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고작 그런 이유?
이지혜로부터 받은 프랑스 파견근무 신청서를 대신 인사부에 전달하러 내려가는 길이었다.
"..."
엘레베이터 복도로 빠지는 입구에 위치해 있는 해외 영업부 사무실.
그때까지도 난 탕비실에서 이지혜의 블라우스에 커피를 쏟은 한 대리의 사고 아닌 사고에 찜찜함을 느끼고 있었던 거 같다.
탕비실에서 휴게실로 들어가는 문을 열기 위해선 문을 당기는 게 아니라 밀어야 한다.
바꿔 말해 그때 이지혜가 나와 간단한 면담을 끝내고 탕비실로 나가기 위해선 휴게실 쪽에서 문을 안쪽으로 당겨야 했다.
그리고 이지혜가 휴게실을 나서기 위해 문을 담김과 동시에 한 대리는 들고 있던 커피를 이지혜의 블라우스에 그대로 쏟은 것이고.
상식적으로 그런 사고가 일어나기 위해선 한 대리가 그 문에 기대고 있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자세를 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왜 그러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의심많은 나의 추리로는 한 대리가 휴게실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면담을 훔쳐듣다가 그런 사고를 발생시켰다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았다.
보통 휴게실은 어지간하면 문을 닫지 않는다.
붙어있는 탕비실과는 달리 따로 창문이 없는 관계로 환기를 시키기 위해 항상 오픈된 상태로 열려있고, 그래서 탕비실과 이어져있는 휴게실 문이 닫혀있다는 말은 그 안에서 누군가가 회의실을 빌릴 수준은 아니지만 꽤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증거였
고, 보통 우린 그럴 때엔 탕비실에서 볼 일만 보고 최대한 빨리 탕비실을 나와주는 걸 암묵적으로 매너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또다른 의문.
도대체 왜.
양 팀장의 말대로라면 한 대리는 안 팀장처럼 여기저기 낄대 안 낄대 구분을 못하고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식을 다 수집하려 드는 스타일은 아닐 거다.
그리고 보통 휴게실 문이 닫혀 있을 땐 최소 팀장급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증거이기에 더더욱 조심을 하고.
심증 뿐이지만, 한 대리는 휴게실 안에서 나와 양 팀장, 그리고 이지혜가 나누고 있던 이야기를 엿들은 게 분명하고 난 여기서 한 대리의 행동 자체를 잘못이라 생각하기 보단 그저 왜 엿들었는가 궁금했다.
그리고...
엘레베이터 복도로 향하는 동안 파티션 너머로 해외 영업부를 몇차례 쳐다봤는데, 마침 그때 한 대리와 눈이 한 번 마주쳤다.
그리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한 대리는 나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촉이라는 게 있지 않나.
평소 그다지 주의깊게 살피던 직원이 아니었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한 대리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을 했고, 자신이 한 그 행동을 내가 눈치채고 있다는 걸 본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크게 문제 삼을 일은 절대 아니다.
궁금했을 수도 있겠지.
우리가 나누지 못할 말을 휴게실에서 했던 것도 아니고, 또 다른 직원들이 알아선 안될 이야기를 나눴던 것도 아니다.
다만 앞으로는 한 대리를 평소보다는 조금 더 주의깊게 살펴야겠단 생각만 마치 적색 신호가 들어오듯 머릿속에 맴돌았다.
"인사부장님 좀 뵈러 왔습니다."
별도의 개인 사무실은 아니지만, 인사부 사무실 안에서도 별도의 통유리 벽이 쳐져있는 인사부장 자리.
인사부 김유나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부장 자리를 손짓했고, 난 고개를 한 번 까딱거린 후 인사부장 자리로 갔다.
똑, 똑...
문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인사부 일반 사원들 자리와 부장 자리 사이에 반투명 코팅지가 붙은 통유리 벽이 하나 세워져있는 게 전부다.
통유리 벽을 노크한 후 인사부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공 차장."
"시간 좀 되십니까?"
