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아주 칭찬해
마흔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는 자신의 얼굴에 자신의 아버지 얼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는 상무보의 말을 들으며 난 겉으로 내색은 못했지만, 속으로 참 많은 공감을 하게 됐던 거 같다.
나도 언제부턴가 내 얼굴과 행동, 말투에서 나도 모르게 내 부모님을 발견할 때가 있었으니까.
"오..."
도착한 호텔.
나와 장향은은 호텔 로비에서 행복한 당황을 하기 시작했다.
빠듯한 예산을 쪼개어 출장 스케줄을 잡기 위해선 숙소 쪽에서 절약을 할 수 밖에 없다.
항공권 가격이야 시즌에 따라 항상 복불복이니까.
주로 우린 하루 숙박 80유로를 넘지 않는 선의 3,4 성급 호텔을 이용하는데 역시나 상무보의 동행으로 링겐 아웃렛과 어느정도 거리는 있지만, 그 일대 최고 다운타운이라고 할 수 있는 클라마(다운타운 이름) 역 근처의 5성급 보-리바쉬 호텔을 이용하게 됐다.
"여권 좀 저한테 다 주시겠어요?"
"아, 네. 여기..."
상무보의 비서가 일괄 체크 인을 하기 위해 여권을 모아서 프론트 데스크 쪽으로 갔고, 그녀가 체크 인을 하는 동안 나와 상무보, 그리고 장향은은 호텔 로비 소파에 앉아 웰컴 드링크로 준비되어 있는 미지근한 블랙티를 한 잔씩 마셨다.
"..."
그리고 난 스마트 폰 카메라로 자신의 얼굴을 잡기 시작하는 상무보의 모습을 재미있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띠리디리딩딩, 띠리디리딩딩...
어딘가로 영상 통화를 시도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받지 않았고, 상무보는 다시 한 번 영상 통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상대는 받지 않았다.
"아...집 사람한테 도착해서 호텔 들어왔다 말해주려고."
묻지도 않았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운 듯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상무보가 말했다.
꽤 자상하고 또 가정에 성실한 사람이네...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곧 체크 인 수속을 끝내고 방 카드를 받아서 돌아오는 비서로 인해 그런 생각도 얼마 가지 못했다.
우린 각자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며 개인시간을 잠시 가지다가 상무보 비서의 호출로 호텔 레스토랑으로 다시 모이게 됐다.
이른 저녁.
우리 일행 말고는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 안의 상황을 보아하니, 아마도 이제 막 브레이크 타임이 끝이나고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을 해봐도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기내식이 먹을 땐 참 좋은데, 먹고 나면 소화가 잘 안되는 거 같아요."
"네, 저도 지금은 딱히..."
"그래도 일단 식사는 해야 되니까...조금 이르지만 식사하고 다시 각자 방으로 들어가서 개인 시간 가집시다."
이렇게 나와주면 나야 땡큐지.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우린 다시 한 번 다음날 일정과 링겐 측과의 미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식전주로 주문한 쌉싸름한 레드 와인이 먼저 도착했고, 그걸 테이스팅 하던 상무보의 스마트폰으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상무보는 와인을 서비스 하던 호텔 직원에게 이만하면 됐다는 표정으로 짧게 고개만 끄덕인 후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헤이, 민찬. 어린이집 잘 갔다왔어?"
왼손으로 스마트 폰을 들고 오른손은 그 스마트 폰 카메라를 향해 흔드는 상무보.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올라간 상태였고, 아들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는 그의 눈엔 오로지 자신의 아들만 보이는 듯, 같은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받고 있는 우리 일행의 시선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거 거 같았다.
"아빠? 아빠는 지금 일하러 와서 잠시 회사 사람들이랑 밥 먹으러 왔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홍성에서 장 부장을 비롯해 여러 상사들을 모시고 참 많은 출장을 다녀봤지만, 부하 직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저렇게 집에서 하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하는 상사가 있었던가...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처음 그가 그의 아들과 영상 통화를 시작할 때엔 보고 있는 내가 다 민망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게 맞는 거 아닌가...
