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제가 직접 관리 할 겁니다
“차장님 앞에서 이런 말 해도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솔직히 제가 이런 환경에서 이런 대우나 받으려고 그 비싼 등록금 내가며 대학까지 졸업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술이 한 잔 들어가자 한 대리는 그제야 자기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풀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들어주기만 했고, 가끔씩 비어있는 그의 잔을 채워주는 게 전부였다.
“홍성 쯤 되면 프로패셔널한 사람들이 모여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일을 위해 고민을 하고 또 일을 위해 서로 싸웠다가 말 그대로 프로처럼 쿨하게 풀고 다시 또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가고...하지만 지금까지 일해본 결과 결코 아니네요.”
난 다시 그의 잔에 술을 채워놓고 함께 비우자는 의미로 내 잔을 들어 그의 앞으로 가져갔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네. 삼성이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삼성은 좀 다르지 않을까요?”
“글쎄요...저도 거기 생활은 안해봐서 맞다, 아니다 하고 장담은 못하겠지만, 거기 역시 우리랑 별반 다를 건 없을 거 같은데요? 결국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 공간 아니겠습니까. 어디 시스템이 거짓말을 하고 시기를 하며, 또 이기심을 가지겠
습니까? 다 사람이 하는 거지.”
“아무튼 죄송합니다, 차장님.”
“아니에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한 대리 덕분에 나중에 더 크게 터질 수도 있었을 시한폭탄을 이만한 피해로 잘 막아낸 거 같아요. 당연히 누가 봐도 문 팀장이 잘못한 거지. 그런데 그걸 위에선 알 수가 없는 노릇이고. 내 입장도 좀 이해를 해줘요. 내가
무슨 수로 모든 팀을 다 현미경으로 관찰하나. 그리고 그럴 거였음 팀장이 왜 필요해요? 문 팀장 같은 사람을 팀장으로 앉힌 것 자체가 실수였지만, 당시엔 다른 대안이 없었고, 또 팀장으로 앉힌 만큼 난 문 팀장을 믿을 수 밖에 없었어요.”
“...네,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거...”
난 한 대리 앞으로 그가 새로 만들었던 사직서를 내밀었다.
“나 뿐만 아니라 인사부장님 역시 이건 좀 아닌 거 같다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한 대리는 자신의 사직서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 다시 챙길 마음이 없어 보였다.
“많이 지쳤습니다.”
“이해합니다. 지금 한 대리 정도 되면 일에 그리고 사람에, 회사 시스템에 염증, 환멸을 느끼고 또 그래서 모든 걸 다 던져버리고 한 일년 정도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어요. 내가 그랬거든. 그리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딱 한
대리 시기때 그런 마음을 한 번쯤은 다 가지죠. 그런데 이건 그림이 너무 안 좋아. 나를 위해서도, 한 대리를 위해서도 이건 아니야.”
“후우...”
“휴가 줄게요. 문 팀장 얼굴 보기 싫죠? 단 하루라도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게 숨이 막힐 것 같고 두드러기가 날 것 같고...그 마음 진짜 다 이해한다니까? 어떻게 싫은 사람하고 같이 일을 하나.”
“...”
“그런데 또...어떻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난 한 대리가 술잔을 혼자 기울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덩달아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그의 잔에 다시 술을 채워주었다.
“문 팀장이 대충 정리 끝내고 자기 책상 뺄 때까지 휴가 줄테니까 그동안 마음 정리하고 다시 출근하는 걸로 합시다.”
“...”
“얼마나 필요한데? 며칠이나 필요하겠어요? 여행? 갔다와요. 한 2주면 되나?”
“차장님...”
“내가 이렇게까지 절이 싫어서 떠나겠다는 중을 그냥 매너상이 아닌 진심을 다해서 잡아본 적은 없어요. 가급적이면 그냥 가라고 해. 더 좋은 곳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라고 한단 말이야. 안 잡아. 왜 잡아? 내가 뭐라고 무슨 자격으로 잡아? 사직서 던지기까지
혼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봤을 거야? 그런데 한 대리는 내가 좀 잡아야겠어. 내가 이렇게 관두겠다고 하는 사람을 잡은 건 한 대리가 처음이야.”
