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공 차장 양심 없다고
검은색 벤츠 비토 승합차량 한 대가 호텔 로비 앞에 서 있었다.
기가 막힌 날씨.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완벽한 날씨였다.
링겐 측에서 보내준 승합 차량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검은 차량 옆구리 쪽으로 링겐 아웃렛을 상징하는 노란색 스티커 로고가 붙어 있었고, 다행히 우리 일행을 픽업 나온 인물과 장향은은 서로 일면식이 있는 듯 해보였다.
승합차 문은 자동으로 열렸고, 손이 민망해진 호텔 직원에게 상무보의 여비서는 미리 준비해 놓은 20유로짜리 지폐 한 장을 팁으로 건넸다.
치마 정장을 입은 두 여성을 배려하기 위해 나와 상무보가 먼저 승합차량 안으로 들어갔고, 이동 중에도 회의가 가능하도록 두 좌석씩 마주보고 앉을 수 있게 세팅된 고급시트 중앙엔 접이식 테이블이 놓여져 있었다.
"우리도 이런 거 한 몇 대 주문하면 좋을텐데...이런 차도 리스가 되나?"
뜬금없이 차 내부를 훑어보며 상무보가 말했다.
양쪽 팔걸이를 슥슥 만지더니 가죽 촉감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예전에 만토바에서 창고 사장님들 한국에 오셨을 때 말이에요. 그때 이런 차 두 대 정도만 미리 세팅이 되어 있었어도 좋았잖아."
도대체 누구를 상대로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나? 아님 자기 비서?
상무보의 비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걸로 봐선 꼭 내가 상대를 해줘야 할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중요한 파트너를 공항 픽업할 일이 있을 땐 이런 차량이 좀 더 품격이 있어 보이긴 할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이. 이 부분 체크 하나 해줘요. 나 또 한국 들어가면 까먹어."
"네."
여비서가 재빨리 스마트 폰을 꺼내 상무보의 지시 사항을 입력하고 있을 때였다.
웅-웅-웅...
진동음이 울렸고, 상무보는 벨루티 서류 가방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액정에 뜬 수신자를 확인했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상무보.
현지 시각 오전 9시 50분.
서울은 오후 4시 50분.
"네, 전화 받았습니다. 네, 네. 지금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누굴까.
좁은 공간 안에서 그것도 마주보고 앉아 있어서인지, 이상하게 상무보와 통화중인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네? 그렇게나 갑자기요? 음...네, 네. 뭐 우리 입장에선 갑작스럽긴 해도 잘된 거 아닙니까?"
상무보의 얼굴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지는 순간, 차 안에 있던 우리 모두는 숨 소리조차 마음놓고 내지 못했다.
"음...일단 알겠습니다. 그렇게 푸쉬한다고 될 부분은 아닌 거 같고요, 공 차장 네고하는 거 옆에서 지켜보다가 상황 봐가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피곤하시겠습니다? 네, 네...네.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잠깐이었지만, 내 이야기가 나왔었다.
출장을 온 상무보에게 나의 존재를 거론하며 연락을 할만한 인물을 재빨리 머릿속으로 떠올려봤다.
몇 명 안된다.
기껏해서 사장님, 전무님 정도?
하긴 이문 본부장님일 수도 있겠다.
서류 가방 안으로 스마트 폰을 다시 넣어놓고 상무보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신경이 쓰일만한 일이 생긴 듯 했다.
장향은은 물론이고, 그의 비서 역시 상무보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날씨 진짜 좋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통화 중간에 제 이야기가 잠시 나오는 거 같아서요."
"으으음...별 일 아니에요. 신경 쓸 거 없어요."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장 부장 정도만 됐어도 어떻게든 물어봤을 건데...
상무보는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고, 난 그런 상무보를 몰래몰래 몇 번 정도 훔쳐보다가 그가 던진 차창 밖으로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래.
신경 쓰지 말라는데, 뭐하러 신경을 쓰겠나.
"여기 이렇게 각 매장마다 브랜드 로고를 사용하지 않고 링겐 아웃렛 자체 로고를 사용한다는 게, 링겐과 다른 일반 아웃렛과의 차이입니다."
도착한 링겐 아웃렛.