어쩌면 저게 맞는 거고, 장 부장을 비롯해 그동안 내가 함께 출장길에 오르며 보조를 맞춰야 했던 다른 상사들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상무보는 스마트 폰 카메라를 통해 레스토랑 내부를 자신의 아들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스마트 폰 액정 속 그의 아들과 내가 눈이 마주쳤을 때엔 난 나도 모르게 그 화면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민찬이 안녕하세요, 해야지. 아빠랑 같이 일하는 삼촌이야. 여긴 같이 일하는 이모."
"전 그냥 누나라고 해주시면 안될까요?"
"누나래. 누나라고 불러줘."
장향은의 농담에 상무보는 재빨리 말을 바꾸며 그의 아들에게 장향은을 누나라고 다시 소개했다.
보기가 참 좋았다.
그래...그냥 이렇게 하면 되는 건데, 그동안 난, 그리고 우린 뭐가 그렇게 심각해서 출장을 오거나 아님 직원들 회식 자리에서 가족들, 여자 친구, 남자 친구, 그냥 사람 친구들의 연락을 쉬쉬하며 밖에 나가서 숨어받고 또 서둘러 끝내야만 했단 말인가.
회사 사무실에서 보내는 업무 시간이야 그렇게 하는 게 정상이지만, 사실 회식 자리나 지금과 같은 출장 길에서는 조금 스스로에게 관대해져도 괜찮을텐데 말이다.
식사 자리에서 아들과 영상 통화하는 걸 보여준 상무보의 모습은 최소한 내게는 작은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작은 울림은 꽤 큰 파장을 만들어냈는데,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쓰기엔 조금 어색한 장소고 또 상황이었지만, 앞으로 내게 어떤 마인드로 직장 생활을 해야하는지 그 길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럼 이제 아빠 밥 먹어야 되니까, 민찬이는 엄마하고 놀아. 카라멜 먹었으니까 3분 동안 꼭 치까뽀까하고. 알았어요. 두 밤만 더 자고 아빠 집에 갈게요. 빠빠이."
통화를 끝내며 상무보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말이 제법 많이 늘었어요. 애들은 정말 하루가 달라. 이렇게 며칠 못보고 다시 보잖아요? 그럼 또 이만큼 커있다니까?"
장향은이 상무보의 기분을 맞춘답시고 애가 참 예쁘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무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의 사진을 장향은에게 보여줬다.
"참 가정적이신 거 같습니다."
"그걸 좀 더 잘 해보겠다고 하는 게 일이고 직장에 나와서 돈 버는 거 아닌가?"
"....그렇네요."
"...?"
"너무나 당연한 이유인데, 한 번식 회사 일에 함몰되다 보면, 그 당연한 걸 잊고 사는 거 같습니다."
링겐까지 오는 비행기 안에서 정작 말은 내가 메인인 삶을 살고 싶다고 해놓고, 난 내가 메인인 삶을 어떻게 사는 건지 그 방법 조차 모르고 있었던 거 같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객실로 올라간 난 정말 아주 오랜만에 강혜선과 1시간 넘게 통화를 했다.
결혼을 한 뒤부터 강혜선과 10분, 아니 10분이 뭐야? 5분 넘게 통화를 했던 적이 과연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린 통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필요한 내용은 다 카톡으로 주고받았고, 또 일 마치고 집에가면 안 그래도 볼 건데, 굳이 통화를 길게 할 일이 없었던 거지.
-알았어, 그럼 피곤할텐데 일찍 씻고 자.
"왜? 할 거 없잖아. 통화 조금만 더 하자."
-갑자기 왜 그래?
"그냥 갑자기 당신 목소리를 좀 길게 듣고 싶네."
-오올...완전 느끼한데?
"나랑 우리 아버지가 많이 닮았나?"
-생긴 건 어머님이랑 많이 닮았지. 그런데 식성, 무뚝뚝한 거...그런 건 아버님을 많이 닮았고.
