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실망 모드에 들어갈 수 밖에 없네요
작년 이맘때 쯤 장 부장이 내게 이런 말을 해준적이 한 번 있었다.
인적관리.
매 순간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야하는 게 그 인적관리를 하는 사람들의 일이라고.
타이틀이 올라갈 수록, 연봉이 올라갈 수록 재미있는 프로젝트들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그 지리멸렬한 인적관리를 하는 게 주요 업무가 될 수 밖에 없다고, 그걸 버티지 못하면 결국 항마력이 딸려서 제 풀에 꺾일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때 난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줄 알았다.
누군가에게 하소연은 못하고 있었지만, 그땐 난 이미 당시 대리였던 양 팀장과 깊은 감정의 골이 파여있는 상태였고, 그로 인해 조금씩 감정의 근육이 붙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게 뭡니까?"
"사직서입니다."
"...!"
그런데 딱 작년 이맘때 쯤 장부장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난 그가 경험했던 세상의 십분의 일도 구경을 못한 상태에서 이미 그의 말을 이해했다고 착각한 것이었고, 지금 난 이 최악의 상황에서 어떤 최선의 선택을 해야할지 고민을 할 수 밖에 없
었다.
이런 일이 막상 터지면 고민을 깊게 해볼 시간이 없다.
순발력이 중요하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중이니까.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지만, 차장이라는 이유만으로 여기서 어버버 해버리면 우유부단하단 소리가 나올 것이고 또 성격대로 해버리면, 그래서 앞뒤 정황에 맞지 않는 결정을 해버리면 성급하단 소리가 나올 게 분명하니까.
"..."
영업 기획부 모두는 숨을 죽인채 내게 사직서를 건네는 한 대리와 날 쳐다보고 있었고, 나와 한 대리를 쳐다보는 눈빛과는 조금 다른, 약간은 노골적인 안타까움을 눈에 달고 문 팀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대리님."
"네."
"내일이 없습니까?"
"...네?"
"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십니까?"
난 한 대리에게 받은 사직서 봉투를 반으로 접어 일단 자켓 안주머니 안으로 챙겨넣은 뒤 사무실 안을 전체적으로 한 번 훑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직원들은 하나 둘 씩 자리에 앉아 시선을 분사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단 난 한 대리부터 코너로 몰았다.
성난 황소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서 내가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면 그의 행동과 언사는 더욱더 과격해질 것이 분명했고, 난 그런 되돌릴 수 없는 장면을 영업 기획부 전 직원들 앞에서 연출해낼 자신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한 대리님한테 잘못한 일인가요?"
"...아닙니다."
"그런데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한 대리는 입을 열지 못했고, 그 사이 난 한숨을 내쉬며 문 팀장을 쳐다봤다.
물론 아무런 말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뉘앙스는 충분히 눈빛에 담아줬다.
"두 사람 다 저 따라 내려오세요."
비어있을 회의실까지 내려가는 동안 우리 세 사람은 단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그리고 소형 회의실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난 두 사람이 앉을 자리를 정해주고 그 둘을 마주본채 다리를 꼬아 앉았다.
"요즘은 유치원생들도 아까와 같은 유치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일하는 회사에서."
두 사람을 데리고 별 말 없이 회의실로 내려온 건 최선의 선택이 맞았던 거 같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한 대리의 흥분은 살짝 가라앉은 상태였고, 문 팀장의 얼굴에 담겨있던 당혹감도 많이 누그러진 듯 해 보였다.
난 테이블 위로 한 대리의 사직서를 올려놓았고 설명을 해보라고 두 사람에게 말했다.
문 팀장은 꿀먹은 벙어리였다.
그에 반해 한 대리는 어떻게 해서든 문 팀장의 잘못을 모두 까발리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 했다.
"프랑스 파견근무 신청 말입니다."
한 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 직원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된 기회 아니었습니까?"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맡고 있는 업무의 경중을 떠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청을 해도 되는 기회 아니었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고요."
"개인이...개별적으로 인사부에 그 신청서를 제출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여기서부터 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야기가 숨어있음을 눈치채게 됐다.
"...그렇죠?"
"하지만 해외 영업부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 문 팀장은 아예 나와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게 무슨..."
"해외 영업부 직원들은 여기 있는 문 팀장에게 파견근무 신청서를 제출했거든요."
