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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28화 (128/325)

# 128

무거우면 조금 내려 놓으세요

아로마 솔트 한 스푼.

거기에 라벤더 오일을 한참동안 떨어뜨려서 욕조에 물을 받았다.

탁 트인 전체창으로는 광안대교가 펼쳐지고 있었다.

1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나와 강혜선은 따뜻하게 데워진 욕조 속으로 함께 들어갔고, 우린 와인잔 하나로 와인을 함께 나눠마시며 제대로 된 한 주의 힐링을 시작했다.

난 욕조 속에서 강혜선을 끌어안았고, 강혜선은 와인을 홀짝이며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었다.

"좋다."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리는 의미없는 상상을 하며 난 살포시 그녀의 뒷목에 입술을 붙였다.

녀석들과는 약속대로 9시에 헤어졌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자리였지만, 주말 장사로 평일 장사의 부족한 매출을 채워야하는 광호, 예림이에게 가게문을 아예 닫으라는 무리한 부탁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이젠 적당히 아쉬운 기분으로 헤어지는 게 오히려 소중한 친구들과의 인연을 보호해준다는 걸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지현이 커플과 따로 한 잔을 하기로 이야기를 맞춰놓고 광호, 예림이 가게를 나섰고, 혁재는 가게 앞에서 먼저 택시를 태워 보냈다.

그리고 연이어 도착한 택시에 지현이 커플과 함께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어차피 우리가 잡은 호텔도 해운대였으니까.

지현이 커플과는 조선호텔 뒤편에 있는 더베이101 2층의 야외 테라스에서 마린시티 야경을 감상하며 맥주를 마셨고, 그곳에서 난 강혜선의 대학시절 이야기를 포함해 그동안 내게 내숭 아닌 내숭을 보여왔던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지현이 와이프가 해주

는 고발로 대충 알게 됐다.

조금씩 서로의 비밀, 진짜 모습을 알아가기 시작한다는 게 중요한 거였지, 너무 깊게 파고싶지는 않았다.

"아!"

"간지럽다고."

장난기 가득한 나의 손장난에 강혜선은 내 팔뚝을 제법 강하게 깨물며 인상을 썼고, 난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서 장난을 쳤던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나는 있잖아. 지금이 딱 좋아. 뭔가 이렇게 내 결혼 생활이 안전하게 고정되고 있는 거 같아. 그래서 난 당신만 괜찮다고 하면 부산에 내려오는 텀을 조금 좁혀도 좋을 거 같아."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난...진짜 내가 시댁복이 많이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녀는 종종 그런 말들로 내가 가진 자격지심을 위로해주었다.

"진짜 난 복받았지, 뭐. 설거지도 못하게 하셔, 가끔씩 내려올 때마다 시집살이는 커녕 손님 대접을 해주셔...거기다 난 한 번씩 부산 내려올 때마다 마치 여행을 오는 기분이야. 이렇게 당신이랑 호텔에서 데이트도 즐길 수 있고."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야 고맙고."

"당신이 나한테 고마워할 게 아니라 사실이 그래. 시부모님 자리가 어디 유별나기를 해, 부족하기를 해? 난...이제는 당신이 그 부분에 조금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주길 바라."

"뭘?"

"아까 예림이 언니 가게에서."

"...?"

"주방에서 광호 오빠랑 이야기 하는 거 다 들렸어."

"아..."

"형님네가 있어서 부산에 내려오기가 부담스러운 게 나 때문인 거라면...난 당신이 안 그랬음 좋겠어. 우리가 이렇게 부산에 올 때마다 호텔에서 지내는 것 때문에 형님이나 아영이가 당신 눈치를 본다는 건 어쩌면 당신이 결혼 후에 부산에 더 안 내려오기 때문

아닐까?"

"그럴지도."