미팅에 들어가기 앞서 상무보를 모시고 아웃렛을 한바퀴 돌았다.
"그렇네. 공 차장이 말해주기 전까지는 뭐가 조금 이상하단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게 뭐였는지 잘 몰랐어요. 진짜 브랜드 로고가 하나도 없네? 브랜드 스펠링을 그대로 갖다 써도 폰트가 오리지날 폰트랑 다 달라. 매장도 싹 다 똑같이 생겼고..."
"그냥 이렇게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여기 링겐은 아웃렛 전체가 하나의 편집샵 개념이라고."
"아..."
"브랜드 측에서 편집샵 개념의 사업장에는 자신들의 로고 사용 허가를 해주지 않죠."
"규모가 이정도인데, 이걸 과연 편집샵이라고 볼 수 있는 건가?"
"규모와는 상관없이 재고 관리 형식에 따라 아웃렛이냐 편집샵이냐로 구분이 된다고 보시면 되는 거죠. CGM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루가노 폭스타운의 경우는 여기 이곳 링겐이나 만토바처럼 그들이 직접 브랜드를 받아서 도매, 소매를 하기 보다는 한국의 첼
시 아웃렛이나 롯데 아웃렛처럼 브랜드 측으로 자리 제공을 해주고 거기서 올라오는 매출의 퍼센테이지로 운영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폭스타운이 그래요?"
"네, 폭스타운 자체는 그렇습니다. 대신 CGM의 지분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상당 부분의 브랜드가 CGM을 한 번 거쳐서 들어가는 거죠. 홍성이 폭스타운에서 물건을 사입하는 경우에도 폭스타운 담당자가 나오는 게 아니라 CGM 소속의 담당자가 나옵니다."
"아하! 안 그래도 그 부분이 항상 헷갈렸어. 사입을 하러 폭스타운에 간다고 하긴 하는데, 들어오는 인보이스를 보면 항상 CGM이더라고."
"그 부분은 직접 사입을 하러 다니는 영업부와 인보이스를 처리해주는 재무부가 아니라면 홍성 안에서도 그 개념을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링겐 측과의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캐주얼한 그네들의 비즈니스 스타일.
우리 일행이 약속 시간보다 먼저 도착해 아웃렛을 둘러보고 있다는 걸 전해들은 그쪽 담당자는 사무실에서 우릴 기다리는 것이 아닌 직접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상무보와 상대를 서로 소개시켜준 뒤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으며 그곳 담당자의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미스터 공. 혹시 미스터 바우만과 일면식이 있으십니까?"
그게 누군지 난 모르지.
사실 Kidshub 건으로 링겐과의 거래 물량이 커진 것 뿐이지, 그 전까지 홍성은 주로 만토바 아니면 폭스타운을 이용해 사입을 해왔었다.
내가 팀장을 달기 전까지만 해도 링겐과의 교류는 크게 없었고, 또 차장을 단 이후부턴 안 팀장과 그의 팀원들이 직접 교류를 해왔기에 난 링겐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게 바로 1팀의 차 대리가 아닌 장향은을 이번 미팅에 동행시킨 이유이고.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옆에서 장향은이 미스터 바우만이라는 사람의 정보를 흘렸다.
"여기 이곳 GM(General manager - 총괄 책임자) 입니다."
장향은의 귀띔에 고개를 끄덕인 후 난 아직 그와는 일면식이 없다고 대답했다.
"홍성에서 디렉터가 직접 저희 링겐을 방문하신단 이야기를 듣고 미스터 바우만이 그럼 저희 쪽에서는 마땅히 자신이 직접 환대를 해야하지 않겠냐고 하시더군요."
난 상무보의 표정을 살폈고, 상무보는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유창한 영어 솜씨로 상대에게 직접 대답했다.
"급하게 저희 일정에만 맞춘 방문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짝 충격을 먹었다.
이건 진짜배기 영어였다.
나처럼 대학 시절 죽어라 토익 공부만 하다가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오고, 거기서 간신히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고 홍성에 입사한 뒤 서바이벌 식으로 탄력을 받은 영어가 아니라 진짜배기 영어.
상무보의 영어 실력에 당황을 한 건 비단 나 뿐만이 아니었다.
