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쿨하지마
어쩔 수 없이 술이 한 잔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 팀장의 일로 양 팀장이나 안 팀장을 붙잡고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술을 마시다보면 또 결국엔 자리에 없는 사람 험담이나 늘어놓을 것이 뻔했고, 안 해도 될 말들이 쌓이다보면 그게 곧 나란 사람의 이미지가 될 것이니까.
냉정하다, 꼰대다, 기회주의자다...
그런 이미지로 비춰지는 건 사실 크게 부담스럽지가 않다.
어떻게 보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런 이미지로 비춰지더라도 양 팀장과 안 팀장에게만큼은 스마트한 구석도 있는 상사라는 평가를 받고 싶었다.
뭔가 일이 터질 때마다 그걸 술로 해결하려는 아날로그 스타일의 상사가 아니라...
"후우..."
"퇴근하십니까?"
하루종일 내 눈치를 살피던 양 팀장이 파티션에 몸을 반쯤 기대며 물었다.
난 서류 가방을 책상 위로 올려놓고 그 안으로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업무를 챙겨넣었고, 양 팀장의 질문에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치고 소주 한 잔 하실래요?"
"왜요?"
몰라서 물었던 건 아니다.
다만 난 그만한 일로 술을 마실 정도로 마음이 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뭐 꼭 이유가 있어야 마십니까?"
"그러니 여자를 못 만나지."
난 최대한 얼굴에 장난을 걸어놓고 양 팀장에게 말했다.
"우와...여기서 이렇게 훅하고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기 있습니까?"
"헬스를 한 번 다녀봐요. 아님 필라테스 이런 거라도...거기 젊은 여자들 많이 다니는 거 같더만."
"괜히 말 꺼냈네."
"아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결혼 정보업체 애들만 믿고 걔네들이 소개시켜주는 것만 기다리지 말고 여자들 많이 있는데를 직접 한 번 찾아다녀봐요."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제가 어디 여자 못 만나 안달난 놈인 줄 알겠습니다."
"아닌가?"
"안 잡을테니까 그냥 퇴근 하세요."
"푸흡...그럼 내일 봐요."
엘레베이터 복도까지 나가는 동안 2팀의 안 팀장과만 살짝 눈빛 교환을 하고 그 뒤부터 해외 영업부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속 좁은 놈이라 생각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난 지금 문 팀장에게 상당히 많은 실망을 한 상태였고, 할 수만 있음...정말 안 보고 싶었다.
퇴근을 하고 강혜선이 근무하는 은행 앞에 차를 세워놓고 그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난 문 팀장과 관련된 일을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하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그런 최면 자체가 더 그녀에 대한 실망감과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였다.
"씨바 진짜 졸라 짱나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그렇게 자기만 아는 걸까.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이 없는 걸까.
도대체 왜 그렇게 잔인한 걸까...
그녀의 행동을 이해해 보겠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짓이었다.
사람 자체가 다른데 어떻게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을 내 방식대로 이해할 수 있겠나.
뇌 구조, 생각의 시스템 자체가 아예 다른 사람인데.
하지만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사고라는 게 있지 않나.
이건 문 팀장이 자기 욕심만 알고 있어서도, 생각이 없어서도, 지나치게 잔인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냥 일 자체를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여러 각도에서 그녀를 이해해 볼 필요도 없이 그냥 눈 앞에 나온 결과만 놓고 봐도 그녀는 팀장이란 타이틀에 걸맞는 일을 쳐낼 능력이 아직은 부족한 게 틀림없다.
아직 못해내고 있는 걸 시간이 지나 나중에 가서 갑자기 잘하게 될 수 있을지도 솔직한 말로 의문이고.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팀장 업무가 손에 익을 법도 하다.
지원도 많이 해줬고, 또 애매모호한 실수들도 많이 눈감아줬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직 일반 사원의 눈높이에서만 팀원들을 대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팀원들로부터 인정과 존중을 이끌어내는데에 실패를 했다고 봐야 한다.