"어차피 여기서 상황을 개선시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그런 방법이 있다고 해도...우리 그러지 말자. 당신은 너무 환상 속에 살고 있어. 그냥 난 당신이 우리가 부산에 내려오면 호텔에서 지내는 게 당연하다...그렇게 형님이나 아영이, 당신 가족들

이 생각하게끔 만드는 게 더 현명한 거 같아. 잘 생각해봐. 만약 같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결혼을 했어. 그래서 친정, 시댁 다 서울에 있단 말이야. 누가 부모님 집에서 자? 그런 사람들 없어. 다 인사만 종종 하면서 잠은 자기들 집에 와서 자지, 왜 부모

님 집에서 자? 서로 불편해. 아니, 오히려 당신 부모님 집에 빈 방이 하나 더 있더라도 우리가 거기서 자고 가면 모두가 다 조금씩 불편함을 감수해야 돼.  나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한 번씩 이렇게 부산에 내려오는 게 이젠 조금 기대가 돼. 꼭 마치 주말 여행을

하러 내려오는 기분이야. 세상에 이런 시댁을 가진 복받은 여자가 나 말고 또 있으면 한 번 나와보라고 해."

그날 난 그 호텔 방에서 수 차례나 강혜선을 품에 안았다.

간질간질한 연애 기간이 짧았던 만큼, 우리의 신혼은 서로에게 애틋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애틋한 신혼 속에서 우린 서로의 존재에 대해 항상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비록 신혼집이지만 매일같이 쳐내야 하는 일상이 담긴 그 집에서는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묘한 설렘, 그리고 쾌락.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게 바로 호텔이었다.

로맨틱한 방향제가 스민 호텔 카페트.

그리고 부산에서만 즐길 수 있는 특유의 야경.

거기에 적당한 가격의 와인 한 병을 뜯는 사치 만으로도 우린 서로에게 성적 매력을 평소보다 더 강하게 느끼기에 충분했고, 힐링은 덤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잘난척은 혼자 다 하면서 정작 잘난 짓이 아닌 멍청한 짓만 골라서 혼자 다 하고 있는 나.

이렇게 뜸한 발걸음을 하다보면, 과연 앞으로 내가 부모님들과 한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을까.

아직은 강혜선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앞섰기에, 내게 약점이 될만한 그 부분을 감추기 위해 더 부산에 안 내려왔던 건데, 참 옹졸하다.

위선이고.

난 처가가 숨기고 싶어하는 가정사에 그렇게나 관심을 보이면서 정작 우리 집안 가정사는 강혜선에게 숨기고 싶어하는 게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렇게 다시 또 한 주가 시작됐고, 월화수목금이 이렇게 짧았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때였다.

쁘띠토널의 인수 확정이 발표된 날 인사부는 기다렸다는 듯 사내 게시판에 프랑스 파견 근무 신청자를 모집한다는 공문을 붙였고, 그 공문으로 회사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부서를 막론하고 많은 신입 사원들이 술렁였고, 그들의 부서장들은 그 술렁임을 잠재우기 위해 피터지는 커버에 돌입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고인물들 보다는 신입 사원들에게 더 큰 기회가 될 수 밖에 없는 공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부서를 이끌어 갈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핵심 맨파워를 놓칠 위기에 처해있는 거였고.

"됐어요. 챙기긴 뭘 챙겨. 눈치주지말고 편하게 고민하고 또 결정하라고 하세요. 어차피 본인이 하겠다고 다 파견 근무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 안에서도 다시 면접을 봐야하고 그 면접에 통과를 해야하는 건데, 그걸 해보기도 전에 벌써 팀장 선에서 그 기

회를 막아버리는 건 너무 잔인해요."

하지만 난 생각이 조금 달랐다.

기회를 장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자는 입장이었다.

그게 누가 됐든, 월급 받고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 중 회사를 위해 출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다 자기 자신을 위해 출근을 하는 거지.

우리가 뭐라고.

팀장, 차장이 뭐라고 직원들 개개인의 삶을 컨트롤하려고 들겠나.

남의 인생 대신 살아주고 또 책임져줄 능력도 안된면서 힘들게 고민하고 또 결정한 그 일, 기회를 잡지 못하게 막아서야 되겠나 하는 솔직함이 날 여유롭게 만들고 있었다.

팀장 미팅에서 난 양 팀장과 안 팀장, 그리고 문 팀장에게 프랑스 파견 근무에 한해 절대 쌩뚱맞은 눈치따윈 주지말고 직원들을 격려하고 또 그 기회를 잡고 싶은 사람은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잡을 수 있게끔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편하게 '생각 있음 한 번 신청해 봐. 혹시 또 알아? 운이 좋아서 걸릴지...' 그 한 마디 팀장님들이 먼저 건네주는 걸로도 충분해요.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어주세요. 다들 괜히 신청했다가 못 가게 되면 계속 영업부에 남아 하던 업무를 해야

하는데, 그럴 때 프랑스 파견 근무를 신청했다는 꼬리표가 자신을 역적으로 내몰까봐 그게 두려운 거 아니겠냐고."