"왜요?"
문 팀장은 윗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더 깊게 숙였고, 난 무의식중에 한 대리의 사직서를 봉투에서 꺼내 확인하기 시작했다.
"물론 저희 모두 동의를 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뭘 동의를 했다는 말일까.
"틀림없이 많은 지원자가 나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해외 영업부의 업무에 차질이 생길 거라는 부분을 모두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잠깐, 잠깐..."
난 급하게 한 대리의 말을 막아놓고 문 팀장에게 물었다.
"문 팀장님이 일차 선별을 했단 말인가요?"
"..."
"아니...이거 진짜 깜짝 놀랄 일이네. 도대체 문 팀장님이 무슨 자격으로요?"
흐르는 침묵.
결코 문 팀장에 의해 깨어질 침묵은 아니었다.
"하아...일단 계속 이야기 해보세요."
"저를 비롯해 해외 사업부 시절 때부터 해외 영업부로 이름이 바뀐 오늘까지 계속 근무를 하고 있는 직원들은 다른 영업팀 직원들과는 달리 중국 주재원 근무를 보고 홍성에 입사를 한 케이스가 대부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해외 영업부의 방향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서 다들 조금씩 그 욕심, 혹은 기대를 누르며 출근을 하고 있지만, 누구라도 기회만 찾아온다면 언제든지 주재원 근무를 신청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
"그런데 진짜 놀랍게도 여기 문 팀장님이 팀장을 단 이후부터는 그 기회가 아예 사라져버렸습니다. 현지 법인 쪽에서는 인원이 없어서 쉬는 날도 못 챙겨먹고 있다고 하는데, 조만간 그쪽에선 비자 기간이 끝난 직원 두 명이 본사로 복귀를 해야한다는 이야기까
지 흘러나오고 있는데, 어째서 아직 저희 쪽으로는 현지 법인 보충 인원에 관한 이야기가 한 마디도 안 나오고 있는지가 일차로 의심스러웠고요, 이지혜 씨도 합격을 한 프랑스 파견 근무에 어떻게 우리 해외 영업부 직원들은 한 명도 합격을 하지 못했는지가 2차
로 의심스러웠습니다."
"이야...팀장님 이 부분에 대해서 진짜 해명을 잘 해주셔야겠다."
바톤을 넘긴 내 입이 민망해질 정도로 문 팀장의 대답은 짧았다.
"죄송합니다."
"이게 죄송하다고 끝날 문제는 절대 아닌 거 같고요, 어떻게든 해명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냥 죄송하단 말로 끝내기엔...지금 문 팀장님은 문 팀장님의 단독적인 생각만으로 여러 사람의 직장 생활 목표를 짓밟은 거예요. 제가 분명히 저번 팀장 미팅 때 파견 근
무를 장려해달란 지시...아니, 아니...부탁까지 다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저희에게 했던 말과는 또 다릅니다."
한 대리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문 팀장을 마치 벌레보듯 쳐다보는 그의 눈빛엔 정말 내일이 없었다.
여기서 이 사람은 홍성과 끝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제 속에 있는 말을 다 퍼붓고 회사를 나갈 작정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차장님 선에서 커트가 됐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문 팀장은 서둘러 반박을 준비했다.
"제가 언제..."
하지만 모든 걸 잃을 생각을 하고 있는 한 대리의 광기를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제가 지금 없는 말을 지어서 하고 있는 겁니까? 팀장님,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팀장님 입장 충분히 이해하고, 또 알고도 모르는 척 넘어가주는 것도 한두 번입니다. 차장님. 제 말이 의심스러우시면 나중에 사무실에 올라가서 이한울 씨
랑 김민정 씨한테 한 번 물어보십시오.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님 문 팀장이...하아...사실 그동안 다 알고 있었습니다. 작년 12월에 중국 현지 법인 측에서 주재원 보충인원을 보내달라고 공문을 보냈다는 거."
난 미간을 좁히며 문 팀장을 쳐다봤다.
분명 신청을 받아서 중국 법인이 필요로하는 인원을 맞춰주라고 지시를 했던 사안이다.
하지만 당시 문 팀장은 인원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신청 인원이 안나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내게 물었었다.
그때 나의 대답은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였다.
"그리고 제가 너무 이상해서 양 팀장님한테도 따로 한 번 물어봤습니다."
