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그냥 하는 짓이 얄미워서요
직원들의 프랑스 파견 근무에 관한 팀장 미팅이 있은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양 팀장이 찾아왔다.
1팀과는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업무를 보고 있었기에 어지간한 일로 양 팀장이 내 자리까지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보고서를 제출할 때에나 그 파티션을 돌아 내 자리까지 찾아오지 보통은 파티션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빈 손으로 날 찾아와서는 파견 근무 신청건으로 내게 따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지혜가...자기도 신청을 해볼 수 있는 건지 물어보네요."
양 팀장은 이지혜를 눈짓했고, 이지혜는 분명 양 팀장이 자기 일로 날 찾아온 걸 다 알고 있을텐데도 뭐가 그리 미안한지 모니터 속으로 기어들어갈 것처럼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양 팀장은 이미 어느정도 마음을 정리한 듯 해보였다.
"근데 아시다시피 신청 조건이 안됩니다."
입사일로부터 1년 이상 근무자에 한해 신청을 받고 있는 프랑스 파견 근무.
그 입사일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정규직에 한해 말하는 부분이고, 비록 이지혜가 홍성 밥을 먹은지 1년은 넘었지만 참 더럽고 치사하게도 계약직 기간은 포함을 시킬 수가 없었다.
"안되면 되게 만들어야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모니터에 숨어있는 이지혜를 불렀다.
"지혜 씨."
"네."
"뭘 그렇게 숨어 있어요? 나와요. 커피 한 잔 하자. 양 팀장님도 같이 갑시다."
탕비실 옆 휴게실로 자리를 옮겨 양 팀장과 이지혜를 나란히 앉히고, 그 둘을 마주보고 앉았다.
"사실 저희 팀에서 파견 근무 신청 자격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저랑 차 대리 말고 더 있습니까."
"...그렇죠."
"차장님이 지시하신대로 차 대리한테 생각 있으면 신청 한 번 해보라고 말하고 있는데, 지혜 이 놈이 옆에서 그걸 들었나봐요."
나와 양 팀장은 웃었고, 이지혜는 겸연쩍은 듯 커피가 담긴 종이컵만 손에 들고 조몰락거렸다.
"생전 안 그러던 친구가 어제 뜬금없이 퇴근하고 맥주 한 잔 사줄수 없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양 팀장님 설렜겠는데?"
"설레긴요, 무서웠죠. 팀장 달고 나서부터는 팀원들이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진지한 표정으로 할 말이 있다는 말만 해도 심장이 떨어집니다. 퇴사를 하겠다고 할까봐."
"크크큭...퇴사를 하겠다고 하는 거나, 지혜 씨가 파견 근무를 희망하는 거나 지금 양 팀장님 입장에선 크게 다를 게 없을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요. 그래도 뭐 다행이죠. 차장님이 노! 라고 말만 해주시면 되는 거니까."
"우와...잔인하다. 양 팀장님은 끝까지 천사를 할 테니, 악마는 나더러 해라?"
나와 양 팀장은 이지혜를 앉혀놓고 놀리기 시작했고, 그런 나와 양 팀장의 진심을 모를리 없었던 이지혜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어떻게든 참기 위해 입술을 오물거렸다.
"지혜 씨 멋지다."
진심이었다.
"네?"
"멋지다고. 영업 5팀에 같이 있을 때부터 내가 항상 지혜 씨한테 말로만 응원한다, 응원한다...그랬는데, 사실 말로만 백날 응원을 해주면 뭐해. 안 그래요? 말로만 하는 거, 못할 사람이 어딨어?"
"..."
"고맙네. 결국 내가 진짜 도와줄 수 있게 기회를 줘서."
난 잠시 말을 끊었다가 양 팀장에게 다시 물었다.
"지혜 씨가 빠지면 어떻게 되나요?"
"큰일 나죠."
"푸하하하..."
"아, 진짜로. 웃을 일이 아니라, 큰일 나죠. 고사리 손 하나가 부족한 판에 지혜까지 빠지면 제 입장에선 차,포 다 떼고 장기 두는 거 아닙니까?"
"양 팀장님이 지혜 씨 듣기 좋으라고 일부러 엄살 떨고 있는 거 알고 있죠? 부담 느끼지 마요."
양 팀장은 특유의 장난끼로 이지혜를 향해 눈을 흘겼고, 이지혜는 입가에 미소를 걸어놓고 이리저리 눈치 살피는 시늉을 했다.