팀원들간의 수평적인 관계를 그렇게나 중시해오던 문 팀장.
수평적인 관계.
좋다.
아주 좋은 말이다.
하지만 그 수평적인 관계가 애초에 피라미드 구조로 이뤄진 직장 안에서 얼마나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녀의 생각 자체가 잘못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그녀에겐 그 수평적인 관계를 제대로 형성하고 이끌어갈 능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능력이 부족하면 기존에 있던 방법을 그대로 유지해가면서 조금씩 변화를 줘도 될텐데, 그녀는 능력에 비해 욕심이 많았고, 결국 그 욕심이 이 화를 초래했다고 난 판단했다.
난 그녀의 생각을 지금껏 참 많이 존중하며 기다려줬고, 또 나름 지지도 해줬다.
과정은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난 결과가 더 중요한 사람이다.
과정이야 팀장들 재량에 맡기는 거고, 난 그 과정을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로만 평가해주면 되는 차장이니까.
그런데 이제와 그녀가 중시해오던 그 수평적인 관계에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과연 그녀는 진짜 수평적인 관계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나 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진짜 그 수평적인 관계를 원하는 것일까?
한 대리의 일로 이미 해외 영업부의 팀웍은 개판이 나버렸다.
이건 어떻게 복구도 불가능한 지경이다.
다른 팀원들 다 보는 앞에서 그렇게 팀원이 팀장을 우습게 만들었는데, 다른 팀은 그렇다치더라도 문 팀장에 대한 해외 영업부 직원들의 신뢰가 남아있기나 할까?
"왜 그렇게 얼굴 표정이 무거워요?"
조수석에 오르며 강혜선이 물었다.
"그냥 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오래 기다렸어?"
"으으음..."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간만에 소고기나 먹으러 갈까?"
강혜선은 내 얼굴을 잠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오케이 사인을 던졌다.
"그래요, 그럼."
화가 풀릴 때까지 고기를 먹었다.
강혜선은 자신이 운전을 할테니 소주라도 한 잔 같이 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난 소주 한 병을 혼자 다 비우는 동안 꽃등심 3인분을 먹어치웠고, 그런 내 앞으로 강혜선은 구워진 고기를 부지런히 옮겨주었다.
"뭔데? 도대체 뭔데 이렇게 기분이 안좋아?"
"앞에서는 쿨한척 했는데...사실 정말 화가 많이 난다."
"뭐가?"
난 문 팀장이 자기 팀원들에게 날 팔아먹은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지금은 그 모든 게 문 팀장의 욕심이 만들어낸 일이고 또 오해가 다 풀렸지만, 문 팀장이라는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 같다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쿨하지마. 왜 쿨해야 돼? 당신이 뭔데?"
"..."
"난 자기는 양반이네...하면서 모든 걸 다 이해하는 척 하는 사람, 또 지나치게 쿨 한척 하는 사람들 보면 너무 위선적이더라."
"후우..."
"그런 건 꼭 척을 안해도 보여. 진짜 이해심이 넓은 사람인지, 쿨 한 사람인지. 안 그런 사람이 억지로 그러면 보는 사람들 입장에선 진짜 웃긴다?"
"그런데 아까 그 상황에서 왜 날 팔았냐고 따질 수가 없는 거야. 문 팀장한테도 말을 했지만, 나 역시 필요에 따라선 장 부장을 팔고 다녔거든."
"안 걸렸잖아. 그게 중요한 거지. 그리고 당신은...솔직히 겁이 많잖아. 위에서 시키는 걸 쌩까면서까지 독단적으로 뭔가를 하지는 않았잖아. 당신 회사 일이라 나도 정확하게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냥 당신이 하는 말만 들어보면...문 팀장은 조직 생활과는 좀
거리가 먼 타입 같네."