"만들어야지."
"감사합니다."
난 인사부장 앞으로 이지혜의 프랑스 파견근무 신청서를 내려놓았고, 당연히 인사부장이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이지혜의 이력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아, 이지혜...알지, 알고 있지. 그때 왜 박 이사님이 식사 자리에서 정규직 전환을 직접 챙기셨던 친구잖아."
"네, 맞습니다."
"으음..."
인사부장은 다시 한 번 이지혜의 프랑스 파견근무 신청서를 꼼꼼하게 읽어내려갔다.
"파견근무 신청서 많이 들어왔습니까?"
"그냥 딱 예상했던 만큼 들어오고 있는 수준이야. 그리고 아직 몰라. 신청 마감일이 되어봐야 알아."
"신경 좀 써주십시오, 부장님."
난 영업맨 특유의 능글거림을 아주 오랜만에 얼굴에 걸었고, 인사부장은 그런 날 쳐다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나도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대로 하고 있는 거 뿐이야. 위에서 만들어 내려준 신청 자격이지, 우리가 만든 게 아냐. 그리고 그 자격이 합리적이든 비 합리적이든 일단 자격에는 맞아야지."
"에이, 왜 부장님 답지 않게 그런 영혼없는 대답을 하십니까. 저도 고민 많이 해보고 찾아온 겁니다. 결국...저희 영업부에서 몇 명은 빼가실 거 아닙니까?"
"빼가다니...내가 어디 뭐 내 사업 하는 사람인가? 이미 박 이사님이랑 이야기가 끝난 부분이야."
"안그래도 그럴 거 같아서 제가 이사님을 바로 찾아갈까 하다가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서 그냥 부장님을 찾아온 거 아닙니까."
"...?"
"어차피 쁘띠토널은 저희 영업 기획부가 국내에서 핸들링 해야하는 브랜드 아닙니까. 그리고 또 지금 당장은 Kidshub 말고는 국내에 뚜렷한 채널이 없는 상태고."
"어후, 나한테 그런 말 하지마. 내가 영업부 일을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요, 영업부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신청 자격에는 조금 미달이 되지만, 실제 가서 버퍼링 없이 업무를 쳐낼 수 있는 인원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사부장 입장에서도 이게 뭔가 싶었을 거다.
마주치기만 하면 언제 부족한 맨파워 보충을 해줄 거냐고 노래를 부르는 내가 아닌가.
그런 내가 그 맨파워를 지키기만 해도 부족할 판에 영업 기획부 맨파워를 가져가란 말을 하고 있으니, 인사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다.
"원래 Kidshub는 안 팀장이 있는 기획 2팀 프로젝트였습니다. 기획부터 시장 론칭까지 싹 다 안 팀장과 그의 팀원들이 쳐냈었죠. 그런데 아시겠지만, 현재 기획 2팀은 만토바 제품들을 국내 창고에서 핸들링하고 중국 쪽으로 샌딩하는 업무에 집중하고 있습니
다. 결과적으로 양 팀장의 기획 1팀이 그 Kidshub를 안고 가고 있는데, 저희 입장에서도 사실 그렇습니다."
"..."
"결국 쁘띠토널도 Kidshub 안에서 팔아야 하는 브랜드고, Kidshub 없이는 띄우기가 애매한 브랜드인데, 그나마 그 시스템을 알고 있는 사람이 넘어가야 프랑스 현지에서도 그럴 거고, 또 본사에서도 일을 두 번, 세 번 해야하는 수고를 덜 수 있는 거 아니겠습
니다. 이지혜가 현재 영업 1팀 센터입니다."
"아...그래?"