한 대리는 다시 안주도 먹지 않고 자기 술잔을 비워버렸다.
“이렇게 가면 진짜 안돼. 맨파워가 부족하기 때문에 한 대리를 잡는 건 더더욱 아니에요. 맨파워가 걱정이었다면 내가 미쳤다고 팀장들한테 프랑스 파견근무를 장려하라고 했겠어. 안 그래?”
“...네.”
“다만...그동안 한 대리가 경험한 직장이 진짜 홍성 영업부는 아니라는 걸 내가 꼭 보여줘야겠어.”
“...!”
속으로 ‘더러워서 못해먹겠네...’ 하는 생각을 하며, 하지만 겉으로는 진심을 다해 한 대리를 설득했다.
“한 대리 지방에서 올라왔죠.”
“네, 순천에서 왔습니다.”
“나도 그래. 나도 부산에서 올라왔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홀로 올라와서 타지 생활하고 있는 한 대리 입장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이 홍성 생활이 절박한 만큼 손해보는 게 많다는 생각도 할 수 있고, 또 그래서 회사나 같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을 더 크게 느낄 수
도 있어. 외로움,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받는 상처는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거고...결국 아까 한 대리가 한 말을 잠시 빌려서 내가 이러려고 서울에 올라왔나...하는 의심을 계속 할 수 밖에 없단 말이야. 나 이거 하나만 물어봅시다. 다른데 갈 곳은 있어요?”
“...”
“지금 당장 말이야. 홍성 대리 출신인데, 이 업계에 한 대리 갈 만한 곳이 없겠어? 서로 모셔가겠다고 하겠지. 내 말은 지금 당장을 말하는 거예요.”
“아뇨, 거기까지 계산을 하고 저지른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이번에 한 대리가 하는 행동을 보니까 딱히 계산대로 움직이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 다른 회사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 당장 갈만한 다른 곳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단순히 매일매일 해야하는 출근에 항마력이 딸리고
있는 중이라면 내가 휴가 준다잖아. 그 휴가 쓰면서 조금 여유를 가지며 현재 한 대리의 컨디션을 되돌아봐요. 그렇게 나쁜 컨디션은 아니잖아. 대우가 다른 회사에 비해 약한 편도 아니고...”
“후우...그러게요. 분명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나 다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면 나름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 게 맞는데...어떻게 지난 몇 년간 죽어라 일만 했음에도 통장에 든 잔고에는 변화가 없는 걸까요?”
“...”
“장가나 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여자가 생긴다고 해도 전세나 구할 수 있을까 싶네요. 그냥 최근 며칠간 사직서를 준비하면서 다 때려치우고 그동안 모아놓은 돈에 몇 푼 안되기는 하겠지만 받게 될 퇴직금으로 부모님 계시는 순천에 내려가서 삼겹살 집이
나 하나 열어볼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해봤습니다.”
“하아...진짜 말도 안되는 소리 한다.”
“그럼 최소한 가족들이랑 같이 붙어 있을 수는 있잖아요.”
“가족이라고 뭐 크게 다를 거 같아요? 떨어져 지내니까 애틋한 거지, 매일같이 붙어서 살아봐요. 집 마다 사정이 다 다르니까...어떨 땐 남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도 해.”
“하긴...”
“믿을지 안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딱 1년 전에 내가 지금의 한 대리랑 비슷했어. 비슷한 환경에서 또 비슷한 고민을 했었다고. 한 대리도 잘 알잖아. 나도 작년 초까지는 대리였다고. 팀장에서 차장 진급을 말도 안되게 빨리해서 그렇지, 나도 작년 초까지는 대
리였어.”
“네.”