장향은은 물론이고 그의 비서 역시 살짝 당황하는 눈치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전. 이곳 총책을 맡고 있는 바우만 혼스입니다."
약속 장소에서 만난 링겐 아웃렛의 총 책임자.
정말 유럽 애들 감각은 따라잡을 수가 없다.
나이는 못해도 50 중반.
하지만 멋스럽게 기른 히끗히끗한 턱수염이나 발목까지 떨어지는 검은색 정장 바지 밑으로 받쳐신은 발렌티노 스니커즈, 품이 넉넉한 흰 셔츠를 벨트 없이 바지 속으로 넣어 입고 있는 바우만의 모습은 마치 세련된 중년 남성복 브랜드의 메인 모델이라고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공."
"반갑습니다."
그는 장향은과 상무보의 비서와도 차례대로 악수를 나눈 다음 우리 일행을 회의 테이블로 안내했다.
바우만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다리를 꼬으며 몸을 살짝 틀어 회의 테이블 위로 자신의 왼쪽 팔꿈치를 올렸고, 또 두 손을 깍지꼈다.
상무보 역시 서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다리를 꼬아 앉았다.
그리고 바우만과는 살짝 다르게 꼬은 다리 위로 두 손을 살포시 포개었다.
꼿꼿하게 세운 허리.
그런 상무보의 모습에서 상대에 대한 부담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나도 그냥 다리를 꼬아버렸다.
즐기는 거지 뭐.
어차피 이 판은 내가 주도를 해야 하는 판이다.
주도권을 상대에게 빼앗겨서도 안되고 상무보에게 떠넘길 수도 없는 판.
그런 내가 주눅이 들어서야 되겠나.
그 상대가 거래 업체 총책이든, 상무보든...
"슈퍼..."
슈퍼.
유럽 애들(내가 아는 유럽애들이라고 해봤자 패션 업계 관계자들 뿐이지만)과 사업 이야기를 하다보면 슈퍼라는 표현이 참 많이 나온다.
그레이트, 엑설런트라는 표현이 나올 법한 장면에서도 간단하게 슈퍼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바우만 역시 슈퍼라는 표현으로 홍성이 한국에서 만토바를 앞세워 CGM을 쳐바른 사건을 대단하다고 표현했다.
"CGM의 한국 진출 실패는 작년 한 해 업계 최고의 이슈 중 하나였죠. 그렇지 않아도 홍성과의 관계에 좀 더 집중을 하라는 지시를 내려놓은 상태였는데, 이렇게 디렉터 분이 직접 방문을 하신단 연락을 받고 급하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여기 있는 미스터 공의 작품이었죠."
상무보가 내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순간, 난 그 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휘둘러야 할지 각도를 재기 시작했다.
"슈퍼...정말 아무도 예상을 못했던 반격이었어요. 과연 누가 저 고삐풀린 CGM의 발목을 잡아줄지 항상 기대만 하고 있던 중이었죠. 만토바야 건드리지 않으면 움직임이 없는 친구들 아닙니까.""
"그런 만토바도 중국 시장을 혼자 다 먹지는 못합니다."
내가 상대를 향해 칼날을 겨누는 순간 상무보는 눈알만 굴려서 바우만의 반응을 효과적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희 홍성은 만토바가 남길 수 밖에 없는 중국 파이를 CGM이 주워먹기 하는 걸 가만히 지켜볼 마음이 없고요."
바우만은 손가락을 튕겼고, 기다리고 있던 직원에게 커피부터 준비를 해달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막는다고 해도 중국은 컨트롤이 가능한 시장이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완전 봉쇄는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그쪽에서 직접적인 사과와 함께 딜을 걸어오기 전까지 저희 홍성은 저희 나름대로 꾸준한 공격을 할 생각입니다."
"사과라...이쪽 바닥 사업이라는 게 어차피 결국은 치킨게임이 될 수 밖에 없는 바닥인데, CGM이 홍성에 사과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요?"
"저희는 그걸 받아야만 이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재밌군요."
"스타일이 다른 거니까요."
"존중합니다."
"만토바가 남길 수 밖에 없는 중국 파이. 저희 홍성은 그 파이를 CGM보다 한 발 앞서 링겐이 가져가길 희망합니다."
