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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 1등도 출근합니다-127화 (127/325)

# 127

적시라

부산 수영.

"야, 저거 뭐고?"

"왔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기가 무섭게 주방쪽에서 예림이가 헹주를 들고 홀로 나왔다.

아직은 서로 어색하고 또 약간은 불편한 듯, 강혜선과 예림이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숙여가며 인사를 나눴고, 난 주방에서 가스토치를 만지고 있는 광호를 향해 손을 들었다.

"저거 뭐냐고."

"뭐가?"

계속되는 나의 물음에 예림이가 성가시다는 듯 인상을 쓰며 가게 밖을 내다보는 시늉을 했다.

"판 코리아 나이트 어디갔노?"

"아..."

그래도 판 코리아 나이트라고 하면 부산에서는 메이커가 있는 나이트 클럽이다.

얼마나 오랜 시간 그곳을 지키고 있던 명물 성인 나이트 클럽인가.

부산 사람들, 특히 해수동(해운대구, 수영구, 동래구)의 지리가 익숙한 사람들에게 판 코리아 나이트는 수영, 민락동 근처에서 잡힌 약속 장소를 설명할 때 일차 기준이 되는 곳이고, 또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설명할 때에도 "판 코리아 앞으로 가주세요." 그 한

마디면 끝이나는 곳이다.

그런 판 코리아가 몇 달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물론 우리 세대가 갈 만한 나이트 클럽은 아니다.

최소 40대 이상, 그 위 연령들이 즐겨 이용하는 나이트 클럽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던 게 갑자기 사라져버리니 난 마치 나의 어린 시절을 도둑맞은 것만 같았다.

정말 영원한 건...있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요즘 뭐 돈 좀 있는 사람들이 대로변에 있는 오래된 건물들을 가만히 놔두나. 틈만 나면 다 때려부수고 새 건물 높게 올리가 월세 장사 할라카지. 오피스텔 올라간다카지, 아마?"

"보니까 그렇데. 앞에 사진 붙여놨더라. 우와...저게 무너지나. 진짜 세월 무상하다, 무상해."

"부순다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다."

"진짜가?"

"장사 안한지도 꽤 될껀데? 자기야."

예림이는 광호를 불렀다.

하지만 광호는 가스토치를 만지느라 예림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고.

"자기야?"

빨리 대답을 해야할 건데...

광호가 두 번 다 대답을 하지 않자, 결국 예림이는 강혜선이 앞에 있음에도 빽! 하고 자기 성격을 드러내버렸다.

"야!"

"어, 어. 왜, 왜...왜?"

광호가 화들짝 놀라며 가스토치를 내려놓고 대답을 했고, 예림이는 자기 남편 보다 더 화들짝 놀란 강혜선에게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언제부터 판 코리아 나이트가 영업을 하지 않았느냐고 광호에게 물었다.

정말 별 것도 아닌 걸로 꼭 저렇게 언성을 높혀야하는 것일까.

하여간 재밌는 커플이다, 이 커플도.

"작년 여름 끝나고부터 장사 안했다이가."

"맞제? 그쯤 됐제?"

"어. 뭐 더 물어볼 거 있나?"

"없다."

"그람 내 이거 계속 해도 되나?"

"어, 빨리 해라. 애들 배 고프긋다."

"고맙다."

결국 강혜선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리고 난 강혜선에게 '거 봐, 내 말이 맞지? 돌아이라니까...' 라는 뜻을 담아 예림이, 광호 커플과 강혜선을 번갈아쳐다봤다.

강혜선은 예림이가 무척 조신하고 또 여자여자한 스타일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다.

물론 강혜선이 천하의 말괄량이 예림이를 여자여자한 스타일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 너무나 당연한 거고.

일단 예쁘게 생겼다.

그리고 천상 여자의 트레이드 마크인 긴 생머리고 또 거기에 강혜선은 예림이를 두 번 다 결혼식장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있는 것만 봤으니까.

예전에 강혜선에게 우리 친구들 모임의 진짜 리더가 예림이라고 말하자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비록 지금은 다들 나이 먹고 사는 게 바빠서 내가 부산에 내려갈 때에만 다같이 뭉치기 때문에 내가 이 모임의 리더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 우리 모임의 진짜 리더는 누가 뭐라고 해도 예림이다.

"배 많이 고프지요?"

