. 그런 부분에 크게 신경 쓰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신경 좀 쓰라고 하는 말이에요.”
“...?”
“너무 신경을 안 쓰는 거 같아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 눈엔 책임감이 있는 사람 같아 보여요. 그런데 그 책임감이 너무 부하직원들만을 위한 책임감인 거 같아서...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에요.”
“...!”
“아무리 밑에서 목숨 걸고 한 대리 좋은 사람이다, 의리있다...하며 밀어줘도, 위에서 끌어주지 않으면 이런 집단 생활에선 장수를 못해요. 잘 생각을 해보란 말이야. 밑에서 목숨 걸고 밀어주는 부하직원들을 제대로 챙겨주기 위해서 앞으로 한 대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렇게 시간이 흘러 중국 법인에서 대리급 두 명이 본사 영업부로 넘어왔다.
한 명은 최익수라는 인물로 처음부터 해외 영업부에서 중국 법인 관련 업무를 계속 보고싶다고 자신의 입장을 명확하게 말한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오현재라는 인물로 본사 내에서 그 파워가 줄어든 해외 영업부 보다는 H.I 편집샵과 Kidshub를 동시에 컨트
롤하고 있는 기획 1팀에서 근무를 해보고 싶다고 말한 친구였다.
다행히 각자 원하는 팀이 달라서 큰 고민 없이 부서를 나눠줄 수 있었고, 또 중국 법인에서 이미 본사 영업부의 실정을 알아서 공부를 하고 온 듯 내게 상당히 공손했다.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네. 양 팀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저야 당연히 저희 팀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하는 사람을 데리고 가야죠.”
그 자리에서 바로 차장 인터뷰를 간단하게 끝내고 난 최익수와 오현재를 장 부장에게 올려보냈다.
그리고 또 이어지는 인사부장 인터뷰.
그렇게 최익수와 오현재는 본사 출근 첫날 하루종일 인터뷰만 보느라 시간을 다 보냈고, 나와 팀장들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프랑스 파견 근무를 가는 이지혜와 중국 법인으로 주재원 근무를 떠나는 직원들, 그리고 새로 본사 영업부로 들어온 두 사람을 위한
환영회 겸 송별회 자리를 가지자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한 대리.”
“네, 최 대리님.”
“이거 법인으로 보내는 인보이스 말이야.”
“네.”
“이걸 왜 계속 두 개로 나눠서 보내?”
“왜라니요? 하나는 브랜드 측에서 홍성에 보내는 인보이스고 또 다른 하나는 홍성이 마진 붙여서 보내는 인보이스니까 당연히 두 개가 붙어서 같이 가야죠.”
“이거 법인에서 인보이스 받을 때 상당히 헷갈려. 어차피 브랜드 측에서 날리는 인보이스는 보지도 않는다고.”
“보든 안 보든 보내야죠. 그래야 법인에서도 본사 영업부가 어떻게 인보이스를 만들어 보내는지 확인을 할 수 있을 거 아닙니까.”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굴러온 돌과 박힌 돌 사이에 시작부터 팽팽한 신경전이 펼쳐졌다.
“법인에서는 이건 아예 보지도 않는데...”
“여긴 중국 법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최 대리님이 오셔서 현지 법인이 어떻게 업무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됐다는 부분은 참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렇다고 지금껏 본사 영업부가 해오던 업무 스타일을 법인 스타일에 맞게 바꾸자는 의견은 잘 이해가
안되네요.”
“뉘앙스가 조금 이상한 거 같아, 한 대리? 난 줄일 수 있는 업무는 생략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뜻으로 한 말이야.”
“아, 그러셨습니까? 전 그동안 저희가 줄일 수 있는 업무도 그냥 아무런 고민없이 미련하게 꾸역꾸역 해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오해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