"진짜 위험한 게 바로 이런 케이스야. 자기는 자기가 잘한다고 생각을 하거든."
"그런데 왜 그런 인물을 팀장으로 올린 거야?"
"사람이 없었어. 그리고...아직 사람이 없어."
"흐음..."
"마음 같아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가라고 하고 싶었는데...사람이 없어."
강혜선은 한숨을 몰아쉰 후 내 잔에 술을 채웠고, 난 그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흘리며 그 잔을 비웠다.
"우리 남편이 고생이 많구나. 우쭈쭈, 우쭈쭈..."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마치 날 어린아이 취급하듯 장난스럽게 위로해주었다.
"풀어요. 소주 한 잔에 풀릴 일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안 풀면 또 뭐 어쩔 거야? 끙끙 싸매고 고민하는 놈만 손해지. 안 그래? 내가 봤을 때 한 대리 그 사람은 어떤 스타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문 팀장 그 여자는 지금 이 일에 대해 당신만큼 애를 쓰고 있지는 않
을 거 같은데?"
"그렇지?"
"응. 당신이 하는 말만 들어보면 그럴 거 같아. 다른 사람의 꿈...꿈이라도 표현해도 되나? 아무튼 프랑스 파견근무에 대한 희망을 그렇게 독단적으로 짬을 시킨 사람이잖아. 보통의 사람은 그럴 경우, 맨파워가 부족할 거 같으면 사정을 하지. 지금은 좀 힘들 거
같다고, 진짜 미안한데 다음에 하면 안되겠냐고."
"맞아. 그게 보통의 사람이야."
"당연한 거야. 이런저런 이유로 현재 맨파워를 빼기가 조금 어려울 거 같은데, 날 좀 도와달라고 하면서 사정을 해야지, 그렇게 신청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희망고문 시켜놓고, 그 신청서를 독단적으로 짬을 시키는 결정을 내린 사람은...한마디로 사이코패스야."
"맞아, 맞아."
"당신을 팔아먹고 안 팔아먹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런 사람이 지금 이 시간 당신처럼 그 일로 마음을 쓸 거 같아? 절대 안 써. 그냥 내일 그 상황이 다시 닥치면 그제야 얼굴 표정 바꾸면서 고민을 많이 해봤다면서, 하지만 한 대리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어떻게 하는지 좋을지 가르쳐달라고 할껄? 그렇게 고민 한 번 안해보고 자기 능력이 안된다는 걸 인정하면서 도움을 받는데 익숙한 사람이야."
"하아...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그런 사람 많아."
"알아. 아니까 열 받는 거야."
"사이코패스를 상대하기 위해선 당신도 사이코패스가 되어야 된다?"
"..."
"그냥 먹어. 마셔. 고민하지 마.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냐. 그냥 독하게 마음 먹는 거 말곤 방법이 없는 일이야."
다음날 출근과 동시에 난 문 팀장의 행동을 주시했다.
백 번 양보해서 그녀 나름의 계산이 있다손 치더라도 전날 내가 내린 지시가 있는데,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내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한 대리 일로 날 찾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 스타일대로 한 대리를 풀어주기 위해 이런저런 장난을 거는 모습이 수차례 눈에 들어왔고, 그럴 때마다 한 대리의 얼굴 표정은 점점 더 썩어들어갔다.
그녀는 이런 핑계를 댈 수도 있을 거다.
알아서 해결을 하라고 했지 않냐.
그런데 난 이런 생각, 의문이 드는 거지.
과연 저게 해결을 하겠다고 하는 걸까, 아님 어떻게든 지금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것일까...
"문 팀장. 내 자리로 잠깐만 와요."
결국 난 내선 전화로 문 팀장을 불렀다.
"한 대리랑 이야기 해봤습니까?"
"하고 있는 중입니다."
표정은 정말 공손하다.
하지만 이젠 나도 아는 거지.
그녀의 거짓 표정 보단 내 눈에 보이는 그녀의 행동이 그녀의 진심이라는 걸.