"아니요, 괜찮아요."

"조금만 앉아 있으세요. 근데 지현이 이 새끼는 엎어지면 코 닿을데 사는 놈이 아직 안오고 뭐하노?"

"됐다, 됐다. 전화하지마라. 나온다카더라."

"아이고, 아저씨요. 아직 지현이를 모릅니꺼? 이제 나온다캤으면, 진짜 나오는게 아이라 이제 나올 준비를 한다는 말이거든요. 20년 넘게 당하면서 아직 그 말을 믿소? 얼른 전화해서 쪼아라. 늦게 오면 먹을 거 없다고."

"천천히 해라, 천천히. 혁재도 퇴근하고 올라면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다이가."

"그때까지 우째 기다릴래? 혁재 오기 전에 우리끼리 1차 끝내놓고 있어야지."

"천천히 하자, 천천히..."

나는 성격상 전화를 해서 상대를 재촉하는 걸 잘 못한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는 그게 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건데, 원래 난 그런 걸 잘 못하는 성격이다.

예림이에게 알았다고 말만 해놓고, 난 강혜선을 홀 한 쪽 테이블에 앉아 있으라고 한 다음, 가스토치질을 시작한 광호에게 다가갔다.

"미끄럽다, 조심해서 들어온나."

주방 입구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광호가 다급하게 주의를 줬다.

"어디 장사 원박 투데이 하나."

"오늘은 특히 미끄럽다. 방금 참치 대가리 거기서 장만했거든. 조심해서 온나, 조심해서."

"알았다, 알았다. 아따...냄새 좋고..."

홀에서는 예림이가 강혜선과 마주보고 앉아 특유의 친화력을 뽐내고 있었다.

"요즘 와 이렇게 안 내려오노?"

광호는 여전히 토치질에만 집중을 하며 물었고, 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정체불명의 뭔가에 시선을 고정시킨채 대답을 고민했다.

"일이 많이 바쁘나?"

"아이다, 그런거."

"그런데 와 이리 뜸하노? 암만 못 내려와도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내려오던 놈이 장가 간 이후부터는 어디 서울에 꿀을 발라놨나, 내려올 생각을 안하노."

"흐흐흐..."

"웃기는...결혼 생활은 할만하나?"

광호는 참 무뚝뚝하다.

나도 참 무뚝뚝한 편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광호를 보고 있으면 난 무뚝뚝한 편도 아니다.

무뚝뚝한데...진짜 진국이고 또 호인이다.

그게 내 하나 밖에 없는 여자 사람 친구의 남편, 광호다.

꼭 보면 형님 같다.

동갑에 생일도 나보다 몇 달 늦는 놈인데, 하는 거나 마음 쓰는 걸 보면 꼭 나보다 서너 살은 많은 형님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난 무뚝뚝한 광호 옆에서 그 놈이 하는 잔소리를 듣는 걸 참 좋아한다.

"우리도 우리지만, 부모님들 서운해하시겠다. 제수 씨 데리고 좀 자주 내려온나."

난 홀에서 예림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강혜선을 살짝 훔쳐본 다음 목소리를 낮춰 광호에게 말했다.

"내려오면 뭐하노."

"..."

"집에 잘 방이 없는데."

"...!"

잠시 멈칫했던 광호는 다시 토치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꼭 잠을 집에서만 자야되나."

"눈치 보인다. 내 혼자 있을 때야 고마 거실에 이불 깔아놓고 자면 됐는데, 와이프 델꼬 그랄 수는 없는 거 아이가. 그렇다고 내려 올 때마다 호텔로 가자니까 또 누나하고 아영이가 내 눈치를 보더라고."

"흐음..."

"그냥 원래 집에 방이 없어서 호텔에 가는 거 하고, 우리집처럼 누나 가족들이 들어와 살아서 방이 없어진 거 하고는 그 느낌 자체가 조금 다르거든."

"그렇겠네."

"호텔에 가서 자는 걸로 누나하고 아영이가 내 눈치만 안보면 나도 예전처럼 집 사람 데리고 종종 내려올낀데, 참 이게 가족이 뭔고...그게 내 맘처럼 잘 안되네."

"쩝...그렇네. 느그 집 사정 빤히 다 알면서도 내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해뿠네."

"뭐 다 그렇지, 뭐..."

"아영이 그거 인자 제법 많이 컸제?"