"저희도 할 수만 있음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죠. 하지만 방법을 모르고, 방법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 일을 함께 해줄 파트너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는 거고..."
상대의 얼굴에 노골적인 미소가 번지는 순간 난 상무보에게 넘겨받은 칼날을 상대의 목까지 가져갔다.
"만토바 쪽에서 이탈리아 명품 유아, 아동 브랜드들을 대신 섭외해주기로 약속했습니다."
"..."
그제야 슬며시 꼬았던 다리를 풀며 양쪽 팔꿈치를 테이블 위로 올려 자세를 앞으로 숙이는 상대.
"프랑스, 독일 쪽 브랜드들까지 만토바에게 다 의뢰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 부분은 일단 링겐 측의 여력을 확인해 본 뒤에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너무 한 곳과 깊은 관계를 두면 위험할 수 밖에요."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 보다는 현재 중국에서 만토바와 함께 하고 있는 사업의 규모가 워낙에 크다보니 유아복 쪽으로 만토바의 에너지를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더 크죠. 유아복 관련 사업은 지금 당장 캐시를 뽑는 사업이라고 하기 보다는 미래를 보
고 하는 사업이니까요."
"미래를 보고 하는 사업이다..."
"하지만 링겐에선 저희가 미래를 보고 하고 있는 그 사업이 캐시카우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흐음..."
"프랑스, 독일 쪽 유아 명품 브랜드 전량 앞으로는 링겐을 통해 사입을 하고 싶습니다."
"저희야 마다할 이유가 없죠."
"그러기 위해선 어느정도 선의 마진 조율이 필요하고, 또 현재 CGM에 막혀서 링겐이 따오지 못하고 있는 컬렉션들도 앞으로는 저희 홍성을 위해 확보를 해줄 수 있다는 약속이 필요합니다."
"마진 조율보다 더 어려운 미션이군요."
"그걸 저희가 수월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미스터 전을 모시고 이곳까지 온 겁니다."
장향은에게 준비해온 자료를 꺼내보라고 눈짓을 준 다음 커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적셨다.
"당장 다음 시즌 컬렉션부터 CGM은 이탈리아쪽 유아복 브랜드들을 만토바와 나눠가지게 될 겁니다."
"다음 시즌부터 바로 만토바로부터 물건을 받으시는 겁니까?"
"이미 결정이 났는데, 계속 CGM의 물건을 팔아줄 이유는 없으니까요."
"CGM이 정말 건드리지 말아야 할 상대를 건드렸군요. 하하하.."
"아마도 이탈리아 브랜드들이 만토바 쪽으로도 물건을 풀게 되면 프랑스, 독일 브랜드들은 어쩔 수 없이 현재 CGM이 반 독점 비슷하게 이끌어오고 있는 현 시장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만토바가 이탈리아 브랜드들처럼 그들에게 직접 접근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입장에선 여전히 CGM에게 끌려다닐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저희 링겐이 소화하는 물량만으로는 어림없습니다."
"올해 안으로 Kidshub는 중국 시장에 들어갑니다."
"...!"
"Kidshub가 한국에서 소화하는 물량만 가지고 링겐이 브랜드들을 상대로 딜을 걸기는 당연히 어려울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지만 Kidshub의 시장이 중국으로까지 넓혀진다면 말은 달라질 수 밖에요. 프랑스, 독일 브랜드들만 집중해서 물량을 확보해주시면 됩
니다. 필요하시면 Kidshub 카드를 브랜드 업체들을 상대로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Kidshub의 중국진출이 조금 전까지는 대외비였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대외비가 아닙니다."
"후우..."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정보를 알게 된 바우만.
그는 입맛만 다셨고, 난 그의 목줄을 향해 칼을 깊게 찔러넣었다.
"만토바는 앞으로도 유아, 아동복 쪽이 아닌 성인복 쪽에 집중을 할 겁니다. 변화를 귀찮아하는 사람들이죠. Kidshub가 안전하게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까지만 저희 홍성을 도와주고 그 뒤부터는 다시 홍성이 그들의 주력인 성인복에 집중을 해줘야 하는 그림입
니다. 만토바가 유아, 아동복 쪽에 손을 터는 순간 이미 CGM 이 아닌 만토바 쪽으로 돌아선 이탈리아 유아복 브랜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
"그때가서 링겐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 브랜드들을 링겐 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다 주워담기만 하면됩니다."