"그렇지? 내가 참 무뚝뚝하지?"
-그걸 말로 해서 뭐해? 무뚝뚝하기만 하면 다행이게? 밖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하는 감정 표현은 완전 초딩이지.
"초딩? 내가 어떻게 하는데?"
-좋은 걸 좋다고 말하면 지는 줄 아는 모양이야. 아영이한테 하는 것만 봐도 그래. 그렇게 좋아서 물고빨고 하면서도 정작 아영이 앞에선 툭툭 욕이나 하고.
"그게 무슨 욕이냐?"
-처음 내 귀엔 그렇게 들렸어. 이제야 아닌 걸 아니까 그렇지, 처음 당신이 아영이한테 하는 말 듣고 속으로 얼마나 놀랐게?
"...그런가?"
-나야 아빠가 경상도 분이시니까 당신이 하는 그 청개구리식 표현에 어느정도 익숙해서 별 말 안하는 거지, 다른 여자였음 진작에 싸움 났어. 그때 장 부장님 내외랑 함께 했던 식사 자리에서도 그래.
"...?"
-그 자리에서 내 험담을 왜 그렇게 많이 해?
"내가?"
-거 봐, 거 봐. 나 당신 기억 못할 줄 알았어. 분위기가 너무 좋았고, 또 당신이 그런 속에도 없는 말을 해도 다 행복해서 하는 농담이란 걸 그 분들이 이해해줄 수 있는 자리였으니 내가 별 말 안했던 거지 다른 자리에서도 그랬음 나 그때처럼 정색 했을 거야.
"흐음...그때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은 잘 안나는데...아무튼 앞으로는 좀 바뀌어야겠어."
-...
"사실 회사에서 한 번씩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나한테 요즘 신혼 재미가 어떻냐, 좋냐...그런걸 막 물어보잖아. 그럼 이상하게 좋다는 말을 있는 그대로 하려니까 나도 모르게 낯간지럽고 민망해서 마치 결혼이 연애의 무덤인 것처럼 아재감성 실어서 말을 했었
단 말이야. 그런데 앞으로는 안 그래야겠어. 이제 알겠어. 행복하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진짜 행복한 거고...다른 사람들에게 내겐 가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보여줘야...그 사람들이 나한테 맞춰주는 거 같아. 내가 내게 가장 중요한 가정에 집중을 할 수 있도
록."
-내가 지금까지 당신한테 들어봤던 말들 중 가장 기름진 대사이긴한데...이상하게 칭찬해주고 싶네. 기특해. 그런 마인드...아주 칭찬해.
강혜선과의 통화를 끝내고 난 아주 오랜만에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찾아들어가봤다.
연애 초기때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그녀의 인스타 사진을 보며 혼자 행복한 상상을 했던 나.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녀의 인스타는 더이상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고, 원래 인스타 같은 SNS를 하지 않는 난 자연스럽게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발길이 뜸해질 수 밖에 없었다.
"크크큭..."
지난주 만토바에서 받아온 가방을 자신의 인스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사진 아래로는 마치 그 가방을 내가 선물을 한 것처럼 코멘트를 달아놓은 강혜선이었다.
출장 마치고 가는 길에 구두나 한 켤레 사다 줘야겠다.
다음날 아침.
나와 장향은은 호텔 로비에서 먼저 만나 상무보의 객실로 갔다.
그의 비서가 먼저 객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식사 하셨어요?"
"네,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나의 대답에 상무보의 비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상무보 객실문을 노크했다.
잠시 뒤 외출 준비를 모두 끝낸 상무보가 필기체 인그레이빙이 들어간 벨루티 서류 가방 하나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 다 끝났나요?"
"네, 바로 나가시면 됩니다. 링겐 쪽에서 호텔 로비 앞으로 픽업 차량을 준비시켜 놨습니다."
"아이고...원래 그러나요?"
"아뇨. 상무보님이 직접 오신다고 했더니, 그쪽에서도 신경을 쓰고 있는 겁니다."