"중국 법인에서 4년 주재원 근무 마치고 본사로 복귀할 인원이 두 명이라네요. 내가 책임지고 한 명은 양 팀장님이 데리고 갈 수 있도록 손을 써볼게요."
"중국 법인밥을 4년 동안 먹었다면 최소 대리일 거 아닙니까."
"뭐 어때요, 2팀도 향은이하고 기태 둘 다 대리인데."
"근데 참...지금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 홍성이 진짜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맨파워 관리에 구멍이 너무 많습니다. 팀장 하나에 대리 둘, 그리고 사원 하나 또는 둘...너무 근본이 없는 조직도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대리가 너무 많아졌어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거 같습니다, 이 부분은. 그리고 또 우리 홍성처럼 영업이 메인인 회사에선 종종 생겨나는 조직도이기도 하고요."
"그런 걸 빤히 다 알면서도 인사부가 프랑스 파견 근무 신청을 내부에서 받는다는 것 자체가 코메디죠. 개인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 팀장급에서 무슨 수로 신청을 하겠습니까? 다 뭐 대리급 밑에서 신청을 할 건데, 정작 빠져줘야 할 팀장들은 자리를 지키고 밑
에서만 빠지니..."
"자, 자...우리끼리 불만을 가지고 고민을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그 부분은 더이상 이야기 하지 말고, 일단 지혜 씨."
"네, 차장님."
"안 될 수도 있어요. 알고 있죠? 이 부분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자고요."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될 수 있도록 최선은 다해볼게요."
"...감사합니다."
"내가 봤을 때 뭣도 모르는 인사부가 만든 신청 자격에는...아쉽게도 조금 못 미치지만, 해당 파견 근무에 지혜 씨만한 적임자도 몇 명 없는 거 같거든. 그동안 나크리스 상대로 센터 업무도 줄곧 봐왔고, 또 그 성과가 결코 작지 않았어요. 그런데 우리 약속 하나
만 합시다."
"..."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지만, 만약 운이 좋아 파견 근무를 가게 된다면...거기에선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줘야 해요."
"네."
"난 지혜 씨가 인턴, 계약직으로 홍성에 입사한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양 팀장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고, 이지혜는 입술을 꼬옥 다문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누구 하나라도 예외적인 인물이 하나 나와줘야...그런 예외가 두 번, 세 번 덩달아 나오면서 더이상 예외가 아닌 게 되는 거거든. 인사부 내려가서 신청서 하나 가져와요. 그리고 작성해서 나한테 가져와. 그거 들고 내가 인사부장님이랑 직접 이야기를 좀 나눠
볼테니까."
"감사합니다."
"오케이."
"...?"
"내려가서 신청서 가져와요."
그리고 난 양 팀장에게는 잠시 자리에 남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엄마야!"
"죄, 죄송합니다. 이거 어쩌지, 어쩌지? 안 뜨거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근데 한 대리님 여기 문 뒤에서 뭐하고...계셨어요?"
휴게실 문 바로 밖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이지혜의 음성이 터져나왔고, 뭔가 싶어 고개를 빼어 상황을 살펴보니 해외 영업부 한 대리가 이지혜의 옷에 자신이 들고 있던 커피를 싹 다 쏟아 어찌할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아, 저 그게..."
저기서 뭐하고 있었지? 설마 안에서 나누고 있던 우리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나?
왜?
딱히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눈 건도 아닌데...
이지혜가 재빨리 문을 닫았고, 나와 양 팀장은 각자의 의아함과 의심을 가진채 문 밖의 상황을 이해해야만 했다.
"쩝, 뭐 아무튼."
결국 난 양 팀장에게 따로 남으라고 한 이유를 꺼냈다.
"지금 이 장면은 제가 바란 게 절대 아닙니다."
"뭐가요?"
"사실 이지혜가 욕심을 내줘서 저 개인적으로는 좋긴한데...그래도 이지혜가 저렇게 해보고 싶다는 뜻을 바로 보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거든요. 이지혜 빠지고 나면 빡세지 않겠습니까?"
"지금 뭐 병주고 약 주십니까? 그때 미팅 자리에서는 그렇게 고집을 부리시더니...사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날 미팅 자리에서 좀 많이 놀랐습니다."
"...그런 가요?"
"특히 문 팀장을 상대로 너무 공격적이셨어요."