"그런데 그걸 왜 홍성이 직접 하지 않고..."
"뭘 말입니까?"
"그런 완벽한 시나리오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직접 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직접 유아복 브랜드들과 접촉을 해서 브랜드를 따내면 마진에서 훨씬 더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컨트롤 기업입니다. 1차 밴드가 아니죠. 기업의 아이덴터티를 지키는 것 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저희 홍성입니다. 돈이 된다고 1차 밴드 사업에 뛰어들기 위해선 그만큼의 맨파워 보충도 필요하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 시간적 소모도 클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에 들어갈 비용 모두를 차라리 저희에게 의리를 지켜줄 1차 밴드쪽 마진으로 잡아주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일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CGM에게 굴욕을 준 홍성 쯤 되면 컨트롤 기업으로만 남기엔 아쉽지 않습니까?"
게임 끝.
"홍성은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저희는 1차 밴드들과의 관계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그래서 CGM의 기습 도발에 무척 큰 배신감을 느꼈던 거죠. 1차 밴드가 든든해서 괜찮은 물량을 안정되게 공급을 해줘야 저희도 안심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진행할 수 있
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절대 1차 밴드들의 그릇을 넘볼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1차 밴드들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꾸준히 고민해오고 있었죠. 그래서...현재 브랜드 매입 중에 있습니다."
"...!"
"혹시 쁘띠토널이라는 브랜드를 알고 계십니까?"
바우만은 회의에 함께 참석한 링겐 쪽 관계자에게 쁘띠토널에 대해 아는 게 있느냐고 물었고, 바우만의 질문을 받은 관계자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으나 현재 링겐이 취급하고 있는 브랜드는 아니라고 짧게 대답했다.
"Kidshub에 들어간 브랜드들과 섞어서 한국과 중국 시장에 동시에 내놓으면 브랜드 인지도를 띄우는 건 일도 아니겠죠. 실제로 브랜드의 역사도 있고, 제품 역시 확실하니까요. 그걸...링겐에도 한 번 깔아보고 싶습니다."
속전속결이었다.
장향은이 곧바로 노트북 화면에 쁘띠토널 홈페이지를 띄워 바우만 앞으로 돌렸고, 바우만은 그걸 한참동안 마치 공부하듯 확인했다.
"그렇게 하는 걸로 하죠. 매장 자리 하나 비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마진 부분...현재 저희가 홍성에게 주고 있는 마진 베이스를 확인해봤는데, 여기서 더 내릴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없는 거 같던데요."
"크레딧 노트로 올리는 수입이 마진 몇 퍼센트 보다 더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발주를 넣어드리겠습니다."
크레딧 노트.
컨트롤 기업과 1차 밴드가 사용하는 크레딧 노트의 개념은 조금 다르다.
홍성과 같은 컨트롤 기업이 말하는 크레딧 노트는 가령 제품에 하자가 있거나 반품이 들어왔을 경우 그 제품을 브랜드 업체나 1차 밴드에게 돌려보낸 뒤, 그걸 환불받는 게 아니라 다음 오더 시에 그 금액 만큼 차감을 시킨 상태로 인보이스를 처리하는 걸 말한
다.
하지만 만토바나 링겐과 같은 대형 1차 밴드에서 말하는 크레딧 노트는 워낙에 브랜드 업체들을 상대로 한 번에 밀어넣는 주문량이 많기 때문에 일종의 리베이트를 받는데, 그 리베이트를 크레딧 노트라고 표현한다.
가령 30억 원치 정도 한 브랜드를 상대로 오더를 하면 거기에 따른 3.3퍼센트 즉 1억 정도의 크레딧 노트를 제공받는데, 그 크레딧 노트를 그 다음 시즌 오더때 현금처럼 쓸 수 있다.