“물론 한 대리처럼 회사 관두고 개인 장사나 한 번 해볼까...하는 생각은 안해봤지만, 과연 이렇게 죽어라 고생해가며 가족들이랑 떨어져서 타지 생활을 할 필요가 있는 걸까? 하는 의심을 나라고 왜 안 해봤겠어요? 거의 맨날 했어. 한 대리 말처럼 우리가 뭐 대
리 연봉을 억대로 측정해주는 회사도 아니잖아. 혼자 살다보면 아무래도 원룸 월세, 관리비에 밥을 한 끼 먹어도 해먹기 보다는 사먹게 되고, 그렇게 여기저기 새어나가는 돈이 내 월급으로는 커버가 안될 정도로 커지게 되더라고. 아무리 월급을 많이 받아도 나
나 한 대리처럼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돈을 못 모아. 쉽지 않아. 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해봐요.”
“어떻게요?”
“내가 한 대리 월급을 아니까.”
“...?”
“뭘 해서 한 대리가 받아가는 그 월급을 매달 고정적으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개인 장사? 그런 리스크 큰 모험은 이야기 하지 말고, 진짜 객관적으로 실현 가능한 이야기만 해봅시다. 다른 회사에 간다? 결국 거기에서도 똑같은 지리멸렬함을 느끼게 될 거
야.”
“...”
“한 대리가 가져가는 월급이면 있잖아요, 딱 강남의 27평짜리 아파트 한 달 월세야. 보증금 한 3,4천 정도 걸려있는 강남 아파트 월세. 그런데 그런 아파트 한 채 가격이 사려고 하면 얼마나 하는지 알아요? 최소 15억에서 20억 사이에요.”
“크흐...진짜 미쳤네요.”
“미쳤죠. 미쳤는데...한 대리는 이미 그런 아파트를 한 채 가지고 있는 거야.”
“...?”
“매달 그런 아파트에서 올라오는 월세 만큼의 돈이 고정적으로 들어오고 있잖아요.”
“에이...그건 좀 아니죠. 그렇게 비교를 할 내용은 아닌 거 아닙니까.”
“아닌 거 아는데...그렇게라도 해서 홍성 내에서의 한 대리 가치를 스스로 높혀보라고요.”
“...!”
“나는 그렇게 버텼어요. 질풍노도의 대리 시절을. 내가 하는 일은 그냥 단순히 월 300짜리 일이 아니다. 그냥 매달 300만 원을 받는다 뿐이지, 내가 하는 일의 가치, 내 포지션의 가치는 강남의 27평짜리 아파트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버티자...어쨌든 일
을 잘하든 못하든 매월 25일만 되면 월급은 들어오는 거니까.”
“흐음...”
“그런데 웃긴 게 있어요. 내가 받는 월급의 가치를 그런식으로 내 위안을 목적으로 환산하는 재미를 붙이다보니까...돈을 모으게 되더라. 돈이 모이더라고요.”
“...?”
“30만 원짜리 신발을 하나 살 때에도 이런 계산을 먼저 하게 되는 거예요. 30만 원이면 1억이다.”
“1억이요?”
“요즘 금리로 놓고 보면 만약 은행에서 1억 빌리면 월 이자가 30만 원 정도 되는 거 같더라고.”
“아...”
“나도 알아. 진짜 찌질한 계산이고 또 서글픈 자기 위안의 계산이라는 걸. 하지만 해야 돼. 우리처럼 월급 받는 사람들, 특히 우리처럼 집안, 부모 도움 기대할 처지가 못돼서 어떻게든 혼자 힘으로 평균치 이상의 삶을 살아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빡세게 돈을 모아야 돼.”
“...”
“그림이지. 총대 매고 한 대리처럼 멋지게 사고 한 번 칠 수 있는 거...그렇게 멋진 행동 한 번 안해보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어? 다들 마음은 있지만, 현실이 그 용기를 짓누르는 것 뿐인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 대리는 했잖아. 난 그 부분을 참 높게 사고 싶어
요. 나랑 조금만 더 같이 합시다. 내가...감히 약속하건데, 그래, 이게 회사지...하는 생각을 한 대리가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볼게요.”
“후우...”
“야, 한 대리.”
“...!”