"..."
"그 미팅 끝나고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평소 안 그러시던 분이 그렇게까지 강성으로 나올 땐 뭔가 이유가 있을 거다. 항상 큰 그림 하나 정도는 그려놓고 판을 짜시지 않습니까."
"고맙습니다. 맨파워도 제일 약한 팀이 현재 1팀인데, 거기 핵심 인원을 선뜻 내어주셔서..."
"저는 그냥 믿는 거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장님이시니까. 그런데 궁금하기는 합니다. 일단 지시하신대로 하고 있기는 한데, 도대체 저희 몰래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이 도대체 뭘지..."
"큰 그림이라고 할 것 까지는 없고..."
난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살짝 적셔놓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어째서 저 문 밖에서, 그것도 이지혜가 문을 열자마자 한 대리와 부딪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시만요."
성격상 찜찜한 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난 최대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까지 다가갔고, 재빨리 그 문을 열었다.
하지만 싱크대 앞으로 서서 얼룩진 블라우스를 씻어내고 있는 이지혜만 탕비실에 있을 뿐, 더이상 한 대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갈아입을 옷 있어요?"
"지우는데까지 한 번 지워보고 안되면 나크리스 샘플로 잠시 갈아입고 근무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대리는?"
"나갔는데요?"
"여기 문 앞에서 뭐하고 있었다고 하던가요?"
"글쎄요..."
"...알았어요."
난 다시 휴게실 문을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뭐 때문에 그렇게 예민하세요?"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냥 기분이 조금 이상하네요. 꼭 한 대리 그 친구가 이 안에서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 것만 같아서..."
"에이...한 대리 그 친구가 뭐 때문에 그러겠습니까? 세상 궁금한 거 천지인 안 팀장이라면 또 모를까, 한 대리는 그런 캐릭터 아닙니다."
"...그래요?"
"네, 한 대리는 묵직한 친구예요."
"하긴 뭐 들어도 딱히 상관없는 이야기긴하죠. 아무튼...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하다 말았죠?"
"큰 그림."
"아...그런 거 없어요. 뭔가를 위한 큰 그림을 그렸다고 하기 보다는 우리 영업 기획부 맨파워 보강에 차선책을 선택했던 거죠."
"...?"
"공문이야 이미 떴고, 직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뉘앙스로 찍어 눌러서 신청을 못하게 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팀원들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신청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현명하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차피 커트는 인사부에서 할 거 아닙
니까. 모집 인원이 차장급 포함해서 4명이 전부인데, 신청한다고 다 합격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우리 영업 기획부에서 파견 인원이 많이 나와줘야...오히려 맨파워 이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이직률이 좀 높습니까? 유럽 파견 근무에 대한 달콤한 유혹정도는 있어야 홍성에 붙어있을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작 공문은 떴는데, 그걸 팀장급에서 신청을 못하도록 뉘앙스로 찍어누르면...반발만 더 커질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그냥 신청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다 신청하게 해주고, 만약 떨어진다면 인사부 면접 결과에 승복하고 또 내년을 노리게 만드는 게 효과적이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긴 회사가 결정한 일, 팀장들이 뉘앙스로 찍어눌러서, 팀원들 반발심을 키우는 것 보다는 그게 더 낫긴 하죠."
"그리고 또 우리 영업 기획부가 자발적으로 인원을 내어주면, 맨파워 요충을 하기에도 훨씬 유리하죠, 다른 부서에 비해."
"...!"
"어차피 파견 근무야 공문에 나온 것처럼 1년, 길어봤자 2년이에요. 파견 근무하고 본사 복귀하면 결국 다 우리 영업 기획부 맨파워 아닙니까. 1년만 고생하면 맨파워가 든든해집니다. 파견근무 신청을 장려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거죠."
"하아...쩝."
"왜요? 왜 갑자기 한숨을 쉬십니까?"
"그냥 갑자기 또 제가 너무 작아 보이네요."
"무슨 그런..."
"근데 그날 문 팀장은 왜 그렇게까지 궁지로 몰았습니까?"
"그건..."
난 닫혀있는 휴게실 문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그냥 하는 짓이 얄미워서요. 내가 그런 말을 꺼내면 가장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현할 거라 예상을 했거든요. 맨파워도 가장 많으면서 말이죠. 그런데 그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 순간 이유없이 얄미워보이더라고요."
"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