"아가씨다, 아가씨. 인자는 마 안아보지도 못한다. 근데 이거는 뭐고? 니 지금 뭐 굽노?"

"참치 아가미라고 이름은 들어봤나?"

"아가미?"

"살 부분은 요렇게 따로 횟감으로 장만해놓고 요 껍데기하고 뼈 부분은 보면 딱히 먹을 게 없어 보이는데, 바싹 구워놓으면 기가 막힌다. 이거 한 번 맛들이면 그 다음부터 장어는 못 먹는다."

"진짜 별 거를 다 한다. 이거 회 뜬 거도 니가 뜬 거가."

"그냥 대충 잡히는데로 썰어놓은 거다."

"참, 희한하다니까.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웠노?"

"내가 배울라고 배운 게 아이고, 일전에 혁재 인마가 어디서 이걸 구해 왔더라고."

"혁재가?"

"어. 자기 손님이라면서 누굴 한 번 델꼬 왔데. 근데 그 사람이 이걸 이렇게 해서 먹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더라고. 근데 일반 참치집에서 이렇게 장만을 해주겠나, 어디. 이걸 가지고 와가꼬 내한테 장만을 좀 해달라고 하는기라. 생각보다 쉽다. 맛도 예술이고.

자, 하나 먹어봐라."

투박한 손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참치 아가미 부위 하나를 내 입에 넣어주는 광호.

그냥 생 와사비를 조금만 올려서 씹었을 뿐인데, 아가미에서 이런 육즙이 터져나온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쫄깃하고 또 달큰한 맛이었다.

"기가 막히제?"

"크흐..."

난 광호에게 엄지를 세우며 메뉴로 만들어서 팔아도 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혁재 인마, 이거는 요즘 좀 어떻노?"

"힘들다, 요즘에."

"그렇제? 안그래도 그럴 거 같더라. 골프채 중에 일본 메이커 아닌 게 어디에 있노. 시국이 시국인지라 힘들 거 같긴 하더라. 근데 직접 물어보기도 좀 애매하고."

"아이다. 장사는 그런대로 되는 거 같더라."

"진짜?"

"어데 뭐 골프 치는 사람들이 그런 거 크게 신경 쓰겠나? 물론 조심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타격이 클 정도는 아닌 모양이던데?"

"그래? 근데 뭐가 힘들단 말이고?"

광호는 홀에 있는 예림이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제수 씨하고 조금 안 좋은 거 같더라."

"와?"

"이게 부부 관계라는 게 한쪽 말만 들어서는 절대 모른다. 제수 씨 이야기를 들어보기 전까지는 제 3자가 이렇다 저렇다 판단을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되는 거 아니겠나."

"그야 그래도...와? 혁재가 뭐라던데?"

"일단 혁재가 하는 말만 들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

"처가에?"

"혁재도 마음이 약해서 큰일이다. 안 될 거 같으면 딱 해 줄 수 있는 만큼만 해주고 선 긋고 치아뿌야 되는데, 맨날 툴툴거리면서 다 갖다바치고...혹시라도 닌 그냥 아무말 하지말고 가만히 있어라이."

"내가 뭐라고 할끼고."

"나중에 오면 자세히 봐라. 혁재 그노마 탈모 심하다."

"머리 빠지고 있나?"

"없다, 여기 이 부분은. 옆 머리 길라가 그걸로 가리고 다닌다이가."

"진짜?"

"돈을 제법 벌고 있거든, 혁재가. 들어보니까 골프채 이게 중고 거래가 많은 거 같더라고."

"중고?"

"왜 혁재 개인 단골이 있을 거 아이가. 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이겠지. 그런 사람들은 골프채를 수시로 바꾸는 갑데. 근데 그걸 개인적으로 인터넷 같은데 올리는 게 아니라 그냥 혁재한테 갖다주면서 얼마 정도만 받아달라고 하는 갑더라고. 그라면 그걸 가지고 혁

재가 지 아는 루트에다가 갖다 파는 거고. 아닌 말로 백만 원만 받아달라고 했는데, 혁재 인마가 120만 원에 팔아뿌면 20만 원은 자기가 먹는 거지. 또 팔아주면 팔아줬다고 10퍼센트 정도 용돈을 따로 챙겨주는 갑던데...그렇게 돈을 제법 벌고 있는데도, 힘든 갑

더라."