"언제까지 이야기 끝내고 한 대리랑 같이 저한테 올 수 있겠습니까? 어제 제가 분명히 출근하자마자 저한테 한 대리를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
"가만히 보니까 문 팀장은 내가 하는 말이 참 우스운 모양이네. 그렇죠?"
일부러 목소리를 살짝 올렸다.
이미 문 팀장이 내 자리로 올 때부터 영업 기획부 사무실 전체 분위기는 쪼그라들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니야. 그래. 그러니 내가 그때 팀장 미팅에서 그렇게까지 부탁을 했는데, 결국 이런 사달을 만들어 낸 거지.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말을 아예 안 듣는 거지. 문 팀장만의 세상이 너무 두꺼워. 자기 안에서만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역
시 자기 방식대로 해석을 해버리니 이런 일이 벌어진 거 아니겠어요? 그렇죠?"
"..."
"네, 맞습니다. 그런 거 같습니다. 이 한 마디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막 들죠?"
"...!"
"그렇게 실수를 인정하면 위에 사람은 이해해줘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걸 이해 못해주면 꼰대 상사가 되는 거고. 그렇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
"문 팀장 같은 사람을 두고 회사는 소통이 잘 안되는 타입이라고 좋게 말을 해주지만, 그 진짜 내용은 그냥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소리라는 걸. 한 대리 설득 못하겠죠?"
"...네, 조금 힘들 거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한 대리의 기분을 생각하며 접근을 하는 게 아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무마시키고자 한 대리에게 접근을 하니 그게 풀리겠냐? 하는 말이 정말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알았어요. 가봐요. 그리고 자리 돌아가서 문 팀장은, 아니 문 팀장님은 지금까지 잡고 있던 업무 그대로 놔두고 짐 싸세요."
"네?"
"내가 문 팀장한테 말을 참 어렵게 하는 편인가봐요. 그렇죠?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하는 말을 계속 잘 못알아듣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짐을 싸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는 인사부에서 알려줄 겁니다. 어차피 내가 하는 말은 잘 알아듣지도 못하잖아요."
그리고 난 곧바로 한 대리에게 내선 전화를 넣었다.
"제 자리로 잠깐만 와주세요."
문 팀장은 한동안 굳은채 가만히 있었다.
한 대리가 내 자리로 왔을 때까지도 내가 내린 지시의 의미를 혼자 해석하기 위해 두 눈만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문 팀장이랑 이야기 좀 해보셨어요?"
난 문 팀장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건 말건 한 대리에게 말을 걸었다.
"...네."
"그리고 이제 조금 진정이 되셨습니까?"
"차장님 배려로 어제 일찍 퇴근을 해서 친구들과 술 한잔 하면서 간신히 진정을 시켜놨는데, 문 팀장님 때문에 다시 뭔가가 올라와버렸습니다. 지금 뭐 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을 바꾸실 의향은..."
"어제도 이미 말씀을 드렸다시피 마음이 떴습니다. 꼭 이번 일 때문만은 아니고요, 그동안 해외 영업부에 있으면서 여러가지 이유들이 중첩이 되면서 지금은...조금 쉬고 싶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참...아쉽고 또 너무 안타까워서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차장님."
"아닙니다, 제가 더 죄송합니다. 살뜰하게 챙겼어야 했는데...제 역량이 아직 거기까지는 닿지 못했나 봅니다."
"..."
"죄송하지만 사직서 하나만 더 준비해주시겠습니까? 부장님께 보고 드리고 바로 인사부에 넘기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사부에서 퇴사 관련 면담을 신청할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난 눈빛이 흔들리고 있는 문 팀장을 쳐다보며 한 대리에게 말했다.
"다시는 한 대리님과 같은...케이스가 나오지 않도록 인사부에서 물어보는 내용에 대해 귀찮으시겠지만, 최대한 있는 그대로 대답을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