"Kidshub가 중국 시장에 들어가는 순간, 그리고 링겐이 그 kidshub를 무기로 CGM이 반 독점하고 있는 브랜드들을 다 따오는 순간 현재 홍성이 링겐을 상대로 밀어넣고 있는 발주량보다 최소 20배 이상은 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H.I 편집샵의 매출이
중국 시장에 들어가자마자 딱 그 정도 뛰었습니다."
미팅을 백 퍼센트 홍성 쪽으로 유리하게 마무리짓고 나오는 순간 상무보는 그간 막혀있던 한숨을 쏟아냈다.
"후우...쉬는 타임이 없네. 치고받고, 또 치고받고...원래 이래요?"
"상대에 따라 다르죠. 그런데 오늘은 운이 좋았습니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를 만나서 빨리 끝날 수가 있었습니다."
"공 차장. 방금 있었던 미팅 결과 영문으로 보고서 하나 만들어줄 수 있나?"
"네, 한국 들어가서 곧바로 올리겠습니다."
"아니, 오늘 당장 필요해요."
"...네?"
"아까...여기 오는 길에 차 안에서 이문 본부장님한테 전화를 한 통 받았어."
"아...네, 아까 차 안에서..."
"본부장님도 지금 프랑스에 계신대."
"네?"
"쁘띠토널 그 쪽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었나봐요. 만나서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아마도 저번에 공 차장이 만토바에서 가져다 준 무기가 제대로 먹혔나봐."
"이렇게 급하게 만남을 제안할 정도면 이미 그쪽에선 결정을 내렸다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오늘 미팅 보고서는 왜..."
"본부장님이 요청을 하시네. 쐐기를 박겠다는 뜻이겠지. 아까 전화가 와서 마진 조율이랑 쁘띠토널 밀어넣는 거 둘을 동시에 못할 거 같으면 마진 조율은 잠시 다음으로 미루고 쁘띠토널 밀어넣는 쪽에 집중을 해달라고 하셨어. 그 카드만 있으면 그쪽 재고 안
떠안고도 브랜드 매입이 가능할 거라고..."
이 양반이 지금 정신이 있는 양반인가, 없는 양반인가.
만약 운이 나빠서 쁘띠토널 밀어넣는 것도 실패를 했으면 어쩔 뻔 했어?
나야 아무것도 몰랐으니, 원래 계획했던 대로 판을 이끌었던 거지, 만약 이문 본부장님이 나에게 직접 연락이 와서 그런 주문을 하셨다면 난 당연히 마진 조율은 포기를 했을 거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날 싱긋이 바라보며 상무보가 말했다.
"어쨌든 결과는 좋았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
"나는 공 차장이 어떻게 마진 협상을 하는지, 그걸 꼭 한 번 바로 옆에서 보고 싶었어요."
상무보의 얼굴에 감돌기 시작하는 장난끼.
"사장님도 일전에 그 말씀 한 번 하시더라."
"뭐라고..."
"공 차장 양심 없다고."
"...네?"
"아니, 어떻게 나크리스 마진을 그렇게까지 낮춰버릴 수가 있느냐고 말이에요."
"아..."
"거의 기록적인 거라면서? 우리 홍성 뿐 아니라 업계에서 디자이너 브랜드 마진을 그렇게까지 후려치는 경우는 없다고 하시던데?"
"그야 뭐..."
"나는 오늘 미팅에서 공 차장이 두 마리 토끼 다 잡아낼 줄 알았어요. 미팅 전에 나랑 모의 미팅만 몇 번을 했어?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무기도 확실한데, 홍성 에이스가 그 정도도 못해내면 그건 공 차장이 아니라 우리 홍성 간판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
가?"
"그래도 살짝 위험할 뻔 했습니다.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실 이유가..."
"위험해? 뭐가요?"
"본부장님이..."
"나 상무본데? 타이틀만 봐도 내가 본부장님 보다는 좀 더 높지 않나?"
저걸 저렇게 웃는 얼굴로 장난스럽게 말을 하니까 농담인 건지, 진담인 건지 알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사장이 아버지라도, 상무보 정도 타이틀을 잡고 있으려면 그정도 안목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난 그냥 백 퍼센트 였어. 가만히 말 안하고 놔두면 공 차장이 알아서 다 할 건데, 뭐하러 굳이 전쟁하러 가는 사람한테 그런 제약을 걸겠어.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