"하이고, 우리집이나 그 집이나...어디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네."

"푸훕..."

"느그는? 느그는 괜찮나?"

"우리야 뭐 맨날 똑같지."

"근데 지현이 이 새끼는 진짜 와이리 안오노?"

진짜 당혹스럽게도 내가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가게 출입문이 열리며 지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드디어 강혜선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어났다.

마침내 자신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자기 인맥의 등장으로 강혜선은 미소를 얼굴에 걸었다.

"야."

"네, 언니."

어느새 예림이는 지현이의 와이프까지 확실히 잡아놓은 상태였다.

자기들끼리 몇 번의 만남이 따로 있었던 듯, 예림이는 지현이의 와이프에게 아주 편하게 하대를 하고 있었고, 예림이에게 비비고 들어오는 지현이 와이프의 행동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집도 바로 뒤에 살면서 서울에서 내려오는 사람들보다 늦게 온다는 게 말이 되나?"

"저 이제 일마치고 바로 오는 길이에요."

"아...니 오늘 일했나?"

"제가 하는 일에 주말이 어디에 있어요? 내가 오빠한테 먼저 가서 만나고 있으라고 말을 했는데, 옷만 잠시 갈아입고 나오려고 퇴근하고 집에 갔더니, 이렇게, 이렇게...씻지도 않고 소파에 누워서 자고 있더라."

영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자기 남편의 복장을 지적하는 동생의 모습에 예림이는 지현이를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흘렸다.

"딱 30분만 자고 일어날라캤는데, 눈 떠보니까 5시데."

"자랑이다."

혁재가 왔을 땐 8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어딘가에서 한 잔을 하고 온 듯 했다.

일 때문에 퇴근을 하고도 개인 손님에게 잡혀서 저녁 접대를 해야했고, 술이 빠질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혁재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혁재의 지금 모습이 우리의 어제였고, 또 내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 서른 중반 줄에 들어선 우리 친구 모두는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아...내 인자 왔다. 인자 은태하고, 지현이하고...인자 만났다."

혁재의 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딱 봐도 제수 씨의 전화인 듯 했다.

혁재는 모든 걸 채념한 듯 숨을 못쉬겠단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막 일 끝내고 친구들을 만나러 왔다고.

그리고 오늘 이 모임은 이미 며칠 전에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도대체 퇴근을 몇 시에 했는데, 이제야 친구들을 만났냐고 제수 씨가 물어본 모양이다.

친구들이 다 있는 앞에서, 더군다나 광호는 그렇다치더라도 친구들의 와이프까지 다 있는 자리에서 혁재는 그간 쌓여있던 화를 참지 못하고 전화기에 대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까지 돈 벌다가 이제 왔다고!"

"..."

싸해지는 분위기.

광호는 안주가 영 부실하다는 핑계로 주방으로 들어갔고, 예림이는 냉장고로 가서 대선 소주 두 병을 꺼냈다.

그리고 강혜선과 지현이의 와이프는 입술만 오물거리며 싸해진 분위기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하다. 그래, 알았다, 알았다. 내가 죽일 놈이다. 그래, 알았다. 지금 갈게. 조금만 있어라."

힘 빠진 모습으로 통화를 끝낸 혁재는 자기 앞에 놓인 소줏잔을 단박에 비워버린 후 강혜선과 지현이의 와이프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미 모두가 조금씩은 취한 상태였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데이. 내 먼저 가봐야 될 거 같다. 괜히 내 때문에 오랜만에 친구들 다 모인 자리 분위기만 조지고...이거 참..."

"니가 뭐시 그래 미안하노!"

음료 냉장고 앞에서 예림이가 소리쳤다.

"열심히 사는게...니만큼 열심히 사는 놈이 어딨노. 그렇게 죽을똥 살똥 사는 게 뭐시 그리 미안한기고. 이 새끼 이거는 술만 쳐먹으면 미안하단 말이 이제 자동이다, 자동이야."

광호가 예림이를 툭하고 건드리며 그만하라고 말렸지만, 예림이는 필요이상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며 한 마디 덧붙였다.

"돈 벌 때만 해라, 그 미안하다는 말. 멋대가리 없이 친구들한테까지 죄인 코스프레 하지말고."