"...?"
"도대체 저희 해외 영업부에선 다 떨어졌는데, 어떻게 이지혜 씨만 붙었냐고.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현재 지혜 씨가 Kidshub 건으로 기획 1팀의 센터를 잘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QA, 영업 지원팀에서까지 각각 한 명씩 뽑힌 이번 신청에 저희 해외 영
업부에선 한 명도 못 뽑혔다는 게. 그랬더니 양 팀장이 하는 말이 차장님은 절대 커트를 하실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커트를 하기는 커녕, 영업 기획부 전체를 상대로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기 때문에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인원이 해당 파견근무를 신청하길 기
대하고 있는 중이라고요. 이지혜 씨가 그러더군요. 차장님이 직접 지혜 씨 신청서를 가지고 인사부장님과 담판을 지어주셨다고."
난 가볍게 회의 테이블을 두드리며 한 대리의 말을 잘랐다.
"음...한 대리님."
"네, 차장님."
"일단 오늘은 퇴근합시다. 반차 쓰고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제 재량으로 처리를 해줄테니까 일단 오늘은 오후 근무 하지말고 사무실로 올라가서 짐 챙긴 다음 퇴근합시다."
"..."
"그리고 오늘 일찍 돌아가서 쉬면서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세요. 여기서 한 대리님이 더 고발을 하지 않더라도 그 일련의 상황 모두가 머릿속으로 다 그려집니다."
"죄송합니다, 차장님. 이미 마음이 떴습니다."
난 한 대리의 사직서를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하루도 더 못 기다려주십니까?"
"..."
"아까도 제가 물어봤지만, 제가 한 대리님한테 뭔가를 잘못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네."
"그렇다면 저한테도 이걸 어떻게 처리를 해야할지 고민해볼 시간 정도는 주실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일단 오늘은 집에 돌아가서 쉬시고요, 내일 한 대리님 흥분이 다 가라앉은 다음에 조금은 서로가 이성적인 상태에서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저도 지금 갑자기 얻어맞는 상황이라 그런지 지금 이 상황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드네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한 대리님은 올라가서 먼저 퇴근하세요. 그리고 문 팀장님?"
"...네."
"문 팀장님은 잠시 남으세요."
난 한 대리가 보란듯이 상당히 실망스런 속마음을 얼굴에 걸어놓고 문 팀장을 불렀다.
그런 내게 한 대리는 고개를 숙인 뒤 회의실을 나섰고, 문 팀장은 의자를 옆으로 살짝 당겨 나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문 팀장한테 정말 화가 많이 나는데...어디에서 생긴 화인지는 살짝 헷갈리네요.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그걸 떠나서 어디에서 문 팀장한테 실망을 한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아요."
"..."
"일을 이렇게밖에 처리 못합니까? 컨셉이 왜 이렇게 어중뜨는 겁니까? 좋은 사람을 할 거면 확실하게 좋은 사람을 하고, 나쁜 사람을 할 거면 확실하게 나쁜 사람을 하세요. 이도저도 아니고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하니까 부하 직원들 눈에 한 번 정도는 들
이받아도 되는 상사 정도로 비춰지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저를 팔아먹으려면 좀 제대로 팔아먹으세요."
"...!"
"아닌 말로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 중에, 그것도 팀장 정도 되는 샌드위치 포지션에 있는 사람들 중에 차장, 부장 안 팔아먹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회사 한 번 안 팔아먹어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고요. 저는 문 팀장보다 더 많이 장 부장님, 박 이사님 팔아
먹어가면서 거래처 사람들 설득하고 또 부하 직원들이 가진 회사 불만을 잠재웠어요. 그게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난 빽하고 소리를 지른 후 잠시 한숨을 내쉬었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다른 팀 팀장, 팀원들 다 보는 앞에서 그런 우스운 꼴을 당했냐고요. 그것도 무조건 문 팀장 편에 서야 할 한 대리를 상대로."
"..."
"이건 좀 내가 문 팀장의 팀장 역량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이고, 또 실망 모드에 들어갈 수 밖에 없네요."
"..."
"내일 한 대리 출근하면...내가 나서기 전에 알아서 잘 수습해서 저한테 데리고 오세요."
난 그 말과 함께 한 대리의 사직서를 책상 위로 올려놓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