내 말에 팀장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봅시다. 나만 지금 홍성 생활 길게 보나? 그렇게 파견 근무 한 번 하고 돌아오면 결국 그 경험을 쌓은 인재들이 나중에 우리 영업부에 날개를 달아줄 건데, 왜 그걸 못가게 막아요?"

"..."

"영업맨들에겐 인맥이 곧 재산이고 무기 아닌가? 왜 그 무기를 똘똘 싸매고 숨기려고만 해요? 활짝 풀어놓고 스스로 갈리도록 기회를 제공해줘야지.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 영업기획부 직원들이 그쪽으로 최대한 많이 넘어갈 수 있음 좋겠는데?"

"하지만..."

"하지만 같은 건 없어요. 문 팀장."

난 정색을 하며 문 팀장을 쳐다봤다.

"...네, 차장님."

"내가 전역을 해도 대한민국 국방부 시계는 잘만 돌아가더라."

"..."

"직원 한 두 명 그 쪽으로 빠진다고 각 팀의 업무에 차질이 생긴다면...그건 팀장들이 제 역할을 잘 못해주고 있는 거예요. 난..."

세 팀장을 차례대로 쳐다보며 말했다.

"만약 여기 계신 팀장님들 중 누군가가 그 파견 근무를 신청한다고 해도 환영. 완전 대 환영. 그냥 내가 조금 더 뛰면 되거든. 조금 더 뛰면서 빈 자리 커버하면 되거든. 그러는 과정에서 또 의외의 인재를 발굴할 수도 있는 거고. 자기 몸 좀 편해보겠다고 팀의 맨

파워를 콘크리트 시키려는 생각은 다들 하지 마세요. 빠지는 사람이 생겨야 또 새로운 인재가 들어오고, 그 인재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또 그 교육을 맡은 사람의 실력이 신입과 함께 성장하는 거니까."

"..."

"왜 다들 자신은 회사에서 프리한 선택을 하길 바라면서 정작 본인들은 부하직원들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 거지? 난 이해를 못하겠네. 한 번씩 이럴 때 보면 문 팀장 좀 이기적이야. 그러지 마요. 왜 그래? 만약 중국 법인이 작년에 그렇게 해체만 안

됐어도 문 팀장 역시 중국 주재원 신청 할 거 아니었어요?"

"...!"

"지금 이게 그거랑 뭐가 달라? 나는 여기 모인 팀장님들이 진짜 팀장 타이틀에 맞는 생각과 욕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일 잘하는 직원, 기껏 키워놓은 직원들이 자기 손을 떠난다고 아까워할 이유가있나? 아니, 사람이 그렇잖아요. 그 팀에 계속 남아있는 게 자

기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면 계속 남아있는 거지. 스스로 판단해서 남게끔 만들어야지, 그걸 선택권도 주지 않고 뉘앙스로 찍어누르겠다고 하면 여기가 군대랑 뭐가 달라? 팀장님들이 그 친구들 승진시켜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월급 올려줄 수 있는 거

아니지 않냐고. 결국 각자도생이에요. 우린 그러지 맙시다, 진짜."

"하지만 차장님. 그건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말씀이신 거고요. 현실은 현재 우리 영업 기획부가 맨파워 대비 떠안고 있는 프로젝트가 너무 무겁다는 겁니다."

양 팀장이 살짝 문 팀장 편에 서서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

"무거우면 조금 내려 놓으세요. 그러면 되잖아요."

"...!"

"무거운 걸 왜 다 짊어지고 가려고 하십니까? 현재 진행하고 계시는 프로젝트가 무겁다는 생각이 드시면 그냥 눈치껏 내려놓으세요. 전 절대 팀장님들한테 힘들게 일하라고 한 적 없습니다. 다들 각자의 욕심, 실적 때문에 그 무거운 짐을 감수하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그걸 왜 꼭 회사가 팀장님들을 푸쉬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시면 됩니다. 회사로부터 가져가고 싶은 만큼만 하시면 되는 거고. 왜 그 팀장님들 개인 욕심을 채우려고 부하 직원들에게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선택권을 미리부터 막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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