"Kidshub의 브랜드 구성이나 마진, 뭐 또 하다못해 크레딧 노트 비율까지 싹 다 꿰고 있는 직원이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이렇게 신청을 하는데, 사실 여기서 홍성 입사 1년이라는 조건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닌 말로 영업부도 아니고 다른 부서에서 입사
1, 2년차 된 직원들이랑 이지혜가 비교나 되겠습니까? 다른 부서에서 뽑아서 보내잖아요? 그럼 업무 파악이 아니라 영업 관련 자기 적성 파악하는데에만 최소 1년은 걸립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이지혜의 신청 자격만 억지로 끼워맞춘 게 아니라 쁘띠토널을 직접 컨트롤해야 하는 영업 기획부 수장의 파워로 이지혜의 티오를 확실하게 만들어내는데 성공을 했다.
그리고 10일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사내 게시판에 프랑스 파견근무 최종 합격자 명단이 올라왔고, 예상했던대로 그 명단 가장 밑에 이지혜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직접 챙겼던 이지혜 말고는 우리 영업 기획부 직원의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영업 마케팅부에서 한 명이 뽑혔고, 사원급에서 나머지 인원은 QA부와 영업 지원팀에서 각각 한 명씩 나왔다.
그 결과의 이유는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사실 여기서 영업 기획부 소속이 한 두 명 정도 더 나오려면 문 팀장의 해외 영업부 팀원들 말고는 없다.
안 팀장의 기획 2팀은 인원을 뺄 수가 없으니까.
국보급 센터 장향은은 당연히 자신의 적성이 센터이니까 파견 근무에 무관심할 수 밖에 없고, 현재 박기태는 대리를 달기 전부터 안 팀장과 쿵짝이 너무 잘 맞다. 거기다 이제 막 인턴을 끝내고 사원이 된 박보람은 인턴 기간을 포함시킨다고 해도 아예 신청자
격이 안되는 거고.
"하아...씨바, 진짜 말 존나 안듣네..."
사내 게시판 앞에서 그 합격자 명단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평소 입에 잘 담지도 않는 욕지거리가 툭하고 튀어나와 버렸다.
그렇게라도 화를 삭힐 수 밖에.
이 결과를 가지고 문 팀장을 따로 불러 왜 내가 지시한대로 하지 않았냐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닌 말로 왜 팀장인가.
팀의 실적을 올리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 포지션이 바로 팀장이다.
그래서 홍성은 다른 컨트롤 기업들과는 다르게 과장이라는 직위 대신 팀장이라는 직책을 사용하고 있는 거고.
홍성 인터 영업부는 각 팀의 독립성을 상당히 많이 인정해주는 편이다.
그런 문화가 바탕이 되어 있었기에 내가 지난 1년 동안 말도 안되는 성과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래서 난 지금 화를 삭힐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문 팀장을 따로 불러 어째서 해외 영업부에서는 프랑스 해외파견 근무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는 것도 우스운 거지만, 만약 그 질문에 문 팀장이 팀의 실적을 위해서였다고 솔직하게 대답을 하더라도 난 그녀의 결정을 비난할 자격이 없으니까.
더 솔직한 이유는...
비난을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결과가 이렇게 나와 버린 일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할 거 같다는 생각이 더 컸던 거 같다.
담배 한 대로 화를 삭혀본다.
내 지시가 무시당했다는 분함을 지우기 위해선 담배 한 대는 너무 약했다.
"후우..."
정말 별 것도 아닌 게 사람을 스트레스 받게 만드네...
내색하지 말자, 내색하지 말자...
여기에 내 에너지를 다 빼앗기지 말자...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며 사무실로 내려갔을 때였다.
"아, 마침 저기 차장님 오시네요. 고작 그런 이유? 지금 그걸 고작 그런 이유라고 하셨습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제가 지금 이런다고요?"
"한 대리님..."
"그냥 제가 직접 차장님한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난처한 표정의 문 팀장.
그리고 뭐에 그리 화가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사무실에서 보여선 안될 화를 얼굴에 달고 있는 한 대리.
그 소란에 다른 팀원들은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파티션 너머로 해외 영업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란을 숨죽여 지켜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사무실에서?"
난 정색을 하며 문 팀장과 한 대리를 쏘아봤고, 손에 사직서로 예상되는 흰 봉투를 든 한 대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씩씩거리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