“그냥 하자고. 내가 미안하다고. 그런 좆같은 환경도 몰라봐주고 혼자 스트레스 받게 만들어서 내가 미안하다고.”
“차, 차장님...”
“내가 미안해서, 그래서 이렇게는 못 보내겠다고.”
“...”
“응? 나랑 조금만 더 합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후우...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갖다주세요.”
난 빈병을 흔들며 서빙중이던 이모님께 소주 한 병을 더 갖다달라고 부탁했다.
바로 그 때였다.
“앗싸! 거 봐요. 내가 여기 계실 거라고 했잖아요. 으흐흐흐...”
“...?”
한숨을 내쉬는 양 팀장, 그리고 그런 양 팀장 뒤로 회심의 미소를 얼굴에 걸어놓고 안 팀장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안 팀장은 우리가 허락을 하지도 않았는데, 나와 한 대리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자리를 잡고 앉으며 서빙 중이던 이모님께 소주잔 두 개와 앞접시 두 개, 그리고 초리구이 2인분을 추가로 주문했다.
“여긴 어떻게...”
“여기 술값은 양 팀장님이 계산하실 겁니다.”
양 팀장 역시 아랫입술을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그게 무슨...”
“양 팀장님이랑 같이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차장님이랑 한 대리 이야기가 나왔어요.”
“두 사람이 왜 같이 저녁을...그동안 잘 피해다니나 싶더니 어쩌다 또 안 팀장한테 잡혔어요?”
“하아...그러니까요.”
“우와...제가 무슨 역병입니까? 일 마치고 할 일 없는 사람들끼리 같이 저녁도 먹을 수 있는 거고 그렇지...아무튼 같이 저녁을 먹다가 두 사람 이야기가 나왔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여기 울산 식육에서 두 분이 술을 한 잔 하고 계실 거 같은데, 양 팀장
님은 아니다, 새벽집에서 술을 한 잔 하고 계실거다...라고 우기시잖아요. 그래서 내기를 했죠. 좋다. 차장님한테 연락 하지말고 같이 한 번 가보자. 여기 와서 두 사람이 없으면 2차는 내가 쏘고, 양 팀장님 택시비까지 내주는 걸로, 그리고 왔는데 두 사람이 있으
면 여기 술 값은 양 팀장님이 다 내는 걸로.”
“결국 양 팀장님은 이렇게 또 안 팀장님한테 당한 거네.”
“그러게요. 그나저나 한 대리, 차장님이랑 이야기는 좀 나눠봤어?”
젓가락을 챙기며 안 팀장이 한 대리에게 물었다.
“뭘 또 이만한 일로 회사를 관두네, 마네 하는 거야? 잡아줄때 그냥 해. 응?”
“...네.”
“그런데 차장님.”
“네.”
“문 팀장 보내고 난 뒤에 그 자리는 누구로 채우실 겁니까?”
양 팀장의 질문에 안 팀장은 물론이고 한 대리까지 눈에 빛을 내며 날 쳐다봤다.
“제가 할 겁니다.”
“...!”
“당분간 해외 영업부는 제가 직접 관리 할 겁니다.”
양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고, 안 팀장은 회사 일이야 어떻게 되든 지금 이 시간 만큼은 즐겨야 한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술잔을 돌려따기에 바빴다.
그리고 안 팀장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한 대리의 잔부터 채우기 시작했다.
“두 분 팀장님들...앞으로 긴장 좀 하셔야 할 겁니다. 해외 영업부 보다 실적이 안나오면 두고두고 놀릴 거니까요.”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군요.”
양 팀장 역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안 팀장의 술을 받았다.
“한 번 정도는 타이틀 무시하고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뭘요?”
“차장님이랑 말이죠.”
그리고 안 팀장이 자신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전 무조건 이기는 사람 편입니다. 차장님이 팀장 대리까지 함께 보신다? 크흐...이거 팀장 맨파워만 놓고 보면 거의 홍성 영업부 역대급 맨파워 아닙니까?”
난 술잔을 들며 말했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거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