예림이가 살짝 도를 넘는 순간, 그럼에도 우리 친구 모두는 예림이의 기분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됐다, 그만해라. 선 넘지 마라."

광호의 손을 뿌리치며 예림이가 말했다.

"내가 그렇게 며칠 전부터 미리 전화까지 안 했나. 오늘 서울서 은태하고 은태 와이프 우리 보러 내리온다고. 우리도 하루 장사 접고 가게 비워 놓을테니까, 좀 귀찮더라도 애들 데리고 와서 같이 놀자고. 불편하겠지. 애 키우는 입장에서 나오기 싫을 수도 있지.

근데 내가 어디 뭐 진짜 애 데리고 와서 같이 놀자고 그런 말을 했겠나. 니 남편 오늘 우리가 좀 빌리겠다는 거 그렇게 돌려서 말한 거 아이가. 우리가 어데 맨날천날 그라나?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 혁재 애 태어나고 거진 6년, 7년 만에 처음이라고. 우리가 먼저

술 한 잔 하자고 한 게. 그라고 지금 도대체 몇 신데? 8시 밖에 더 됐나. 우리가 어디 날이 새도록 지 남편 잡고 있겠나. 다 내일 가게 문 열어야 되는 사람들이고, 또 주말 없이 일하는 사람들인데. 또 간만에 부산 내려와서 가족들하고도 시간을 보내야 되는 사람들

인데. 어련히 시간 맞춰서 집에 안 돌려보낼까..."

결국 광호가 예림이를 데리고 주방으로 들어갔고, 혁재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가게를 나섰다.

지현이가 그런 혁재를 따라붙었고.

"혁재 장인 돌아가셨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줬노?"

다시 주방에서 예림이의 악다구니가 들려왔다.

"문상 올 손님 별로 없다고 와서 자리만 좀 채워주다 가라고 해서 우리 다같이 창원 내려갔다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 장지까지 따라가줬다."

"어허이...고마해라. 애 혼자 키우고 하다보면 그랄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애고. 갓난 아기가?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간다."

"고마 안하나, 진짜! 평소 안 그라던 놈이 오늘따라 와이리 오바를 하노!"

"내가 언제는 뭐...뭐라고 입이나 떼더나?"

"됐다, 됐다...힘 빼지 마라. 사람이 다 다른기다."

그렇게 주방에서 광호가 예림이를 진정시키고 있을 때였다.

쾅!

가게 문이 열렸고, 그 앞으로는 뭔가 단단한 결심을 만들어 낸 혁재가 서 있었다.

"그래, 씨바...오랜만에 친구들 다같이 한 잔 묵자. 오늘은 나도 모르긋다."

진짜 그러면 안되는데...난 이상하게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웃겼다.

그게 뭐라고 저렇게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등장을 했을까.

그리고 예림이 저건 왜 또 저렇게 만족스런 표정으로 혁재를 바라보고 있을까.

강혜선과 지현이의 와이프는 여전히 살짝 얼어있는 표정으로 예림이의 눈치를 살폈고, 갑자기 지현이가 크크큭...거리더니 박장대소를 했다.

"푸하하하..."

"크크큭..."

다시 홀로 나온 예림이.

예림이는 광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혁재 먹을 안주 없다. 장어 좀 구워라."

"알았다."

그리고 혁재에게 말했다.

"집에 전화는 해주라."

"됐다. 전화하면 싸우기밖에 더 하겠나. 고마 꺼놨다."

"싸우더라도 전화는 해주라. 그라고 남자가 말 싸움 좀했다고 전화기 꺼놓고 그라지 마라. 딱 꼴보기 싫다. 기다리는 사람 걱정한다. 많이도 말고 딱 장어 1키로만 먹고 가라. 느그 먹일 거라고 며칠 전부터 참치 장만하고 다 했는데, 일 때문에 늦게 와서 니는 참

치 맛도 못 봤다이가. 금방 해줄테니까 장어 가지고 배라도 채우고 가라."

혁재가 밖에 나가서 통화를 하는 동안, 예림이는 술 상을 다시 세팅했다.

그리고 장어를 장만하기 시작하는 광호를 향해 혁재 와이프 몫은 도시락으로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혁재가 돌아왔고, 벽에 걸린 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예림이가 말했다.

"딱 9시까지만 최선을 다해서 마시자. 자, 술 따라라. 술 잔 들고...적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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